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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자 차별보다 질겼던 남녀 차별... '장남 제사 주재' 15년 만에 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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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자 차별보다 질겼던 남녀 차별... '장남 제사 주재' 15년 만에 깨졌다

입력
2023.05.11 19:05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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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외자 모친이 유해 봉안하자 유족들 소송 제기
"적서 불문하고 장남 혹은 장손이 제사 주재자"
2008년 전원합의체 판결 따라 1,2심 모두 기각
대법은 "성차별... 남녀 불문 연장자가 주재자"

김명수 대법원장을 비롯한 대법관들이 11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에서 열린 전원합의체 선고를 위해 자리에 앉아있다. 뉴시스

김명수 대법원장을 비롯한 대법관들이 11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에서 열린 전원합의체 선고를 위해 자리에 앉아있다. 뉴시스


대법원은 이미 전통·관습과 관련된 종중(宗中)제도에서 남녀평등에 반하는 부분의 효력을 부정하는 취지로 판결해왔다. 이처럼 남녀평등 이념과의 조화를 지향해온 대법원 판결 흐름에 비춰보면, 적장자 중심의 종법 사상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2008년 전원합의체 판결을 고수할 수 없다.

2023년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문

상속인들이 제사 주재자를 정해놓지 않았다면 성별이나 적자·서자 여부에 관계없이 최연장자를 주재자로 삼아야 한다는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이 나왔다. 연장자 딸이 있더라도 그보다 어린 아들을 주재자로 삼는다는 기존 대법원 판례를 15년 만에 변경한 것이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조재연 대법관)는 11일 김모씨 등 사망한 A씨 유족 3명이 B재단법인과 또 다른 유족 이모씨를 상대로 낸 유해인도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원심은 '혼외자 여부 불문, 남자 우선'

A씨는 1993년 김씨와 결혼해 딸 2명을 뒀다. 그러나 결혼 생활 중이던 2006년 A씨는 또 다른 여성인 이씨와 C군을 얻었다. 2017년 4월 A씨가 사망하자 이씨는 김씨 등과 협의 없이 A씨를 화장했고, B재단법인이 운영하는 추모공원에 유해를 봉안했다. 그러자 김씨와 두 딸은 이씨 등을 상대로 A씨의 유해를 돌려달라며 소송을 냈다.

고인의 유해 등 제사용 재산은 민법상 제사 주재자 소유다. 김씨 등은 이에 "혼외자인 아들 대신 장녀가 제사 주재자로 지정돼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1, 2심은 기존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례를 근거로 본처인 김씨가 아닌 이씨 손을 들어줬다. 2008년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공동상속인 간 협의가 이뤄지지 않은 경우 적자와 서자를 불문하고 장남 혹은 장손자가, 아들이 없는 경우 장녀가 제사 주재자가 된다"며 나이와 적서 여부보다 성별을 우선시한 판결을 내렸다.

대법 "남녀 상속인 차별에 정당한 이유 없어"

김명수 대법원장을 비롯한 대법관들이 11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에서 열린 전원합의체 선고를 위해 자리에 앉아있다. 뉴시스

김명수 대법원장을 비롯한 대법관들이 11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에서 열린 전원합의체 선고를 위해 자리에 앉아있다. 뉴시스

대법원은 그러나 이날 '평등 원칙'을 내세워 기존 판례를 뒤집었다. 나이가 더 많은 딸이 있는데도 장남을 제사 주재자로 삼는 것은 "같은 것을 자의적으로 다르게 취급하는 행위"라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헌법상 전통적 사실이나 관념에 기인하는 차별, 즉 성역할에 관한 고정관념에 기초한 차별은 허용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장남 우선 제사 주재' 관습은 합리적 이유 없는 성차별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대법원은 장남을 제사 주재자로 우선할 경우 제사용 재산을 승계하는 과정에서 여성 상속인이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배제된다는 점도 짚었다. 대법원은 "오늘날 전통적인 매장 대신 화장 등 장례방법이 다양해짐에 따라 피상속인 유해의 귀속 또는 관리가 더 문제 될 수 있는데, 이조차 남성 상속인에게 우선적으로 귀속된다는 것은 더더욱 그 정당성을 찾기 어렵다"고 밝혔다.

대법원은 사회관념과 법의식의 변화를 법질서에 반영해야 하는 책무를 강조했다. 대법원은 "종전 전원합의체 판결 법리는 더 이상 조리에 부합한다고 보기 어렵다"며 "제사 주재자가 정해지지 않은 경우 남녀를 불문하고 최근친의 연장자를 우선하되, 현저히 부당한 사유가 있는지 심리해야 한다"고 파기환송 이유를 밝혔다. 다만 이날 변경된 판례는 김씨 사건과 같이 '제사용 재산 승계'와 관련된 경우에만 적용된다.

"아픔과 상처 주는 방향으로 끌고 가면 비극" 보충의견도

민유숙·김선수·노정희·이흥구 대법관은 이날 판결을 변경한다는 결론에는 찬성하지만, 세부적인 내용에선 별개의견을 냈다. 민 대법관 등은 "법원이 제반사정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유체 등 귀속자로 적합한 자를 개별적으로 판단해야 하며, 배우자도 유체·유해의 귀속자에 포함돼야 한다"고 밝혔다.

김선수 대법관은 "A씨를 매개로 맺어진 특별한 관계를 아픔과 상처를 주는 방향으로만 끌어 가는 것은 비극"이라며 별개의견에 대한 보충의견을 냈다. 김 대법관은 "고인의 유해를 보관하는 데에 재산적 이익이 없음에도 피고와 원고들이 고인을 진정으로 기리려 하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며 "유해를 절반씩 나눠 각각 보관·관리하면서 각자의 방식으로 고인을 기리고 추모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밝혔다.

법조계에선 이날 전원합의체 판결을 두고 "서자 차별보다 질겼던 남녀 차별을 제사 영역에서 끊어냈다"고 평가했다. 그간 장남 서자와 차남 적자 사이의 제사 주재 관련 분쟁이 사건화된 적이 없어 적서 차별이 형해화될 동안에도 성차별은 명시적으로 남아있었다. 판사 출신인 민법 전문 박해식 변호사(법무법인 율촌)는 "이번 판결로 제사 영역에서 남녀 차별은 사실상 완전히 해소됐다고 보인다"고 밝혔다.

이정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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