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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 다르고 '얼' 다른 시대도 오려나

입력
2023.03.19 22:00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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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로마자(영어 알파벳) R의 공식적인 한글 표기는 그간 '아르'였다. 그러나 대개들 '알'로 발음해서 간극이 있었는데 드디어 올해 1월부터 국립국어원에서 '알'도 함께 인정했다. 로마자 낱자를 한글로 자주 표기하지 않아 별로들 신경을 안 쓰지만 어쨌든 그래도 발음이야 늘 하고 한글로 적을 때도 있으니 표준은 정해야 된다. 이제 'R[알]은/이'냐 'R[아르]는/가'냐를 고민 안 해도 된다. R의 영국 영어 [ɑː] 기준으로는 '알'이든 '아르'든 변칙적인데, '아'는 마치 A 같고 정작 [r]의 소릿값이 없으니, 글자 R의 발음/표기만은 딴 영어 외래어와 다르다.

글자 R의 표기/발음만 기존의 '아르'와 더불어 '알'도 인정한다는 것이고 낱말 안에서는 그렇지 않다. 즉 여전히 독일어 차용어 '호르몬, 엔도르핀'은 표준어, '홀몬, 엔돌핀'은 비표준어다. 즉 표기상 음절말 r/l은 여전히 구별된다. 기존에 '알'을 인정하지 않은 것도 L(엘)과 구별이 안 되기 때문이다.

음절말 r의 '르' 표기는 영어를 제외한 대다수 유럽 언어의 [r/ʁ] 발음을 반영하고 [l]과 구별하려는 것이다. 영어 hormone, endorphin 기준이다라면 '호몬, 엔도핀'일 텐데, 한국식 축약 내지 일본식 외래어의 과잉 수정으로 '홀몬, 엔돌핀'도 통용된다. 일본어에서 옮긴 책들은 예컨대 Bert[베르트]라는 독일 이름이 '벨트'로 과잉 교정되기도 했다. 일본어는 belt[벨트]든 Bert[베르트]든 ベルト[베루토]이다.

글자 이름 자체가 아주 중요하진 않다 보니 딴 언어도 비슷한 일이 생긴다. W는 독일어, 네덜란드어, 영어, 폴란드어 말고는 자국어 철자로 쓰는 유럽 언어가 드물기에, 로망스어(스페인어, 포르투갈어, 이탈리아어 등)에서 W는 이름이 두어 개다. 스페인어 W의 명칭은 uve doble[우베 도블레, ‘v 겹침’의 뜻]인데 doble v/u[도블레 베/우]로도 불린다. 독일 자동차 BMW[베엠베]는 이탈리아어 [비엠메부], 터키어 [베메베]처럼 BMV의 독음으로도 불린다. 한국에서 러시아어 KGB[카게베]는 [케이지비]이듯 영어 알파벳처럼 흔히 읽지만 BMW[비엠더블유]를 [베엠베]로, 프랑스어 TGV를 [떼제베, 테제베]로도 읽듯 간혹 원어도 따른다.

한국어는 미국 영어 영향으로 DMZ[디엠제트]를 [디엠지]로, MZ[엠제트]세대를 [엠지]로도 부르지만 그런 것들은 통으로 한 낱말로 치면 된다. Z 자체를 [지]로 부르면 G[지]와 헷갈리므로 Z의 이름으로서 [지]를 표준어로 인정할 필요는 없다. TV[티브이]도 그냥 낱말로 간주해 이제 [티비]라는 비표준어가 많이 통용되나 역시 글자 V는 [브이]로 따로 구별하는 게 합리적이다.

일곱 살배기 내 아들을 비롯해 한국은 1990년대생부터 미국 영어를 여러 경로로 일찍 접해서 R의 한국어 발음이 '알'보다 '얼'에 가까운 경우도 많다. ㅏ는 중설 저모음 [a], ㅓ는 후설 중저모음 [ʌ]인데 미국 영어 [ɑɹ]의 [ɑ]는 후설 저모음이라서 ㅏ와 ㅓ의 중간쯤이고 제트 세대(1997~2012)나 이후 알파 세대는 그걸 ㅓ에 더 가깝게도 받아들인다. 이들이 완전한 기성세대가 되는 삼사십 년 뒤에 베타, 감마 세대까지 나오면 '얼'도 함께 인정받게 될지도 모르겠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라는 속담 외에 '(아르 다르고) 알 다르고 얼 다르다'도 새로 생기려나.


신견식 번역가·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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