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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 환자는 가두고 통제해야 안전하다"에 반기 든 노르웨이 마을

입력
2023.08.12 04:30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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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별의 별의별 유럽]
⑪ 노르웨이 베룸: 치매 친화적 마을

편집자주

인류와 지구를 위해 새로운 시도를 하는 유럽의 마을과 도시를 탐험하는 기획을 신은별 베를린 특파원이 한 달에 한 편씩 연재합니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2019년 기준 전 세계 치매 인구는 5,500만 명. 2030년에는 7,800만 명, 2050년에는 1억3,900만 명으로 늘 것이라고 전망한다. 노르웨이 소도시 베룸시는 치매 환자에게 친화적인 마을, '카르페 디엠'을 2020년 열었다. 게티이미지뱅크

어느 날 당신이 치매에 걸린다면? 기억력, 인지력, 판단력, 실행력, 언어능력이 전부 떨어져 혼자서는 일상 생활이 어려워진다면?

요양원, 요양병원 같은 시설로 들어가는 선택지가 있다. 시설마다 차이가 있지만, 출입문이 굳게 닫힌 건물 안에 갇혀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엄격한 규칙에 맞춰 살아야 한다. 복지 선진국 시설의 풍경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게 살아도 행복할까? 그런 삶을 원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노르웨이 소도시 베룸시의 판단은 "아니오"였다. 치매 환자도 신체적·정신적 속박을 받지 않을 자유가 있고, 또 그럴 능력이 있다는 게 베룸시의 결론이었다. 베룸시는 그래서 '치매 환자 친화적 시설' 하나를 통째로 지었다. 2020년 문을 연 시설의 이름은 '카르페 디엠'. 라틴어로 '현재를 즐기라'는 뜻이다.

카르페 디엠으로 이주한 치매 환자들은 현재를 즐기고 있을까. 한국일보가 현지에서 확인했다.

노르웨이 베룸시가 1만8,000㎡(약 5,445평)의 넓은 부지에 조성한 카르페 디엠. 건물 안에서 치매 환자를 생활하도록 하는 기존 치매 환자 전용 시설과 달리, 마치 성벽처럼 모여 있는 건물과 건물들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고, 건물 사이사이로 정원, 텃밭 등을 조성해둬 환자들이 답답함을 느끼지 않도록 설계한 것이 특징이다. 베룸시가 건축 사무소인 HENT와 함께 조성했다. HENT 제공


커다란 광장 품은 치매마을… "웰컴 투 카르페 디엠"

베룸시는 수도 오슬로에서 차로 20여 ㎞쯤 떨어져 있는 인구 약 12만8,000명(2021년 기준)의 작은 도시다. 수도에서 멀지 않고 한적해 치매 환자 전용 시설 등 요양 시설이 많이 들어서 있다. 카르페 디엠도 그중 하나다.

희고 커다란 건물 한 채가 전부인 대부분의 다른 요양 시설과 달리, 카르페 디엠은 여러 채의 건물이 1만8,000㎡(약 5,445평)의 부지를 성벽처럼 두르고 있다. 그래서 시설이 아니라 작은 마을처럼 보인다. '이동할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공간을 넓게 조성한 것이다.

마을은 크게 세 구역으로 구분돼 있다. ①하나는 상업지구다. 출입문이 달린 '디귿'(ㄷ)자 모양의 대형 건물 안에 병원, 슈퍼마켓, 헬스장, 미용실, 식당, 카페, 술집, 미용실, 피부관리실, 스파 등이 들어서 있다. 그림 그리기, 악기 연주 등을 위한 취미실, 각종 공구를 사용할 수 있는 작업실 등도 있다.

노르웨이 베룸에 있는 카르페 디엠. 각종 편의 시설이 모여 있는 디귿(ㄷ)자 모양의 건물 앞으로는 광장을 조성해 환자들이 마을 안에만 머물러도 답답하지 않도록 설계한 것이 특징이다. 베룸시 제공

②상업지구 바로 앞에는 널찍한 야외 광장이 펼쳐진다. 지난달 19일 이곳을 찾았을 땐 음악 소리가 잔잔하게 흐르는 광장에서 환자와 가족들이 점심 메뉴로 나온 바비큐를 즐기고 있었다. 카르페 디엠은 상업지구와 광장을 '시내'라고 부른다.

③상업지구와 광장을 지나면 2층짜리 집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주거지구가 나타난다. 카르페 디엠 거주자는 158명인데, 한 건물에 8~11명씩 모여 산다. 방과 화장실 모두 1인용으로 배정된다. 주거지구 주변엔 스트레칭 기구가 있는 공원과 작은 연못 등이 조성돼 있다.

"'가두는 공간' 아닌 '일상의 공간'으로"... 건강 증진 효과도

카르페 디엠은 입주민들이 치매에 걸리기 전 누렸던 '일상'을 계속 누리도록 하는 데 중점을 둔다. 신체를 자유롭게 움직이고 취향에 따라 활동하는 것이 치매 환자의 신체적·정신적 쇠약을 막고 치매 증세 악화를 늦추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세계보건기구(WHO)도 "신체를 활발하게 움직이고 뇌를 자극하고 일상적인 기능을 유지하는 것이 치매 환자에게 좋다"고 권한다.

지난달 19일 카르페 디엠에서 상업 지구와 광장 너머 주거 지구로 향하는 거리에서 촬영한 영상. 실외에는 정원, 텃밭, 연못 등이 균형 있게 마련돼 있다. 베룸(노르웨이)=신은별 특파원

베룸시는 입주자들이 '평범한 일상'을 이어갈 수 있도록 카르페 디엠을 '시설'이 아닌 '마을'처럼 조성했다. △주거용 건물들은 모양, 색깔을 통일하지 않아서 '진짜 마을'처럼 보이도록 했다. △마당 가꾸기가 취미인 노르웨이인이 많다는 점을 고려해 식물을 키울 수 있는 공간도 마련했다. △음식은 노르웨이인들 입맛에 익숙하도록 개발한 가정식 조리법대로 낸다. △카르페 디엠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350명 정도인데, 대부분 유니폼이 아닌 일상복을 입고 근무한다. △근로자용 업무 지침도 절대 벽에 붙이거나 공개된 장소에 두지 않는다. △치매 환자들을 '환자'가 아닌 '입주민'으로 부른다.

운영 방침도 여느 치매 환자 시설과 다르다. 입주자들에게 "규칙을 따르라"고 요구하지 않는 게 대표적이다. 카르페 디엠 관계자는 "'오전 8시에 아침식사, 12시엔 점심식사' 등 시설이 정한 일정에 억지로 끼워 맞추는 건 일상과 거리가 멀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 스트레스를 준다"며 "치매 환자들도 자신의 삶을 설계할 능력이 충분하다"고 말했다.

카르페 디엠이 마련해 공유하는 주간 프로그램. 음악, 체조, 영화 등 다양한 활동을 치매 환자들이 즐길 수 있다. 그러나 카르페 디엠은 환자들에게 관련 프로그램에 참가할 것을 권유하지 않는다. 환자 스스로 원하는 것을 선택해 참여한다. 카르페 디엠 측은 "환자들 자율성을 존중하는 게 치매 증상 악화를 막는 데 좋다"고 했다. 카르페 디엠 페이스북 캡처

카르페 디엠에서 만난 입주자들은 실제로 저마다의 스케줄대로 자유롭게 생활하고 있었다. A씨는 미용실에서 머리를 자른 뒤 미용사와 담소를 나누고 있었고, B씨는 헬스장에서 스트레칭 수업에 참여하고 있었다. 실을 이용해 카펫을 짜는 재미에 푹 빠진 C씨는 오전 내내 카펫을 만들다 잠시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다. 베개를 들고 돌아다니며 자는 게 버릇인 D씨는 실내 소파에 누워 있다가 실외 벤치로 나가기를 반복했다.

'치매 환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스스로 하도록 둔다'는 것도 중요한 원칙이다. 이 또한 치매 환자의 신체적·정신적 활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식사와 간식이 충분히 제공되지만 굳이 슈퍼마켓을 설치해두고, 의사가 개별 방문해 진료를 볼 수 있음에도 입주민이 직접 병원에 들러 접수한 뒤 진료를 받게 하는 이유다. 카르페 디엠 총괄 책임자 안네 그레테 노르만은 "'치매 환자는 무조건 도와줘야 한다'고 인식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신입 직원 교육에서도 '왜 그게 좋지 않은가'를 설명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고 말했다.

카르페 디엠의 내부 시설들.(맨 위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작업실, 취미실, 영화감상실, 슈퍼마켓, 스파실, 바 등 많은 편의 시설이 카르페 디엠 안에 마련돼 있다. 베룸(노르웨이)=신은별 특파원

치매 환자들에게 자율성을 주는 건, 가족들의 돌봄 노동 부담 경감으로 이어진다고 카르페 디엠은 설명한다. 노르만은 "치매는 증상이 계속 심해지는 게 일반적이라 시간이 지날수록 환자 가족의 부담도 그에 비례해 커질 수밖에 없는데, '환자를 가둔다'는 죄책감 등 때문에 시설을 택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며 "카르페 디엠에선 치매 환자들이 집에서처럼 생활하는 동시에 안전도 보장받을 수 있어 가족들도 이곳을 선호한다"고 말했다. 카르페 디엠은 입소 대기자가 70, 80명대일 정도로 인기가 좋다.

치매에 걸린 입주민 158명을 통제하지 않으면 관리가 어렵지 않을까. 카르페 디엠 측은 "결코 그렇지 않다"고 했다. 노르만은 "통제가 잘 되지 않는 환자를 통제하는 과정에서 요양 근로자들이 받는 스트레스가 상당한데, 그것만 없어도 요양 서비스의 질은 크게 향상된다"고 말했다. 다른 시설과 비교했을 때 더 많은 노동 인력이 필요한 것도 아니라고 한다. 노르만은 "8~11인당 관리자 2명만 배정해도 충분하다"고 했다.

이 같은 모습은 치매 연구기관들이 이상적이라고 꼽는 시설 형태와 일치한다. 국제알츠하이머협회(ADI)는 2021년 발표한 '치매 환자를 위한 디자인 존엄성 선언'에서 △자극을 줄이고 △움직임을 촉진하고 △치매 환자의 선택을 존중하도록 시설을 설계하라고 조언했다.

"치매 환자끼리 격리? 아니다" '이웃과의 공존' 추구

카르페 디엠은 시설 바깥의 이웃들과도 충분히 교류하는 기회를 주고자 한다. '공동체 생활 유지' 또한 WHO가 치매 환자들에게 권하는 것 중 하나다. 치매 환자들의 안전을 고려해 외출을 제한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가능할까. 노르만은 "지역 주민들이 카르페 디엠 안에서 놀고 쉬도록 하면 된다"고 했다.

카르페 디엠 전경. 광장은 물론, 내부 시설들은 마을 주민 등이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다. 이는 치매 환자들로부터 이웃과 교류할 기회를 차단하지 않기 위함이다. 베룸(노르웨이)=신은별 특파원

카르페 디엠 내 카페와 술집 등 모든 시설은 지역 주민 누구나 이용할 수 있다. 카르페 디엠 바로 옆에 위치한 유치원의 원생 100여 명은 광장을 자주 찾는 '단골 손님'이라고 한다. 지역 주민들은 시설을 이용하는 대신 봉사활동을 하기도 한다. 가령 대형 집회장은 대여료가 3,000크로네(약 38만7,840원)인데, 시간당 300크로네(약 3만8,784원)에 해당하는 봉사활동을 하면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봉사활동이라고는 하지만, 춤을 잘 추는 사람은 입주민과 함께 춤을 추고, 축구를 잘하는 사람은 함께 축구를 하는 식이라 큰 부담을 느끼지 않는다.

방문객만으로도 카르페 디엠은 늘 북적거린다. 공간도 넓고 편의 시설도 많아 지루하지 않으니 가족, 친구 등의 방문 빈도가 자연스럽게 늘 수밖에 없다는 게 카르페 디엠 측 설명이다.

카르페 디엠은 지향한다... '치매 환자' 아닌 '사람'을

베룸시는 카르페 디엠 조성에 앞서 치매 환자, 가족, 간병인 등을 두루 인터뷰해 '치매 환자가 무엇을 원하는가'를 직접 파악했다. 외부 공간에 관상용 정원만 설치하려다가 계획을 바꿔 작은 텃밭을 따로 꾸린 것 역시 "치매에 걸렸더라도 적당한 소일거리가 필요하다"는 조언을 듣고서였다.

카르페 디엠 내부에 (왼쪽부터) 치매 환자들이 직접 가꿀 수 있는 정원, 닭을 키울 수 있는 공간이 조성돼 있다. 베룸(노르웨이)=신은별 특파원

이러한 과정을 거쳐 카르페 디엠은 '7대 운영 철학'을 정했다. ①치매 환자는 스스로 결정하고 ②자신의 삶을 돌보기를 원한다. ③실내·외 구애를 받지 않고 활동할 수 있어야 한다. ④집은 살기 좋아야 하고 ⑤아늑한 환경에서 좋은 음식을 먹어야 한다. ⑥치매 환자들에게 야간 경비는 더욱 중요하다. ⑦공동체 생활은 중요하지만 개인 시간도 중요하다.

노르만은 "치매 환자를 위해 만들었지만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철학 같지 않느냐"고 물었다. 한국의 치매 환자는 84만 명(2020년 기준). 치매가 결코 '나와 상관없는 누군가의 일'이 아닌 한국에 던지는 질문은 아닐까.

베룸(노르웨이)= 신은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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