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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미한 고통이 종교가 된 사회, 그 서늘한 익숙함

입력
2023.09.16 04:30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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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라 장편소설 '고통에 관하여'
중독성 없는 진통제로 통증 사라진 사회
'고통이 곧 구원' 주장하는 종교의 탄생
경쟁 속 불안에 고통 감수하는 우리처럼
"의미 없는 고통은 거부해야 한다"

정보라 작가. ⓒHyeYoung

정보라 작가. ⓒHyeYoung

미국 곳곳에 소위 좀비 거리를 만든 마약성 진통제 펜타닐. 처음엔 차라리 죽고 싶다는 생각을 들게 하는 통증을 잠재우는 '기적'으로 불렸지만 오남용으로 이제는 '재앙'이 됐다. 약효는 더 강력하지만 중독성이 없는 진통제가 개발된다면 우리는 진짜 기적을 볼 수 있을까.

신간 ‘고통에 관하여’는 그런 상상을 뿌리로 해 자라난 소설이다. 부작용 없는 완벽한 진통제 'NSTRA-14'가 탄생했지만, 소설 속 세계는 (당연하게도) 밝고 맑지 않다. 신체적 통증이 사라지면 더 넓은 개념의 고통에 대한 질문이 줄어들고, 반작용처럼 고통이 구원이라고 믿는 종교가 등장한다. 고통은 인간에게 구원인가 저주인가. 철학적 물음 속에서 현실의 갖가지 고통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들여다보게 된다.

이 책은 지난해 '저주토끼'로 부커상 인터내셔널 최종 후보에 올랐던 정보라(47) 작가의 신작이다. 장편소설은 '붉은 칼' 이후 4년 만이다. 최근작인 연작소설 '한밤의 시간표'가 호러의 진수에 다가가려 한 작품이라면, 이번 작품은 작가의 첫 스릴러물이다. 특유의 환상성을 완전히 놓치지 않은 채 스토리 몰입감을 높였다. 그 안에 고통에 관한 철학적 사유도 품고 있어 무게감을 더한다. 이번에도 여성 폭력, 아동 학대 등 비극적 현실을 환상과 SF 세계에 녹여냈다. 비정규직 집회 등 현장에서 부지런히 발품을 파는 활동가 정보라의 날카로운 시선과 정제된 글, 번뜩이는 상상력은 여전하다.

이야기는 테러 사건의 범인 '태'에서 시작한다. 고통을 느끼는 것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준다고 믿는 신흥 종교 '교단' 소속인 그는 'NSTRA-14'를 개발하는 제약회사에 폭탄을 터뜨려 사상자를 발생시킨 혐의로 무기징역형을 받고 수감 중이다. 한동안 잠잠하던 교단은, 다시 연쇄적으로 벌어진 살인 사건들과 엮인다. 교단을 잘 아는 태를 동행, 수사를 벌이는 과정에서 경찰은 태의 형 '한'을 만난다. 수사가 진행될수록 한은 살인범으로 의심받는다. 한은 폭력을 동원해 일부러 통증을 느끼게 만들고 인내하는 게 일종의 수련 과정이고, 구원의 길이라고 믿는 인물이다. 소설은 범인을 찾는 추리물 서사구조를 취하지만 방점은 우리 현실을 소묘하는 데 찍혀 있다.

고통에 관하여·정보라 지음·다산책방·340쪽·1만8,000원

고통에 관하여·정보라 지음·다산책방·340쪽·1만8,000원

소설에서는 고통에 중독된 한국 사회의 단면이 읽힌다. 무한 경쟁을 교리로 앞세우고 불안을 원동력 삼아 굳이 더 깊숙한 정글로 쉼 없이 내달리는 사람들. 만성 스트레스, 그로 인한 위염과 편두통, 암까지. 그 통증을 견디며 그것이 곧 '레벨업' 과정이라고 믿게 하는 사회가 적나라하게 그려진다. 그리고 작가는 고통은 생존의 가치가 되는 게 정말 맞는지 묻는다. 그는 '작가의 말'을 통해 "의미 없는 고통은 거부해야 한다. 힘들고 괴로운 일이 모두 다 가치 있는 일은 아니다"라고 꼬집는다. 그래서 탈출할 길, 즉 다양한 삶의 선택지를 만드는 것이 우리 모두의 과제라고 강조한다.

"인간은 고통에 의미를 부여하여 삶을 견딥니다. 고통에 초월적인 의미는 없으며 고통은 구원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무의미한 고통을 견디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생존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삶을 이어나가기 위해서 인간은 의미와 구원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이 대목은 우리가 고통에 억지로 의미를 부여하며 버티는 삶만 살고 있지 않은지 자문하게 한다.

비극의 시작에는 늘 폭력이 있다. 특히 정보라 작가는 가정 폭력, 아동 학대, 성폭력 등 어린이와 여성이 일상 속에서 위협받는 현실에 끊임없이 관심을 보여왔다. 이 작품도 마찬가지다. "때려도 울지 않아야 착한 아이가 될 수 있다"며 진통제를 달라는 어린 아들(한)을 본 '홍'은 두 아이를 지키기 위해 도망친다. 안전한 거처를 마련하지 못해 전전긍긍하다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찾아간 곳이 하필 교단이다. 그곳에서 폭력은 다시 시작된다. 아니, 심지어 홍의 아들 태와 한은 가해자가 되어 버린다. 폭력의 굴레를 끊어내지 못한 셈이다.

'그럼에도'라는 희미한 빛을 본 건, 또 다른 서사의 축인 제약회사 대표의 딸 '경'과 그 동성 배우자인 '현'의 존재에서다. 경은 친족 성폭력 피해자인 데다, 부모를 테러로 잃고 홀로 남은 인물이다. 스스로 점차 회복해 가는 경의 서사는 그 자체로 모두를 향한 위로이자 위안이 된다.

진달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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