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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의사 다 빨아들인 '빅5'... 분원 늘려 지방까지 독식 채비

입력
2023.05.05 04:30
수정
2023.05.05 09:58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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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캐슬 '3058': ⑤벼랑 끝 한국 의료 되살리려면]
의료 수요-공급 체계 흔드는 욕망의 사슬

편집자주

한국은 의료 가성비가 좋다고 하죠. 아프면 예약 없이 3,000~4,000원에 전문의를 보는 나라, 흔치 않으니까요. 그러나 건보 흑자, 일부 의료인의 희생 덕에 양질의 의료를 누렸던 시대도 끝나 갑니다. 지방 병원은 사라지고 목숨 살리는 과엔 지원자가 없는데, 의대 정원은 18년째 3,058명입니다. 의사 위상은 높지만 국민이 체감하는 의료 효능감은 낮아지는 모순. 문제가 뭘까요? 붕괴 직전에 이른 의료 현장을 살펴보고, 의사도 환자도 살 공존의 길을 찾아봅니다.

인천 송도에 세브란스병원의 분원인 송도세브란스병원이 들어설 공사 현장. 세브란스병원은 800병상 규모의 분원을 건설 중이며 2026년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인천=홍인기 기자

인천 송도에 세브란스병원의 분원인 송도세브란스병원이 들어설 공사 현장. 세브란스병원은 800병상 규모의 분원을 건설 중이며 2026년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인천=홍인기 기자

"2027년 인천에 블랙홀이 열린다. 환자와 의사를 모두 빨아들일."

최근 국내 의료계가 가장 예의주시하는 지역이 바로 인천 송도·청라신도시다. 국내 최대 의료기관 중 두 곳이 여기에 분원을 짓고 있다. 의료계는 이곳에 분원이 완성되면 대형병원 중심 체계가 더 공고해질 수 있다며 긴장하고 있다.

청라엔 아산, 송도엔 세브란스

지난달 19일 한국일보가 찾은 인천 서구 청라동 '서울아산병원청라' 부지. 곳곳에 '사유지 무단 침범 금지'라고 쓰인 표지판이 세워진 이곳에는 2027년 국내 최대 병원인 서울아산병원의 분원이 들어선다. 부지 건너편에서는 대형복합쇼핑몰 신세계 스타필드의 공사가 한창이다.

인천 연수구 송도동 연세대 국제캠퍼스 부지에 들어오는 '송도세브란스병원'의 공사 속도는 더 빨라 2026년 완공 예정이다. 세브란스병원 건설은 지역 부동산 업계엔 상당한 호재로 인식된다. 인근 공인중개사무소 직원인 A씨는 "병원을 보고 근처 아파트에 투자한 사람들이 꽤 많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두 병원이 문을 열면 송도·청라에만 2,000개 넘는 병상이 들어선다. 아산병원은 800병상 병원 개원을 목표로 잡고 있는데, 이후 500병상을 더 늘릴 계획이다. 세브란스는 800병상 규모로 꾸릴 예정이다. 두 병원에서 늘어나는 병상만 해도 삼성서울병원(병상수 약 2,000개) 규모에 달한다.

병상 규제 없는 건 한국이 유일

인천 서구 청라동에 서울아산병원의 분원인 청라의료복합타운 서울아산병원청라가 들어설 부지 전경. 인천=홍인기 기자

인천 서구 청라동에 서울아산병원의 분원인 청라의료복합타운 서울아산병원청라가 들어설 부지 전경. 인천=홍인기 기자

인천은 대형병원들이 병상 경쟁을 벌이는 대표 지역이지만, 수도권 다른 곳에서도 종합병원들의 분원 설치 움직임이 잇따르고 있다. 서울대병원은 송도에서 약 5㎞ 떨어진 경기 시흥시 배곧신도시에 800병상 규모 '배곧서울대병원'을 세우고 있다. 인하대병원도 경기 김포시에 700병상 규모 분원을 건설할 예정이다. 이외에 경희대의료원은 경기 하남시에, 아주대의료원은 경기 평택·파주시에 각각 500병상 규모를, 가천대길병원은 위례신도시에 1,000병상 병원을 지을 계획이다. 계획대로 완공되면 2028년쯤 수도권에만 6,000병상이 새로 생긴다.

전문가들은 병상 확보로 덩치를 키운 수도권 대형병원이 지방 환자와 의사를 빨아들여, 지금도 열악한 비수도권 지역의료가 초토화될 것이란 우려를 내놓는다. 지역병원 구인난은 더 심해지고 지방병원은 수익을 내지 못하니 투자는 더 어려워진다. 깨끗하고 좋은 시설에서 치료받고 싶은 지방 환자들은 수도권으로 더 몰릴 게 뻔하다. 나백주 서울시립대 도시보건대학원 교수는 "병상이 무분별하게 특정 지역에 편중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며 "의사 수가 전체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누가 지방에서 진료받으려고 하겠느냐"고 지적했다.

병상 확충은 병원 입장에선 돈 되는 사업이지만, 이미 심각 단계에 이른 종합병원 필수의료 인력 부족 현상을 부채질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걱정스럽다. 한국 병상 수는 인구 1,000명당 13.2개 인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보다 3배 정도 많다. 윤석준 고려대 예방의학과 교수는 "한국에서 의사가 적다는 것의 본질은 종합병원급 이상에서 '병상 대비 의사 수'가 부족한 것"이라고 말했다.

병상=돈... 대형병원의 무한 욕망

경기 시흥시 배곧동 서울대병원의 분원인 '배곧서울대병원'이 들어설 부지 주변에 담장이 쳐있다. 시흥=홍인기 기자

경기 시흥시 배곧동 서울대병원의 분원인 '배곧서울대병원'이 들어설 부지 주변에 담장이 쳐있다. 시흥=홍인기 기자

수도권 대형병원 집중 현상은 의료 전달체계의 붕괴로 이어진다. 보통 ①감기 같은 경증 질환이나 고혈압·당뇨 등 만성질환 등은 동네 의원급이 관리하고, ②간단한 수술·시술, 회복이 필요한 환자들은 지역 병원에서, ③중증응급이나 희귀난치성 질환 등은 '빅5'(아산·서울대·세브란스·삼성·서울성모) 같은 상급종합병원에서 맡는 게 이상적이다. 그래야 환자의 중증도에 따라 적기에 치료가 이뤄져 증상 악화를 막을 수 있다.

그러나 모든 환자가 수도권 대형병원에 몰리면 의료 전달체계는 무너지고, 중증환자 치료도 늦어진다. 빅5 의사들조차 가장 염려하는 부분이다. 빅5 병원에서 내과 전문의로 근무 중인 B씨는 "경증 환자에게 '동네병원에 가셔도 된다'고 설득해도 기어코 큰 병원에서 진료받으려고 한다"며 "이런 현상은 갈수록 심해질 것"이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실제 진료 때문에 빅5 병원을 찾는 지방 환자 수도 갈수록 늘고 있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최혜영 의원실이 국민건강보험공단으로부터 받은 '5개 주요 상급종합병원(빅5) 진료 인원' 자료에 따르면 2021년 빅5의 비수도권 외래환자 수는 66만2,996명으로, 2017년(57만9,048명)보다 14.7% 증가했다. 비수도권에서 온 입원환자도 11만7,773명에 달한다.

대형병원들이 병상 확장 욕망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병상이 곧 돈'이기 때문이다. 최혜영 의원실이 한국보건산업진흥원과 보건복지부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2021년 빅5의 총 입원 수입은 4조2,290억 원에 달했다. 2017년(3조3,616억 원)보다 25.8% 증가했다. 지난해 빅5가 외래환자 진료비로 거둬들인 수입은 2조5,950억 원으로, 2017년(1조6,173억 원)보다 60.5% 상승했다.

비급여 인센티브로 의사 독려하는 병원

그래픽=강준구 기자

그래픽=강준구 기자

대형병원들이 병상을 계속 늘릴 수 있는 이유는 정부 통제가 없기 떄문이다. 정부는 2007년 병상 수급 관리 계획을 끝으로 16년간 방치했고, 그 사이 병원들은 병상 수를 무한대로 늘렸다. 국회가 2019년 의료법을 개정해 병상 과잉 공급 지역에서 신규 병상 추가 시 정부 허가를 받도록 하는 '병상 총량제'를 도입했지만, 코로나 팬데믹의 여파로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다. 정부가 3년 간 법을 집행하지 않는 사이, 병원들은 '막차'에 올라타 병상 한 개라도 더 늘리려고 몸부림을 치고 있다.

병상 확대가 의료 전달체계만 망가뜨리는 건 아니다. 건강보험 혜택을 받지 못하는 비급여 진료(환자 부담)가 계속 늘어 국가 전체 의료비 지출 증가로도 이어진다. 비급여는 병원 입장에선 황금알을 낳는 거위다. 입원·외래환자의 소비를 유도하려면 많은 비급여 항목을 만들어야 한다. 실제 대형병원은 신규 비급여 항목을 만들기 위해 머리를 싸맨다. 나백주 교수는 "교수들이 연구를 통해 새로운 의료기술을 도입하면, 병원은 비급여인 첨단의료를 이용하게 유도한다"고 지적했다.

종합병원이 소속 의사를 상대로 비급여를 늘리기 위한 '은밀한 독려'를 하는 경우도 있다. 수도권 종합병원에서 근무했던 재활의학과 전문의 C씨의 말을 들어보면 이런 식의 독려가 이뤄진다. "병원에서 매월 20일쯤 연락이 와요. '선생님, (지금까지 매출이) 작년 (동기 대비) 매출을 넘었어요' 이렇게요. 이제부터 발생하는 수익은 제 인센티브가 된다는 걸 귀띔해 주는 거죠. 그만큼 입원이나 비급여 진료를 하라는 얘기예요."

대형병원 문턱 지금보다 더 높아야

그래픽=강준구 기자

그래픽=강준구 기자

전문가들은 병원의 과잉 공급 문제 못지않게 '환자의 과잉 수요'도 손봐야 한다고 지적한다. 경증 환자들이 수도권 대학병원 같은 상급종합병원에 찾아오지 않고, 지역 의료기관에서 치료받도록 유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려면 무조건 큰 병원에서 진료 받으려고 하는 '욕망의 수요'를 제어해야 한다. 실제 한국인은 병원을 자주 찾고 오래 입원하는 편이다. 2020년 국민 1인당 의사에게 외래진료를 받는 횟수는 연간 14.7회로, OECD 국가 중 가장 많다. 입원환자 1인당 평균 재원일수는 19.1일로 OECD 국가 중 일본(28.3일) 다음으로 길다. 빅5 중 한 병원에서 응급의학과 전공의로 근무 중인 D씨는 "입원할 정도가 아닌데 서울 큰 병원에 입원하려고 지방에서 119를 타고 응급으로 위장하는 사람도 있다"며 "상급종합병원 문턱이 너무 낮고, 이를 법적으로 막을 방법은 없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상급종합병원 문턱을 높이기 위한 '게이트키퍼'(문지기)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나백주 교수는 "영국은 국가주치의 제도를 통해 상급기관에 가려면 단계를 밟아야 하고, 호주는 대학병원에 입원해도 회복 단계에선 거주지 인근 병원에서 치료받게 하는 '강제회송제도'가 있다"고 소개했다.

글 싣는 순서

<의사 캐슬 '3058'_시한부 한국 의료>

①'슬의생 99즈'는 없다
②투석 환자는 고향에 못 사나요
③의사 빈자리 채우는 PA 유령
④정원이냐 수가냐, 누구 말이 맞나
⑤벼랑 끝 한국 의료 되살리려면


류호 기자
오세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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