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서 왕실모독죄 관련 전시회 관람
"의견 무시한다고 사라지는 것 아니다"
27년 전 왕실을 떠났던 태국 국왕의 아들이 ‘왕실모독죄’에 대한 사회적 논의를 촉구했다. 왕실을 비판하면 중죄에 처하는 왕실모독죄는 태국 군주제를 보호하는 장치다. 어린 시절 왕자 지위를 박탈당하긴 했지만, 왕가의 일원인 그가 군주제 이슈를 제기한 것 자체가 태국 사회 변화를 예고한다는 해석이 나왔다.
20일 AFP통신 등에 따르면, 마하 와찌랄롱꼰 태국 국왕의 둘째 아들 바차라에손 위왓차라웡(42)은 미국 뉴욕에서 열린 왕실모독죄 희생자 관련 전시회를 둘러본 뒤 페이스북에 “동의 여부와 관계없이 의견과 관점 차이를 인정하고 대화하자”며 왕실모독죄에 대한 재논의를 제안했다. 그가 본 전시회 ‘112 희생자의 얼굴’은 태국에서 왕실모독죄로 기소된 사람들을 조명했다.
바차라에손은 “군주제를 사랑하고 존중하지만 모르는 것보단 아는 것이 낫다고 믿는다”며 전시회 관람 배경을 설명했다. 이어 “모든 사람은 다양한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의 의견을 공유해야 한다. 누군가의 의견을 무시한다고 해서 그 의견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바차라에손은 국왕과 둘째 부인 쑤짜리니 위왓차라웡 사이에 태어난 5남매 중 둘째다. 15세였던 1996년 어머니가 간통을 저질렀다는 혐의를 받고 왕실에서 내쳐지면서 그의 왕자 신분도 박탈당했다. 이후 미국으로 이주한 그는 뉴욕에서 변호사로 일해 왔다.
27년간 왕실과 연을 끊었던 그는 지난달 태국을 깜짝 방문했는데, 이후 후계 구도에 변화가 생기는 것 아니냐는 추측이 제기됐다. 현 국왕은 4번 결혼해 7명의 자녀를 두고 있지만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았다. 유력 왕위 계승자인 첫째 딸 팟차라끼띠야파 나렌티라텝파야와디가 10개월째 의식 불명 상태인 까닭에 바차라에손이 경쟁자가 없는 틈을 타고 왕위를 노리는 게 아니냐는 분석도 이어진다.
바차라에손의 일거수일투족에 태국인의 관심이 쏠리는 시점에 그가 모국의 가장 민감한 이슈이자 정치판을 흔들 수 있는 주제를 수면 위로 끄집어낸 셈이다.
왕실모독죄로 불리는 태국 형법 112조는, 왕실 구성원은 물론 왕가의 업적을 모독하거나 왕가에 대해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등의 경우 최고 징역 15년에 처하도록 되어 있다. 왕실을 신성시하는 태국에서 군주제를 보호하는 상징적인 조항이지만, 군주제 개혁을 요구하는 세력은 이 법의 개정이나 폐지를 주장해 왔다.
최근 태국 총선과 정부 출범 과정에서도 쟁점이 됐다. 왕실모독죄 개정을 공약으로 내건 전진당이 젊은 세대의 지지를 바탕으로 5월 총선에서 제1당에 오르는 돌풍을 일으켰다. 총선을 승리로 이끈 피타 림짜른랏 전진당 대표가 총리 후보로 나섰으나 상·하원 합동 투표를 통과하지 못했다.
군부 등 보수 세력 정당과 상원 의원들은 왕실모독죄 개정 방침을 철회하라고 요구했으나 전진당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후 탁신 친나왓 전 총리 계열의 푸어타이당이 전진당을 배제하고 군부 진영 정당들과 연대해 집권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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