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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는 '유령 아동', 동생은 '한국인'... 차별받는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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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는 '유령 아동', 동생은 '한국인'... 차별받는 아이들

입력
2023.05.22 04:00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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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적 보호 사각지대 '미등록 이주 아동'
교육권·건강권 등 기본권 보장 못 받아
학대에도 노출... "정착 위한 대책 시급"

9일 경기도의 한 아동 공동생활가정(그릅홈)에서 미등록 이주 아동 하윤(가명)이가 좋아하는 곰인형을 껴안고 있다. 그룹홈 제공

9일 경기도의 한 아동 공동생활가정(그릅홈)에서 미등록 이주 아동 하윤(가명)이가 좋아하는 곰인형을 껴안고 있다. 그룹홈 제공

“커서 예쁜 옷 만드는 디자이너가 될 거예요!”

지난달 27일 만난 하윤(7ㆍ가명)이의 눈은 꿈을 말할 때 반짝반짝 빛났다. 손톱에 바른 매니큐어가 만족스러운 듯 환한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그런 소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씁쓸한 미소를 짓는 이가 있다. 경기도의 한 아동 공동생활가정(그룹홈) 원장 A씨다. 이유가 있다. 하윤이는 ‘미등록 이주 아동’이다. 국내 체류 허가를 취득하지 못해 출생 신고도 이뤄지지 않은, ‘유령’ 같은 존재다.

외국인 200만 명 시대다. 한국도 다문화 사회에 접어들면서 숱한 그늘이 생겨나고 있다. 미등록 이주 아동도 그중 하나다. 한국에서 나고 자라고도 진학, 취업, 복지 등 아무런 권리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 전체 외국인의 20% 정도를 불법 체류자로 추산하는 정부 통계를 감안하면, 유령 아동 수도 적지 않은 셈이다. 어른들의 잘못으로 죄 없는 아이들이 고통받고 있다.

같은 자매도 '국적' 따라 차별

유엔아동권리협약(제2조 1항)은 ‘아동은 본인 또는 부모의 인종, 성별, 사회적 출신 등에 따라 어떤 차별도 받아선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한국도 1991년 비준했다. 현실은 다르다.

하윤이는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하지 못할 뻔했다. 취학통지서가 발급되지 않아 A씨가 문의하니 관할 지자체는 “학교장 재량”이라고 했다. 시설 입소 증명서, 출생증명서 등을 들고 학교를 찾았지만 “(미등록 아동은) 받아본 적 없다. 안 된다”는 말만 들었다. 3개월 가까운 항의 끝에 하윤이의 존재를 증명하는 ‘인우보증서’를 제출하고서야 입학이 허가됐다. 서울다문화교육지원센터 관계자는 “미등록 이주 아동이란 이유로 학교가 입학을 꺼리는 상담 사례가 많다”고 말했다.

미등록 이주 아동의 고난은 부모의 불안한 신분에서 시작된다. 하윤이도 부모가 모두 베트남 출신 불법 체류자라 출생 신고를 못했다. 엄마는 십수 년 전 취업 비자를 받아 한국에 왔지만 비자 갱신에 실패했다. 같은 처지의 남편을 만나 언니(10)와 하윤이를 낳았다. 얼마 뒤 또 다른 한국인 아빠 사이에서 막내(6)도 태어났다. 막내만 한국인이라 출생 신고가 가능했다.

하윤(가명)이는 상어 인형을 가장 좋아한다. 그룹홈 제공

하윤(가명)이는 상어 인형을 가장 좋아한다. 그룹홈 제공

교육권 제약은 차별의 극히 일부분이다. 미등록 이주 아동은 사실상 복지 혜택에서 제외돼 있다. 건강보험 가입이 안 돼 부족한 병원비는 그룹홈 원장 사비를 보태야 한다. 지자체 관계자는 “미등록 아동은 정부 지원 불가 항목이 많아 시설에 맡아 달라 부탁하기도 어렵다”고 토로했다. 휴대폰 개통 등 소소한 일상의 편리도 이들에게는 먼 나라 얘기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아동학대 등 범죄에 노출되는 경우다. 하윤이네 세 자매도 엄마의 지속적 학대에 시달렸다. 2021년 인근 아동복지시설의 신고로 엄마는 재판에 넘겨졌고, 세 자매는 2년째 그룹홈에서 생활하고 있다. 지난달에는 서울 구로구의 한 고시원에서 7세 아동이 쓰레기 더미에서 혼자 지내다 관리자에게 뒤늦게 발견됐고, 2020년엔 베트남 국적 친모에게 맞아 장기가 파열된 미등록 3세 아동이 병원 신고로 구조된 적도 있다.

국내 이주 아동 관련 법·제도의 한계. 그래픽=신동준 기자

국내 이주 아동 관련 법·제도의 한계. 그래픽=신동준 기자

보건복지부의 ‘위기아동 발굴시스템’도 미등록 이주 아동에겐 무용지물이다. ‘영유아 미건강검진’ 등 발굴지표가 전부 건강보험 납부 자료 등 자국민 정보를 기반으로 해 신고가 없는 이상 학대 유무를 알아내기가 쉽지 않다.

심지어 미등록 이주 아동이 얼마나 되는지, 공식 통계조차 없다. 법무부는 국내 체류 기간을 넘긴 만 19세 이하 아동ㆍ청소년을 4,130명(3월 기준)으로 파악하고 있다. 단 이주 뒤 체류 자격을 얻지 못했거나, 합법 체류 가정 중 자격을 취득하지 못한 아동만 집계한 수치다. 한국에서 태어나 출생 신고가 안 된 아이들이 유령으로 살 수밖에 없는 이유다.

정부 대책 이제 걸음마... "아이들은 죄가 없다"

이기일 보건복지부 1차관이 지난달 13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아동정책 추진방안을 발표하고 있다. 뉴시스

이기일 보건복지부 1차관이 지난달 13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아동정책 추진방안을 발표하고 있다. 뉴시스

세 자매가 처한 현실은 미등록 이주 아동의 암담한 미래를 그대로 대변한다. 엄마가 유죄 판결을 받으면 본국으로 추방되고, 세 자매도 베트남으로 갈 가능성이 크다. A씨는 “엄마가 다시 학대하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고, 한국말밖에 못 하는 애들이 베트남에서 어떻게 지낼지 걱정”이라며 “스스로 태어날 환경을 고른 것도 아닌데 왜 고통을 받아야 하느냐”고 안타까워했다.

정부도 대책 마련에 고심하고 있다. 지난달 국무총리 주재로 열린 ‘아동정책조정위원회’에서 모든 외국인 아동에게 출생등록번호를 부여하는 ‘외국인 아동 출생 등록제’ 추진 방침을 밝혔다. 다만 대강의 방향만 나왔을 뿐, 대책의 알맹이를 채우려면 또 얼마의 시간이 소요될지 알 수 없다.

미등록 이주 아동은 인구 감소 및 국내 유입 외국인 증가와 맞물려 사회 문제로 부상할 게 확실하다. 울산의 한 아동복지시설 관계자는 “부모가 불법 체류자인 경우를 포함해 다문화 가정 출신 보호아동이 점점 늘어 지금은 전체 15~20%에 이른다”며 “출생신고나 추가 지원책을 당장 시행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석원정 이주인권활동가는 “한국인 정체성을 가진 (미등록 이주) 아동의 정착을 돕는 건 아이에게도, 인구 감소 위기를 겪는 한국에도 도움이 된다”고 진단했다.

장수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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