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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 발언'을 하는 사람에게도 표현의 자유는 있다... 입막음보다는 대항을

입력
2023.10.07 04:30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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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혐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최초의 흑인 미국 대통령'이라는 영광스러운 수식어를 얻었지만 동시에 평생 인종차별에 노출된 채 살았다. 그러나 강력한 시민권 옹호론자인 오바마는 '혐오표현 금지'를 주장하는 대신, 2016년 하워드대 졸업식 축사에서 '대항표현'을 옹호하며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은 불의에 직면하여 목소리를 높여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지금 연습을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인생의 모든 단계에서 무지, 증오, 인종차별에 대처해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AFP 연합뉴스 자료사진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최초의 흑인 미국 대통령'이라는 영광스러운 수식어를 얻었지만 동시에 평생 인종차별에 노출된 채 살았다. 그러나 강력한 시민권 옹호론자인 오바마는 '혐오표현 금지'를 주장하는 대신, 2016년 하워드대 졸업식 축사에서 '대항표현'을 옹호하며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은 불의에 직면하여 목소리를 높여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지금 연습을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인생의 모든 단계에서 무지, 증오, 인종차별에 대처해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AFP 연합뉴스 자료사진

#1. 아프리카계 미국인인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재임 내내 '인종혐오' 발언에 시달렸다. 후임자인 도널드 트럼프마저 공개 석상에서 그의 '출생증명서'에 집착할 정도였으니. 어쩌면 그는 내심 혐오발언 금지와 처벌을 갈망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강력한 시민권 옹호론자인 그는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에게 불쾌감을 주거나 여성을 비하하는 신호를 보내는, 이른바 혐오표현에 대해서도 '표현의 자유'를 강하게 지지했다. "논쟁을 벌이십시오. '나는 너무 예민해서 당신이 해야 할 말을 들을 수 없다' 말하면서 누군가를 침묵시켜서는 안 됩니다."

#2. 1977년, 미국 일리노이주 스코키 마을에서는 신나치들의 반유대인 시위를 허용해야 하는가를 놓고 격론이 벌어졌다. 이 사건은 나쁜 행위를 법적으로 금지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거리를 제시했다. 미국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옹호하는 단체인 '미국시민자유연맹' 최고위직을 맡던 아리에 나이어는 홀로코스트 생존자였으나,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며 나치에 대한 검열에 반대했다. 1979년 그가 스코키 사건에 대해 출간한 책의 제목은 '나의 적을 옹호하다(Defending my enemy)'였다.

'나치에 반대한다. 그러나 그들의 표현의 자유는 보호되어야 한다' 혹은 '여성 혐오나 성소수자 혐오는 잘못되었으나 그러한 발언을 법적으로 처벌하는 것은 문제적이다' 같은 말은 얼마든지 양립가능하지만, 이분법이 만연한 사회에서는 쉽게 오해를 사고 만다. "타인을 혐오하거나 타인에 상처를 주는 발언을 어떻게 방조하자고 주장할 수 있느냐!"라는 거센 분노를 일으키면서.

하버드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변호사 활동을 거쳐 현재 뉴욕 로스쿨 교수로 재직 중인 저자 네이딘 스트로슨은 헌법과 시민의 자유를 옹호하는 선도적 전문가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아르테 제공

하버드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변호사 활동을 거쳐 현재 뉴욕 로스쿨 교수로 재직 중인 저자 네이딘 스트로슨은 헌법과 시민의 자유를 옹호하는 선도적 전문가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아르테 제공

'혐오표현 연구자'이자 미국에서 표현의 자유를 가장 옹호하는 사람 중 한 명인 네이딘 스트로슨 뉴욕 로스쿨 교수는 저서 '혐오'에서 혐오표현을 침묵시키고 싶은 유혹에 저항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미국시민자유연맹 회장을 지내고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법률가 100인' '마거릿 브렌트 여성법률가상' 등을 수상한 이 명망 있는 법조인은 '혐오표현금지법' 같은 법적 규제와 검열을 채택하는 것이 도덕적 만족감은 줄 수 있어도 사회 전체를 보았을 때 득보다 실이 많다고 본다. 엄격한 혐오표현금지법과 홀로코스트부정금지법이 있지만 우익 나치즘의 출현을 막지 못한 독일의 사례를 보라. 이따금 혐오표현금지법에 좌절된 혐오 발언자가 '핍박받은 순례자' 행세를 하며 대중을 선동하는 건 또 어떤가.

저자는 '적의 혐오표현도 표현의 자유다'라는 문장을 대중에 설득시키기 위해 많은 분량을 할애한다. 특히 미국에서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수정헌법 1조를 이론적 토대로 삼아 '혐오표현금지법'이 표현의 자유 원칙과 평등 원칙을 위반한다고 분석하며, 이 같은 법적 제재가 효과가 있는지를 고찰했다.

책은 미국 법체계를 논의의 기반으로 삼기에, 한국에 그대로 대입하기는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만연한 혐오표현과 그에 맞서는 뾰족수가 마땅치 않은 국내 현실을 고려하면 '혐오표현'에 입막음을 강요하는 것은 충분치 않을 뿐 아니라 역효과를 낸다는 그의 체계적 논증은 충분히 참고할 만하다. 국내 혐오 발언 연구 권위자인 홍성수 숙명여대 법학부 교수와 유민석 철학박사가 번역을 맡았는데, 역자들은 이 책을 '혐오표현의 개념, 혐오표현금지법의 이론적 쟁점과 현실적인 문제점, 그리고 실천적 대안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교과서'라 평했다. 책의 말미에는 국내 사례를 풍성하게 언급하는 홍 교수와 저자의 대담이 부록으로 수록되어 있어, 한국 독자들의 이해를 돕는다.

저자 네이딘 스트로슨과 역자 홍성수 숙명여대 법학부 교수의 대담 장면. 아르테 제공

저자 네이딘 스트로슨과 역자 홍성수 숙명여대 법학부 교수의 대담 장면. 아르테 제공

책은 '혐오표현을 말할 자유'를 논증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차별에 맞서는 가장 강력하고 효과적인 해법으로 '대항표현'을 제시한다. 나쁜 표현을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표현으로 맞서 싸워야 한다는 의미다. 유럽인종차별위원회뿐 아니라 트위터 같은 민간기업까지도 혐오표현은 삭제하거나 금지하는 것보다 '좋은 메시지'를 발신함으로써 더 나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발표한 바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더 나은 표현'으로 검열 없이 혐오에 대항할 수 있을까. 저자는 전략적 실천법으로 △소외된 사람들에게 힘 실어 주기 △전통적으로 소외된 집단에 대한 정확하고 긍정적인 정보를 전달하는 교육 △더 두껍고 얇은 피부 개발하기(우리를 대상으로 하는 혐오표현에 덜 민감해지고 타인을 대상으로 하는 혐오표현에 더 민감해지기) △혐오 발언자들의 진정한 사과 △집단 간 접촉 및 상호작용 △개인적인 자율적 제한을 제안한다.

'혐오표현'과 '표현의 자유' 논의에서 '모 아니면 도' 같은 이분법에 빠지지 않고 탄탄한 논리와 균형감각으로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하는 용기 있고 대담한 저술이다. 저자가 제시하는 구체적이고 명확한 대응책을 알게 되는 것만으로도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선량한 무기를 얻은 듯한 든든한 기분이 들 것이다.

혐오·네이딘 스트로슨 지음·홍성수, 유민석 옮김·아르테 발행·332쪽·2만8,000원

혐오·네이딘 스트로슨 지음·홍성수, 유민석 옮김·아르테 발행·332쪽·2만8,000원


이혜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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