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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역항암제 잘 듣는 환자, AI가 찾아낸다… “디지털 병리 적극 도입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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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역항암제 잘 듣는 환자, AI가 찾아낸다… “디지털 병리 적극 도입해야”

입력
2023.08.24 04:30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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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최후 아날로그로 남은 '병리'
디지털화, AI 적용으로 급변 예고
수가체계 만들고 관련산업 육성을

환자에게서 채취한 조직을 유리 슬라이드에 고정시킨 뒤 스캔해 얻은 이미지를 분석 중인 디지털 병리 소프트웨어 화면. 대한병리학회 제공

환자에게서 채취한 조직을 유리 슬라이드에 고정시킨 뒤 스캔해 얻은 이미지를 분석 중인 디지털 병리 소프트웨어 화면. 대한병리학회 제공

효과 좋고 부작용은 적은 면역항암제가 ‘암 치료의 미래’라 불리며 각광받고 있지만, 모든 암 환자에게 다 잘 듣는 건 아니다. 암세포에 특정 단백질이 일정 수준 이상 들어 있어야 약효가 제대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런 암세포를 가진 환자를 얼마나 잘 찾아내느냐가 면역항암치료 성공 여부를 가르는 결정적 요인인데, 숙련된 의사에게도 상당히 까다로운 과정이다.

23일 의료계와 의료기기업계에 따르면 면역항암치료제 투여 대상 환자를 ‘선별’하는 데 인공지능(AI)이 기여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환자에게서 채취한 조직을 분석해 최종 진단의 근거를 제공하는 병리학 분야가 디지털화하면서 나타난 변화다. AI가 도입된 ‘디지털 병리’가 향후 질병 진단·치료·예후 예측에 필수인 병리 진단의 패러다임을 어떻게 바꿔놓을지 주목되고 있다.

검사 불일치율 낮추고 정확도 높여

서울 서초구 서울성모병원 병리과에 설치돼 있는 유리 슬라이드 보관소. 긴 서랍 모양 틀에 줄지어 놓인 슬라이드 하나하나에 약품 처리된 인체 조직 절편이 들어 있다. 임소형 기자

서울 서초구 서울성모병원 병리과에 설치돼 있는 유리 슬라이드 보관소. 긴 서랍 모양 틀에 줄지어 놓인 슬라이드 하나하나에 약품 처리된 인체 조직 절편이 들어 있다. 임소형 기자

면역항암치료가 가능한 암 환자인지 판단하기 위해서는 병리과의 조직 검사를 거치게 된다. 먼저 환자의 암 조직을 떼서 약품 처리를 해 단단하게 만들어 세포 두께의 절반 정도로 얇게 절단한 다음, 이 절편들을 손가락만 한 유리 슬라이드에 올려 염색한다. 병리과 의사는 이렇게 만든 슬라이드 여러 장을 현미경으로 관찰하며 전체 암세포 중 특정 단백질을 가진 세포의 비율을 계산해야 한다. 세포를 하나하나 세는 일이라 오래 걸린다. 세포가 너무 많거나 불명확하게 보이면 어림잡은 개수나 경험치로 판단할 수밖에 없어 의사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경우도 생긴다.

하지만 디지털 병리 시스템이 있으면 슬라이드를 스캔해 이미지 파일로 변환한 다음 소프트웨어를 돌려 정확한 비율을 몇 분 만에 도출해낼 수 있다. 이미지에서 조직 색깔이나 세포 모양 등을 읽어내는 AI 알고리즘으로 분석 속도뿐 아니라 정확도와 신뢰도까지 높이는 것이다. 면역항암치료 대상 환자를 이렇게 선별하면 치료 성공률이 올라가는 것은 물론 건강보험 재정 안정에도 기여할 수 있다. 면역항암제는 대부분 매우 비싸다. 해당 소프트웨어를 개발한 한국로슈진단 관계자는 “국내 허가를 받았고 올 하반기 의료 현장에서 직접 활용되기 시작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디지털 병리가 적용될 곳은 이 외에도 많다. 가령 미세하게 전이된 암세포까지 놓치지 않고 찾아낼 수 있다. 조직 내 일부분의 면적을 재거나 특정 세포가 조직 내에 얼마나 분포하는지 등도 슬라이드를 디지털 이미지화하고 AI를 활용하면 더 쉽고 정확하게 파악이 가능하다.

수가 못 받으니 변화 제자리걸음

정찬권 서울성모병원 병리과 교수가 유리 슬라이드를 이미지화하는 데 쓰는 디지털 병리 스캐너를 가리키고 있다. 임소형 기자

정찬권 서울성모병원 병리과 교수가 유리 슬라이드를 이미지화하는 데 쓰는 디지털 병리 스캐너를 가리키고 있다. 임소형 기자

문제는 디지털 병리 대부분이 새로운 ‘의료행위’로 인정받지 못해 수가(의료기관이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고 건강보험공단과 환자에게서 받는 비용)가 책정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지금은 세포 수를 ‘세는’ 소프트웨어를 이용하는 것만 기존 수가 체계의 유사 항목(계측병리)으로 인정받아 수가가 발생한다. 조직 내 병변의 면적을 재거나 특정 세포의 분포를 파악하는 소프트웨어 등 다른 대다수 디지털 병리 기술은 검사에 도움이 돼도 수가를 받지 못한다.

그러니 병원으로선 디지털 병리에 소극적이 된다. 수익이 안 날 게 뻔한데 수억~수십억 원이 드는 첨단 시스템 구축에 속도를 낼 이유가 없다. 더구나 병리 진단 과정을 디지털화하더라도 환자 조직을 유리 슬라이드로 제작하는 작업은 그대로 해야 하니 당장 눈에 띄게 줄어드는 비용도 별로 없다. 결국 병리는 의료 분야에서 ‘디지털의 오지’로 불리며 마지막까지 아날로그로 남았고, 이는 환자들의 불편으로 이어지고 있다. 대한병리학회에 따르면 연간 10만 명에 이르는 환자들이 병리 슬라이드를 직접 들고 이 병원 저 병원을 오간다.

중소 병원엔 여전히 ‘그림의 떡’

서울 서초구 서울성모병원 의료진이 디지털 병리 시스템을 이용해 환자 조직 데이터를 살펴보고 있다. 임소형 기자

서울 서초구 서울성모병원 의료진이 디지털 병리 시스템을 이용해 환자 조직 데이터를 살펴보고 있다. 임소형 기자

검사 건수가 급증함에 따라 현미경으로 판독할 때보다 더 다양하고 정확한 분석이 가능한 디지털 병리의 흐름을 거스르긴 어렵다는 게 의료계의 중론이다. 최근 4, 5년 사이 디지털 병리 투자가 늘고는 있지만 자금력과 인력이 있는 대형·신설 병원 중심이고, 병원 10곳 중 6곳은 여전히 시도조차 못하는 것으로 병리학회는 파악했다.

전문가들은 새로운 수가 체계를 만들면서 디지털 병리 전환 지원을 논의해야 할 때라고 입을 모은다. 4년 전 디지털 병리를 도입한 서울의 한 상급종합병원에는 연간 600테라바이트에 가까운 데이터가 쌓이고 있다. 병리 데이터 유지·관리를 개별 병원에만 맡겨두지 말고 공동 서버를 두거나 클라우드를 활용하자는 의견도 나온다.

정찬권(서울성모병원 병리과 교수) 병리학회 디지털병리연구회 대표는 “디지털 병리가 확대되면 의료 서비스 향상은 물론 병리과 의사 부족 해소에 도움이 되고, 의료 데이터나 AI 산업체도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며 “데이터와 AI를 활용하는 진단에 맞는 새로운 의료수가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임소형 과학전문기자 precar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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