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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으로 듣는 셰익스피어

입력
2023.05.25 20:00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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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은아
조은아피아니스트ㆍ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 스틸 컷.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 스틸 컷.

작곡가가 소설에 흠뻑 빠지면 어떤 음악이 나오게 될까. 러시아 낭만 음악의 거장인 차이콥스키(Pyotr Il’ich Tchaikovsky)는 문학을 사랑한 작곡가였다. 특히 셰익스피어를 탐독했는데 단순한 독서로만 그치지 않고 구구절절한 이야기를 음표로 번역해 새로운 예술 체험으로 확장시켰다. 차이콥스키가 몰두한 소설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유명한 연애담이라 할 '로미오와 줄리엣'이었다. "이 비극을 음악으로 재창조하는 것은 나에게 운명과도 같았다"고 토로하며 환상 서곡(Fantasy Overture)이란 독특한 형식으로 음악과 문학의 만남을 이뤄냈다.

예술작품을 감상할 때 자신의 처지를 투영한 감정이입이 일어나면 몰입의 에너지가 거세지기 마련이다. 차이콥스키가 그랬다. 로미오와 줄리엣에 유독 사로잡혔던 이유는 스스로 비극적 사랑에 고통받았기 때문이다. 29세였던 차이콥스키는 자신이 가르치던 제자의 사촌이자 모스크바 음악원의 학생이었던 에두아르드 자크(Eduard Zak)와 사랑에 빠진다. 에두아르드는 15세밖에 되지 않은 미성년인 데다 소녀가 아니라 소년이었다. 제자뻘의 소년에 매혹된 사랑, 이른바 미성년과의 동성애는 모스크바 음악계에 일대 파문을 일으켰다. 차이콥스키는 예술적 성취와 상관없는 도덕적 질타를 견뎌야 했고, 에두아르드는 4년 뒤 스스로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훗날 차이콥스키는 소년과의 비극적 사랑을 이렇게 회상한다. "그의 목소리와 표정, 특유의 움직임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내 인생에서 그 누구도 에두아르드만큼 강렬하게 사랑한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차이콥스키의 환상적 서곡 '로미오와 줄리엣'은 셰익스피어의 문학성과 작곡가의 자전적 비극이 동시에 투영된 독특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 곡은 셰익스피어의 문학작품에 기반하고 있지만 시간 순서대로 줄거리를 따라가진 않는다. 어디까지나 이 작품의 주인공은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등장인물이 아니라 갈등과 사랑을 의미하는 차이콥스키의 선율들이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멜로디가 주도하는 음악 드라마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긴 서주를 지나 본격적인 이야기에 돌입할 때, 청중들은 소나타 형식의 첫 번째 주인공인 제1주제를 만나게 된다. 차이콥스키는 이렇게 중요한 순간에 몬터규와 캐풀렛 가문의 피비린내 나는 결투의 장면을 배치했다. 여러 악기가 같은 모양의 선율을 토해내는 유니즌(Unison) 기법을 활용하는데, 이 이구동성의 선율은 약박에 긴 음표를 배치한 당김음으로 독특하고 강렬한 리듬감을 선사한다. 차이콥스키는 결투의 주제에 여러 옷을 갈아입혀 다양하게 변형시켰다. 그중에서도 가장 극적인 순간은 다성음악처럼 전개되는 푸가(Fuge) 구간이다. 결투 주제가 선창해 앞서 나서면 대주제가 응답하며 격렬히 따라붙는다. 몬터규와 캐풀렛 가문이 치고받고 다투는 모습처럼 두 주제 사이 화해와 타협 따위는 용납되지 않는다.

자, 이제 음악적 드라마의 두 번째 주인공인 소나타 형식의 제2주제가 등장할 순간이다. 갈등과 폭력이 난무했던 앞선 주제와 달리 로미오와 줄리엣의 애틋하면서도 황홀한 '사랑의 테마'가 울려 퍼진다. 러시아 음악의 또 다른 거장 림스키 코르사코프가 "클래식 음악 역사 중 가장 아름다운 선율"이라 찬탄할 정도로 한 번 들으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미묘한 힘을 지녔다. 선율 자체가 유려하기도 하지만 '잉글리시호른'이란 목관악기를 선택한 덕분인데, 작곡가들이 그리움과 애틋함을 표현할 때 선호하는 악기 중 하나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은 결국 죽음으로 완성된다. 첼로가 단말마 같은 절규를 처절하게 토해내자 팀파니의 타격이 지축을 흔들며 생과 사를 가른다. 장송 행진곡이 무겁게 흐르고 '사랑의 테마'가 흐느끼듯 동행한다. "이 비극을 음악으로 재창조하는 것은 나에게 운명과도 같았다"던 차이콥스키의 절절한 독백이 울리는 듯하다. 이처럼 음악으로 듣는 로미오와 줄리엣은 셰익스피어의 문학성과 작곡가의 자전적 비극이 동시에 투영되어 작곡된 지 15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청중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다.

조은아 피아니스트·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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