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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명직 판사의 임무는 '소수자 보호'

입력
2023.10.10 19:00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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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영
박주영부장판사

편집자주

<어떤 양형 이유> <법정의 얼굴들>의 저자인 박주영 판사가 세상이란 법정의 경위가 되어 숨죽인 채 엎드린 진실과 정의를 향해 외친다. 일동 기립(All rise)!

삽화=신동준 기자

삽화=신동준 기자


늘어나는 목적론적 법 해석
함께 높아지는 판사의 고민
선출 권력 못챙긴 역할해야

실제 재판에서 승패를 가르는 건 사실관계다. 판사 생활을 돌아보면 법률 해석이 결론을 좌우한 건 2할도 채 되지 않는다. 그러나 해석 싸움이 훨씬 더 격렬하다. 사실은 움직일 수 없으나 의견은 구구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법 해석 방법은 크게 4가지로 분류된다. 문리적 해석(법령의 문언적 의미에 따른 해석, '문언의 가능한 의미'가 적법한 해석의 한계가 됨), 논리적·체계적 해석(해당 법 규정이 속한 법체계 전체의 논리적 맥락에 따른 해석), 역사적·주관적 해석(입법자의 의도에 맞는 해석, 법관의 기능과 역할을 단지 '법을 말하는 입'으로 축소시킴), 목적론적·객관적 해석(입법자의 의사가 지향하는 법의 정신을 사회 상황에 맞게 해석, 법의 이념에 따라 문언을 보충하거나 법문을 초월하는 해석까지 허용함)이 그것이다.

최근 대법원은 "강제추행죄의 '폭행 또는 협박'은 상대방의 항거를 곤란하게 할 정도로 강력할 것이 요구되지 아니하고, 상대방의 신체에 대하여 불법한 유형력을 행사(폭행)하거나 일반적으로 보아 상대방으로 하여금 공포심을 일으킬 수 있는 정도의 해악을 고지(협박)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고 종전 입장을 변경했다(대법원 2023. 9. 21. 선고 2018도13877 전원합의체). 이 판례는 목적론적 해석을 취한 것이라 볼 수 있는데, 성폭력범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나 재판 실무의 변화에 따라 해석기준을 명확히 할 필요성에 따른 것이었다.

여러 방법론에 불구하고 판사에게 하드케이스는 이보다 더 괴로울 수 없다. 안개 자욱한 이포에서 살인 사건을 처리하며 사랑과 정의 사이를 갈팡질팡하는 장해준 경감(영화 '헤어질 결심')의 모습에 판사를 겹치는 건 지나치게 낭만적일까. 법 해석이 어려운 이유는 세상사의 불확실성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슬픔이 파도처럼 덮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물에 잉크가 퍼지듯이 서서히 물드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헤어질 결심)

법이 발견되든 해석을 통해 정당화되든, 법관의 판단을 통해서만 그 실체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판사 개인의 정성과 역량이 대단히 중요하다. 각종 정치·사회적 난제가 법원으로 마구 넘어오는 시대에는 더욱 그러하다. 이처럼 중차대하고 난해한 결정을 판사 1인에게 맡겨도 되는가라는 우려가 쏟아진다. 판사들이라고 그런 의문이 없는 게 아니다. 헌법의 명령이라 피할 수 없을 뿐이다. 직업법관제도가 국민이 직접 사법권을 행사하는 것이 곤란하고, 생명과 자유 등 중대 사안에 대한 결정을 다수결로 밀어붙이는 걸 방지하기 위한 취지임을 이해해도, 국민이 직접 뽑지 않았다는 점은 판사의 딜레마이자 취약성이다. 이에 대해 김영란 전 대법관이 강연에서 명쾌한 답을 제시했다. "선출되지 않은 권력으로서의 정당성은 선출 권력이 대변하지 못하는 소수자 보호임무에 있다." 다수인 선출 권력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라고 판사를 선거 없이 발탁한 것이다. 따라서 소수자 보호임무를 소홀히 하는 판사는 존재의 이유가 없다.

법원에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법보다 사람에게 더 눈길이 간다. "법질서의 임무는 인간이 보초병처럼 간단없이 주위를 경계하도록 만드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온갖 걱정을 잊어버리고 별과 수목, 인생의 의미와 의(義)에까지 고양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데 있다."(구스타프 라드브루흐)

구구한 해석론을 떠나 법이 진정으로 추구하는 목적은 통제가 아니라 자유다. 바른 법 해석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사회구성원 모두가 별과 인생을 마음 놓고 노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박주영 부장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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