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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수 59명 판결문 보니 "맹수보다 위험한 범죄자, 영구 격리해야"

입력
2023.06.05 10:00
수정
2023.06.08 17:41
3면
0 0

<상> 죄와 벌, 그리고 59명의 사형수
가정 폭력·생활고 등 사회경제적 요인 불구
42명 전과·36명 추가 범행 "최고형 불가피"
범죄 은폐하려 죽이고 출소 1년 내 범행도
"감형과 가석방이란 어리석음 되풀이 안돼"
"인명 경시·황금만능 풍조에 경종" 메시지

편집자주

26년간 사형이 집행되지 않으면서, 한국은 실질적 사형 폐지 국가로 분류됐다. 그러나 사형수 59명은 여전히 수감 생활 중이다. 헌법재판소는 사형제에 대해 두 차례 합헌 결정을 내린 뒤, 이르면 올해 세 번째 판단을 내놓을 예정이다. 한국일보는 헌재 결정을 앞두고 사형제를 둘러싼 양자택일의 소모적 공방을 지양하고 더 나은 길이 무엇인지 고민해봤다.


2009년 2월 경기 화성 비봉면 삼화리 야산에서 진행된 경기 서남부 살인사건 피의자 강호순의 박모 여인 암매장 현장검증에서 유가족들과 함께 온 일행이 오열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2009년 2월 경기 화성 비봉면 삼화리 야산에서 진행된 경기 서남부 살인사건 피의자 강호순의 박모 여인 암매장 현장검증에서 유가족들과 함께 온 일행이 오열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생존 사형수 59명에 이름을 올린 정상진(45·살해 당시 30세)의 학창 시절은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다. 경제적으로 넉넉지 않은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가족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학교에선 초·중·고 내내 '왕따'를 당했고, 교사에게 맞은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중학생 시절에는 두 번이나 극단적 선택을 시도하기도 했다.

애써 살아보려고도 했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일반판금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해 제조업체에 입사했다. IMF 사태로 일자리를 잃은 뒤에는 식당 종업원으로 일했다. 하지만 그는 고달픈 인생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성인이 돼서도 극단적 선택을 수차례 시도할 만큼, 생에 대한 의지는 점점 사라져갔다.

정상진은 극단적 방식으로 분노를 표출했다. 2008년 10월 20일 오전 8시였다. "이젠 막다른 길이다. 사람들을 죽이고 인질극을 벌이다 경찰 총에 맞아죽겠다"는 생각으로 거주하던 고시원에 불을 질렀다. 활활 타오르는 불만큼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다. 급하게 뛰쳐나오던 이웃 5명을 흉기로 찔러 살해했다. 한 명은 대피 과정에서 추락사했고, 6명은 크게 다쳤다.

정상진은 현장에서 체포됐다. 법원은 그에게 사형을 선고하며 이렇게 말했다. "부모나 형제로부터 방치됐고 학교·사회생활에서도 따뜻한 보살핌을 받지 못한 건 맞지만, 범죄에 대한 응보와 책임의 정도를 볼 때 사형에 처할 수밖에 없다."

불우한 성장환경과 경제적 어려움

그래픽=송정근 기자.

그래픽=송정근 기자.

불우한 성장 환경이 범죄의 단초가 된 건 정상진뿐이 아니었다. 한국일보는 올해 3월을 기준으로 사형이 집행되지 않은 생존 사형수 59명의 판결문 150여 건 등을 집중 분석했다.

판결문 속 사형수 가운데 최소 26명은 학창시절에 불행했다. 법원은 이들의 가정 내 불화를 일일이 판결문에 남겼다. "결손 가정에서 자라 청소년 시절부터 범죄에 물들었다"(정근호), "아버지가 어머니를 심하게 구타하는 습벽을 목격했다"(노경락) 등 불안했던 자아형성 과정이 사형수들의 삶에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 가족의 보살핌을 받지 못한 채로 청소년 시절부터 전과를 쌓은 사형수들도 적지 않았다.

사형수들은 '흙수저의 대물림'도 겪었다. 32명(대학생 포함)이 살해 당시 무직자였고, 직장이 있더라도 일용직 근로자와 식당 종업원 등 대체로 저소득 직종이었다. 절대적으로 또는 상대적으로 부족했던 '돈'은 살인의 이유가 됐다.

사형 선고 범죄 40건은 살인 전후 금품 관련 범죄와 관련이 있었다. 타인 또는 세상에 대한 보복 살인(33건)이나 성욕(18건)보다 많았다. 금품이 살인의 주된 이유가 된 사건도 30건에 달했다. 이 중 19건은 강도살인이었고, 11건은 보험사기와 유괴 등을 통한 금품 갈취였다. 사형을 오랫동안 연구해온 김상균 백석대 경찰학부 교수는 "범죄를 사회경제적 요인과 떨어뜨려놓고 생각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래픽=송정근 기자

그래픽=송정근 기자


그래픽=송정근 기자

그래픽=송정근 기자


법원 "사정 이해하지만 사형시켜야"

연쇄 살인 용의자 정두영이 2000년 4월 부산 서구 서대신동에서 실시된 현장검증에서 범행을 재현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연쇄 살인 용의자 정두영이 2000년 4월 부산 서구 서대신동에서 실시된 현장검증에서 범행을 재현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법원은 가해자들의 여러 사정을 언급하면서도 "사형을 내리는 게 불가피하다"고 못 박았다. "경제적 어려움을 타개하려 했다"는 주장에는 "통상의 근로노력도 보이지 않은 채 손쉽게 금품을 강취하려 해 극히 비열하다"고 판단했다. "약간의 돈을 얻기 위해서 인간관계의 신뢰와 사랑이 얼마든지 희생될 수 있다는 지극히 물질중심적 사고에 경도돼 있다"고 질책하기도 했다. 성폭력 살인에는 "성적 욕구를 충족하려는 일념으로 지극히 반사회적"이라고 꾸짖었고, 보복 살인은 "건전한 일반인 상식으로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고 했다.

법원은 범죄의 중대성과 잔혹성에 특히 주목했다. 우발적 살인은 단 1건도 없었으며, 사형수 59명에 의해 목숨을 잃은 피해자는 209명에 달했다. 10명 이상을 살인한 '연쇄살인범' 강호순과 유영철, 방화로 15명을 죽인 원언식을 제외하더라도, 사형수 1명이 평균 3명을 죽인 셈이다.

피살자가 2명 이하라도 범행이 끔찍하긴 마찬가지였다. 장재진(33)은 2014년 5월 여자친구 부모를 살해한 뒤 여자친구에게 사체를 보도록 했다. 성태수(63)는 1995년 4월 다방 등에 인신매매를 하기 위해 13세 여아와 11세 남아를 납치한 뒤, 남아는 살해하고 여아는 감금 후 수차례 성폭행했다. 최소 21명의 사형수는 다른 범죄를 은폐하기 위해, 또는 자신의 얼굴을 봤다는 이유 등으로 사람을 죽이기도 했다.

살인이 범행의 전부도 아니었다. 최소 36명의 사형수가 살인 전후로 폭행과 강도 등 범죄 행각을 벌였다. 1997년 대구에서 4명을 살해한 이승수(47)는 범행 전에 260만 원을 가로채고 두 살 배기 갓난아기를 죽이려고 했다. 2000년 3명을 살해한 백기문(56)은 살해 전후로 금품을 갈취했으며, 40대 여성을 강제 추행하고 폭행해 전치 2주 상해를 입혔다.

범행 은폐하려 사체유기... 금고 이상 전과도 절반

그래픽=송정근 기자

그래픽=송정근 기자

사형수들은 대부분 반성하지 않았다. 공탁 등 유족과 합의를 시도했던 사형수는 2명뿐이었다. 최소 40명의 사형수는 검거를 피하고 범행을 은폐하려고 했다. 사체를 야산 등에 유기했고, 일부는 암매장했다. 1999년 1월 강릉에서 신혼부부를 살해한 정형구(60)는 무려 6개월간 도주극을 벌였다. 일부 사형수는 "불운 때문에 검거됐다"며 피해자 탓을 했다. 2007년 여성들을 성폭행하려다 4명을 살해한 오종근(85)은 "피해자들이 옷을 제대로 입고 있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범죄가 반복되는 것도 공통점이다. 살해 당시 전과가 있었던 사형수는 42명에 달했고, 이 중 34명은 금고 이상의 형을 받았다. 이복형수와 그의 어머니를 살해한 강종갑(71)과 경제적·사회적 도움을 준 대학교수를 죽인 전용술(68)은 살인죄로 무기징역까지 선고받았다가 가석방 또는 감형돼 조기출소한 전력이 있었다.

출소일 또는 다른 범죄로 인한 확정 판결일로부터 범행까지 걸린 기간이 1년 이하인 사형수도 최소 16명이나 됐다. 법원이 "교화 가능성이 없다"며 사형을 선고했던 이유였다.

사형수 33명을 직접 만나본 김대근 형사·법무정책연구원 연구실장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불우한 가정 환경이 살인으로 가는 길목에서 매우 큰 비중을 차지했다"면서도 "그렇다고 범행 동기를 환경 탓으로 돌리는 건 굉장히 무책임하고 위험한 판단"이라고 설명했다.

"사형으로 어리석음 되풀이하지 말아야"

그래픽=송정근 기자

그래픽=송정근 기자


사형을 선고했던 재판부는 공통적으로 "악질적인 흉악범을 사회에서 영구히 격리시켜야 한다"고 밝혔다. 오직 사형만이 범죄에 상응하는 처벌이며 범죄 예방적 효과도 있다고 봤다. 특히 전용술에게 사형을 선고한 재판부는 "피고인은 지극히 반문명적 행동을 3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반복해 맹수보다도 더 위험하다"며 "세월의 망각 작용으로 죽은 자·상처 입은 자·유족의 아픔이 잊혀진 채로 감형과 가석방을 통해 피고인을 세상에 나오게 하는 어리석음을 되풀이하지 않아야 한다"고 밝혔다.

다만 사형이냐 아니냐를 가른 재판부의 고민은 악질 흉악범을 격리하는 것에만 머물지 않았다. "황금만능주의와 인명경시 풍조에 경종을 울려야 한다"는 구절이 판결문 곳곳에서 등장하는 게 이를 방증한다. 사형 선고를 내린 적이 있는 전직 판사는 "판결문에 피고인에게 유리한 이야기를 써주는 건 '내 사정을 몰라서 센 형량을 내린 거 아닌가'라고 오해할 수 있기 때문"이라며 "악성이 너무 심하고 사건 자체가 사회에 미친 파급력이 워낙 강하기 때문에 사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 다시 쓰는 사형제 리포트

<1> 죄와 벌, 그리고 59명의 사형수
<2> 사형제 폐지? 논쟁의 끝은
<3> 두 번의 합헌, 세 번째 결론은

박준규 기자
이정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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