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카오톡 오픈 채팅방 수백 개 생성
지출할 때마다 허락받거나 보고
과소비 내용 올릴 땐 '호된 질책'
유료 이모티콘 사용하면 '강퇴'
'플렉스' 대신 '짠테크' 일상 공유
"5.3㎞ 거리인데 버스 타도 될까요?" "튼튼한 두 다리를 믿으세요."
"아아(아이스아메리카노) 한 잔만 마셔도 될까요." "심각한 사치입니다. 아리수 마시세요."
아침인사는 "모두 아끼는 하루 됩시다."
영화나 드라마 속 대사가 아니다. '거지방'이라는 이름의 카카오톡 오픈채팅방에서 오간 대화들이다. 28일 기준, 카카오톡에선 거지방이라는 이름의 오픈채팅방이 수백 개 운영되고 있다. 300~500명 등 제한을 둔 경우 인원이 모두 차서 들어갈 수 없는 방도 많고, 인기 오픈채팅방엔 누군가 퇴장해 결원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며 대화를 나누는 '대기방'까지 따로 있을 정도다. 자리가 날 때까지 기다리다 못해 만들었다는 '기다리다가 못 들어가서 내가 만든 거지방'과 같은 제목의 오픈채팅방도 적지 않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와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나도 거지방 들어가고 싶다 초대해 달라" 등 다수의 글도 올라온다.
"지출 줄이는 것이 목표" 3만 원 이상 쓸 땐 '지출품의서'도 작성
거지방은 각 오픈채팅방별로 운영규칙이 조금씩 다르지만, "지출을 줄이자"는 게 공통된 목표다. 소비 내역을 기록하도록 하는데, 지출할 때마다 지출항목과 '-3,000원'처럼 금액을 공유하는 방식이다. 지출 전에 구성원들의 허락을 구하기도 한다. 닉네임 옆에는 자신이 이번 달 지출한 금액을 누적해서 적는다. 월간 지출액은 1개월에 한번 초기화되며, 3만 원 이상 '고액지출'인 경우, 마치 회사처럼 지출품의서를 작성해 3명의 서명을 받아야 한다는 다소 까다로운 규칙을 제시하는 방도 있다. 일부 방에는 절약에 대한 각오를 다지게 하기 위해 닉네임 옆에 전 재산 액수를 적어 넣도록 하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사치스러운' 소비가 발견될 경우, 구성원들의 호통이 쏟아진다.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3,000원을 사용했다는 사용자에게는 '회사에 가서 정수기 물을 마셔라', 유료 이모티콘을 사용할 경우 "소비심리를 조장한다"면서 강퇴(강제퇴장)시킨다. 단 카카오톡에서 기본으로 제공하는 이모티콘과 소비욕구가 들지 않는 '못생긴' 이모티콘은 사용 가능하다. 만약 귀여운 이모티콘을 사용하고 싶다면 '직접 그리거나 이모티콘을 캡처해서' 사용해야 한다. 한 달 동안 가장 소비를 많이 한 사람은 '500자 반성문'을 써야 한다.
다만 '가치 있다고 판단되는 소비'는 관대하게 허락해준다. '기부금' 또는 '부모님에게 용돈 드림'과 같은 내역에는 고액지출이더라도 호통 대신 '엄지손가락'과 '하트' 이모티콘을 누른 반응이 조용히 증가한다. '고급사료만 먹는다'며 자신의 반려견 사료 그릇 사진을 공유하는 사용자에게는 "거지에게 반려동물은 사치지만, 이미 키우는 건 어쩔 수 없다"고 눈감아 준다. 지출품의서를 작성해 지출을 허락받는 오픈채팅방의 경우, △필요한가 △주1회 이상 사용가능한가 △두 가지 이상의 용도가 있는가와 같은 기준을 넘어야 하는데, '삶을 풍요롭게 하는가'라는 특별 항목이 있다. 꼭 필요한 소비만 해야 한다는 거지방 원칙에 따르면 허용할 수 없지만, 가치 있는 지출인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허락해 주겠다는 의미다.
경기침체·고물가에 따른 '짠테크'에서 출발…티키타카 재미 요소
거지방 주 이용자는 10대와 20대로 추정된다. '직장인 거지방'이 있기는 하지만, 1995년생 이하로 입장 가능 나이를 제한하는 곳이 많다. 전문가들은 거지방의 출발점은 물가상승·경기침체에 MZ세대(1980년대 초~2000년대 초 출생) 전반에서 유행 중인 '짠테크(짠돌이+재테크)'라고 본다. 하루 종일 1원도 쓰지 않는 '무지출 챌린지', 앱 광고를 클릭하면 경품 또는 소액의 현금을 주는 응용소프트웨어(앱)를 이용하는 '앱테크' 등이 대표적이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아 대출)'해 주식과 비트코인, 부동산에 투자해 '경제적 자유'를 달성하는 방식이 유행했다면 올해부터는 무리한 투자보다 '짠돌이'처럼 살면서 종잣돈을 모으는 게 낫다는 인식이 더욱 확산됐다는 해석이다.
10대와 20대를 중심으로 거지방이 폭발적인 인기를 끌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절약을 재치 있는 대화 소재로 활용하는 모습 덕분이었다. 초기의 거지방은 트위터를 통해 친한 사람들끼리 소비내역을 공유하며 지출을 줄이기 위해 만든 방이었지만, 여기에서 오간 일부 대화가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서 화제가 되며 유행이 된 것으로 보인다.
운영자가 절약 각오를 다지자면서 '우리는 거지다'를 외치면, '우리는 거지다'라며 다른 참여자들의 텍스트 연호가 이어진다. 아이스크림을 사먹고선 호통을 피하기 위해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 속 단비 같은 감각적 쾌락추구 -1,200원"이라고 적은 능청스러운 글에는, "저기요 그럴싸한 이름 붙이지 마시고 솔직히 이야기하세요"라는 날카로운 지적이 쏟아진다. 그러면 "죄송합니다. 사실 아이스크림 구매"라는 티키타카가 이어진다. "저를 운반해 준 어르신께 감사 인사로 3,800원 드렸다"고 하자 "택시 타셨군요"하고 해석해내기도 한다.
'개인의 취향' 존중하는 세대 특징…스스로 '거지' 칭하는 무기력감도
'트렌드 모니터 2023'의 저자인 윤덕환 마크로밀 엠브레인 이사(심리학 박사)는 '거지방 현상'에 대해 "'개인의 취향'을 각자의 라이프 스타일로 인정하며, 같은 취향을 가진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찾아내 교류하는 성향을 가진 세대의 특성"이라고 분석했다. 다만 젊은 층이 '거지'라는 단어로 스스로를 지칭하고 있다는 점은 웃고 넘길 일만은 아니라는 분석이다. 그는 "주로 남을 공격하고 무시할 때 사용돼왔던 거지라는 단어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이른바 '수저 계급론'에서 '흙수저'처럼 개인의 노력으로는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어려워진 사회 구조를 저항없이 받아들이는 무기력감이 작용한 것이라고 본다"고 우려했다.
거지방이 기존의 젊은 층 사이에서 유행하던 '플렉스 소비(과시형 소비)'를 대체하게 될까. 이베스트투자증권은 올해 소비 트렌드를 전망하며 발간한 보고서에서 "2023년에는 극단의 가성비 또는 극단의 가심비만 살아남을 것"이라면서 "짠테크, 무지출 챌린지와 동시에 플렉스와 욜로 현상도 동시에 일어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윤 이사도 "플렉스와 거지방을 포함한 짠테크는 자신의 취향을 과시한다는 측면에서는 유사하고 공존할 가능성이 크다"면서 "다만 세대 내 과시 양상이 크게 차이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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