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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율적 유연성'이 미래 '좋은 노동'의 핵심이다

입력
2023.05.29 04:30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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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오래전부터 우리사회 최대 숙제였지만, 이해관계 집단의 대치와 일부의 기득권 유지 행태로 지연과 미봉을 반복했던 노동·연금·교육개혁. 지속가능한 대한민국과 미래세대를 위해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3대 개혁>에 대한 진단과 해법을 모색한다.

노동개혁: <6> 미래지향적 노동법제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종속노동 벗어나는 미래 노동
다원적 노동시장 변화 불가피
경직된 노동법 유연성 갖춰야

'좋은 노동'(Gute Arbeit). 4차 산업혁명으로 온 세상이 떠들썩하던 2016년 10월의 일이다. 독일은 노동4.0 백서를 발간하면서, 미래 노동의 지향점을 그렇게 표현했다. 도대체 '좋은 노동'이란 무엇인가. 한때 아동과 모성에 대한 노동착취의 금지조차도 노동의 미래요, 좋은 노동으로 여겨졌던 때가 있었다. 산업혁명 초기의 일이다. 그 후 '좋은 노동'으로의 진화는 수세기에 걸쳐 계속되어왔다. 근로시간의 총량은 줄었고 안전보건에 관한 기준은 정교해졌다. 인종과 성은 물론이고 연령에 따른 차별까지 금지하고, 직장 내 괴롭힘도 노동법제 안으로 포섭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시점에서 새삼스레 노동의 미래를 이야기하는 이유는 진화의 차원을 넘어서는 패러다임적 변화가 예상되기 때문이다. 과거 근로자는 '동일한 시간'에 '동일한 장소'에 모여서 '사용자가 시키는 일'을 해야 했다. 근로자로서는 상당히 가혹한 일이었지만, 대공장체제하에서 어쩔 도리가 없었던 측면이 있었다. 노동법제는 바로 그 종속노동의 틀 안에서 고안된 규범이다. 초연결사회로의 전환은 종속노동의 해체를 예고하고 있다. 원하는 장소에서 원하는 시간에 일하는 자영적 근로자(Selbststaedige Arbeitsnehmer)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는 셈이다. 적어도 '물리적' 공간과 시간에 관한 한 종속적 지배의 강도는 약해지고, 범위도 좁아지고 있다. 실제로 독일 노동4.0 백서는, 바닷가에서 노트북으로 업무를 하는 '사무직' 근로자, 작업스케줄을 스스로 수립하는 '생산직' 근로자의 모습을 노동의 미래로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다. 당장은 '꿈 같은 얘기'처럼 들릴 수도 있다. 적어도 노동법의 획일성과 경직성이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그래픽=강준구 기자

그래픽=강준구 기자

먼저 노동공급시장의 구조적 변화에 주목해야 한다. 지금껏 노동법은 구직자가 넘쳐나는 노동시장을 염두에 두고 구축된 것이었다. 대표적인 예가 정년제도다. 지금 이대로라면 저출생·고령화의 위기는 가장 먼저 노동시장에 직격탄이 될 게 분명하다. 연령에 상관없이 일할 의사만 있다면, 경력과 전문성 그리고 신체적 역량에 맞는 일자리가 제공될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한다. 그저 생계지원 차원에서 일자리를 위한 일자리였던 노인일자리 정책은 지속가능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미래지향적이지도 않다. 고령자가 스스로 자존감을 느낄 수 있는 일자리를 만들어 주는 것이 중요하다. 미래의 좋은 노동은, 연령으로부터 자유로운 노동이어야 한다.

그래픽=강준구 기자

그래픽=강준구 기자

둘째, 노동시장 외부 환경의 구조적 변화에도 주목해야 한다. 단순히 사용자와의 관계만이 아니라, 경기변동 등 외부 상황에 따라 근로조건이 달리 결정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미래의 노동법은 유연성은 수용하되, 안전성은 높이는 방식으로 개편되어야 한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근로시간법제도 마찬가지다. 제조업 강국인 독일은 근로시간의 감축을 이어 왔다. 급기야 2018년 독일 금속노조는 단체협약으로 주 28시간제까지 선택할 수 있도록 했다. 정작 근로시간 '총량' 감축이 '유연성'의 강화와 연계되었다는 사실은 놓치고 있다. 독일은, 적시생산시스템을 통해 재고가 쌓이면 근로시간을 줄여 재고를 소진시키고, 다시 일감이 늘어나면 연장근로를 통해 수요에 대응할 수만 있다면 근로시간의 총량이 줄더라도 경쟁력은 유지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다만 근로시간의 유연성을 높인다는 것은 곧 시간 관리만큼은 더 엄격해야 한다는 뜻이다. 독일은 근로시간계좌제를 두고, 마치 은행 통장에 입출금 내역이 찍히듯이 개별 근로자마다 플러스 또는 마이너스 근로시간을 모두 꼼꼼하게 기록해 두도록 했다. 같은 맥락에서 유럽은 퇴근 이후 연결되지 않을 권리에 관한 합리적 대안 모색도 서두르고 있다. '공짜노동' 문제에 갇혀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과 사뭇 대비된다.

그래픽=강준구 기자

그래픽=강준구 기자

마지막으로 다원적 노동시장으로의 구조적 변화도 대비해야 한다. 우리 노동시장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뒤섞여 있다. IT산업과 서비스업 그리고 제조업 등 다양한 산업분야가 존재할 뿐만 아니라, 구직자가 넘쳐나는 대기업도 있지만, 인력난에 시달리는 중소기업도 존재한다. 각자의 일터에서 노사가 일하는 방식도 다르고, 그들이 호소하는 고충도 저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규범으로서 노동법의 선한 목적과 기능을 제대로 구현하기 위해서라도 모든 산업, 모든 근로자를 하나의 획일적인 노동규범체계로 포섭할 생각은 말아야 한다. 근로자 다수가 무조건 전체 근로자를 대변하는 시스템도 곤란하다. 직무와 책임, 업무의 난이도와 일하는 방식이 다르다면, 근로장소와 시간에 관한 선호도 다르기 마련이다. 소수 근로자의 다양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노동법제도를 구축해야 한다. 미래 노동의 경쟁력은 근로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창의적 역량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코로나19 위기국면에서 얼떨결에 우리는 미래 노동을 살짝 경험한 바가 있었다. 생소했지만, 흥미로웠고, '실험' 같았지만, 엄연한 '현실'이었다. 인공지능의 놀라운 역량에 탄복하면서, 한편 두렵기도 했다. 그렇게 노동의 미래는 순식간에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 과거의 '좋은 노동'에 언제까지고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 미래 노동의 핵심키워드는 다가올 구조적 변화에 대응할 '자율적 유연성'이어야 하고, 미래 노동법제는 그걸 담는 그릇이어야 한다. 지금 우리는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가.

글 싣는 순서-노동개혁

<1> 왜 노동개혁인가? (정승국)
<2> 근로시간제 개선 (김기선)
<3> 임금체계 개선 (정승국)
<4> 격차해소 위한 제도개선-1 (권혁)
<5> 격차해소 위한 제도개선-2 (정승국)
<6> 미래지향적 노동법제 (권혁)
<7> 자율·책임 노사관계 (박지순)
<8> 노동시장 활력 정책 (고혜원)
<9> 노사법치주의 강화 (권혁)


권혁 부산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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