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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나라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투하는 가죽나무

입력
2023.05.21 14:00
수정
2023.06.01 22:01
20면
0 0

1년에 1.5m씩 자라는 ‘천상의 나무’지만
다른 작물 생장 방해해 '지옥의 나무' 불리기도
귀화식물 아닌 지구상 자유로운 나무로 여겨주길

편집자주

허태임 국립백두대간수목원 연구원이 격주 월요일 풀과 나무 이야기를 씁니다. 이 땅의 사라져 가는 식물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허 연구원의 초록(草錄) 이야기를 만나 보세요.

캘리포니아 스탠퍼드 알마거리의 오래 자란 가죽나무. 열매를 달고 있는 모습이다. 가죽나무는 암꽃과 수꽃이 서로 다른 나무에서 핀다. 2018년 한여름의 풍경. Sairus Patel 제공

캘리포니아 스탠퍼드 알마거리의 오래 자란 가죽나무. 열매를 달고 있는 모습이다. 가죽나무는 암꽃과 수꽃이 서로 다른 나무에서 핀다. 2018년 한여름의 풍경. Sairus Patel 제공

소설 '브루클린에는 나무가 자란다'는 베티 스미스의 자전적 성장소설이다. 20세기 초 뉴욕 빈민가에 정착한 이민자 가정의 소녀가 소설의 주인공이다. 이 아이의 성장과 버려진 그 땅에서 초록 잎을 펼치는 한 나무의 모습이 교차하듯 펼쳐진다. 1943년 발간된 이후 지금까지도 미국 청소년들 사이에서 널리 읽히는데 국내에는 '나를 있게 한 모든 것들'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었다.

원제목에 등장하는 그 ‘나무’를 소설 도입부에서 작가는 이렇게 묘사한다. "프랜시의 마당에 있는 나무 한 그루는 소나무도 아니고 솔송나무도 아니었습니다. (···) 그것을 천국의 나무라고 불렀습니다. (···) 이 나무는 판자촌과 방치된 쓰레기 더미에서 자랐고 시멘트에서 자란 유일한 나무였습니다.” ‘천국의 나무’는 허구로 만들어 낸 나무가 아니다. 고향을 두고 미국으로 건너간 중국 원산의 ‘가죽나무’를 말하는 거다.

'브루클린에는 나무가 자란다' 1943년 원작의 표지. 이하 사진은 허태임 작가 제공

'브루클린에는 나무가 자란다' 1943년 원작의 표지. 이하 사진은 허태임 작가 제공

가죽나무는 1743년 베이징에 머물던 프랑스 예수회의 한 선교사가 그 씨앗을 파리로 보내면서 유럽 전역에 퍼지고 미국까지 건너갔다. 그 선교사는 식물수집가였다. 그는 당시 유럽에서는 미지의 영역이었던 동아시아의 옻칠 비법이 옻나무 수액에 있다는 것을 알고 나서 옻나무를 닮은 식물을 최대한 수집해서 파리로 보냈다. 그중에 가죽나무 씨앗이 있었다. 프랑스에 도착한 그 씨앗이 싹을 틔우고 차츰 자라는 사이 근방에서 활동했던 린네를 비롯한 당대 최고의 식물분류학자들은 골똘히 관찰하고 고민한다. 처음 만난 가죽나무를 두고 옻나무와 같은 혈통인지 아닌지를. 제법 시간이 흐른 1788년에야 옻나무와 별개의 혈통이라는 것을 프랑스의 식물분류학자 데퐁텐이 밝힌다.

가죽나무는 1년에 1.5m 이상씩 자라서 금세 하늘에 닿을 듯이 껑충 큰다. 18세기 유럽의 식물학자들은 이런 성장력에 감탄하며 ‘천상의 나무’라는 별칭을 붙였다. 이국적인 자태와 서둘러 우듬지를 형성하는 장점 덕분에 런던과 파리를 비롯하여 유럽 전역의 정원과 도시공원에 가죽나무를 많이 심었다. 유럽의 귀족들 사이에서 이국적인 중국풍 양식, ‘시누아즈리’가 한껏 인기를 얻던 무렵이었다.

1917년 워싱턴 광장의 가죽나무 가로수. 뉴욕공공도서관 제공

1917년 워싱턴 광장의 가죽나무 가로수. 뉴욕공공도서관 제공

가죽나무는 1784년에 필라델피아의 한 정원사에 의해 미국에 처음 도착했다. 1890년대 미국 개척민들이 너도나도 캘리포니아로 몰려가던 시기, 가죽나무는 중국인 이민자들과 함께 더 넓고 더 빠르게 미국 전역에 번진다. 이 나무는 폐가나 깨진 아스팔트와 보도블록 틈 등 가리지 않고 어디든 비집고 들어가 빠르게 성장했다. 심지어 아메리카 토착종을 밀어내는 현상까지 생겨났다. 가죽나무가 스스로 몸에서 빚은 아일란톤이라는 생화학물질이 그 주변 몇몇 작물의 생장을 억제하는 방식으로 타감작용을 일으킨 것이었다. 그래서 나무를 없애겠다고 자르는 일도 늘었다. 그러면 가죽나무는 그루터기 여기저기에서 새 가지를 내며 저항했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서둘러 유해 외래식물 목록에 가죽나무를 올리고 ‘지옥의 나무’라고 고쳐 불렀다. 어떤 이들은 가죽나무를 식물계의 바퀴벌레라고 칭하며 보이는 즉시 박멸할 것을 주문하기도 했다.

가죽나무는 유럽보다 더 먼 과거에 우리 한반도에 귀화한 나무이기도 하다. 혼자 들어온 건 아니고 외형이 닮은 참죽나무와 비슷하게 왔다. 그래서 그 둘은 좀 헷갈린다. 새순이 보드랍고 특유의 향기가 있어서 입맛을 돋우는 나물로 먹는 건 참죽나무인데 참죽나물이라고 부르지 않고 더 익숙한 가죽나무를 데려다가 가죽나물, 가죽순, 가죽취 등으로 부른다. 가죽나무는 어린 순을 나물로 먹지 않는다. 잎 뒷면 양 아래쪽에 사마귀 같은 돌기인 선점이 있는데 거기서 냄새가 좀 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가죽나무를 취춘(臭椿)이라고 하고 참죽나무를 향춘(香椿)이라고 부른다. 서양에서 배척당하는 것도 모자라서 참죽나무와 비교까지 당해서 가죽나무가 영 쓸모없는 나무처럼 인식된다는 점이 속상하긴 하다.

폐가나 폐허, 깨진 아스팔트와 보도블록 틈을 가리지 않고 어디든 비집고 들어가 빠르게 성장하는 가죽나무. GBIF(세계생물다양성기구) 제공

폐가나 폐허, 깨진 아스팔트와 보도블록 틈을 가리지 않고 어디든 비집고 들어가 빠르게 성장하는 가죽나무. GBIF(세계생물다양성기구) 제공


폐가나 폐허, 깨진 아스팔트와 보도블록 틈을 가리지 않고 어디든 비집고 들어가 빠르게 성장하는 가죽나무. GBIF(세계생물다양성기구) 제공

폐가나 폐허, 깨진 아스팔트와 보도블록 틈을 가리지 않고 어디든 비집고 들어가 빠르게 성장하는 가죽나무. GBIF(세계생물다양성기구) 제공

그럴 때면 나는 찾아간다. 막 싹을 냈거나, 1~2년 자라서 내 키를 훌쩍 넘겼거나, 아니면 하늘을 찌를 듯이 뾰족하게 높아진, 저마다 다양한 모습으로 사는 가죽나무를. 그러면 기다리고 있다. 국경도 이념도 인종도 없던 아득히 먼 과거에는 귀화식물이 아니라 그냥 지구상의 한 식물로서 자유롭게 살았을 그 나무가. 동아시아 문명에서는 기원전부터 가죽나무로 약을 만들고 세간을 꾸리고 누에를 먹이고 그늘을 구했다. 서양에서는 그 나무가 분비하는 아일란톤이 토종식물을 못살게 군다고 짚은 적 있으나 최근 한의학계에서는 인간 몸속 중성지방의 생성을 막아 체지방 감소에 기여하는 천연물질이 그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5월 21일은 문화다양성의 날이다. 뙤약볕 아래 어느 누구 하나 뜨겁지 말라는 듯이 가죽나무 녹음이 점점 더 짙어지고 넓어지고 있다.

허태임 한국수목원정원관리원 국립백두대간수목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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