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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NR 무용론과 수의사의 역할에 대하여

입력
2023.03.16 19:00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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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혁
서상혁아이엠디티 대표이사·VIP동물의료센터 원장

편집자주

동물과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가장 가까이에서 바라보는 수의사이자 동물병원 그룹을 이끄는 경영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동물과 사람의 더 나은 공존을 위해 지금 필요한 이야기를 전달합니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길고양이 TNR(길고양이를 중성화 수술 후 방사하는 것)이 정말 효과가 없다고 생각하시나요?"

최근 개인적으로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입니다. 갑자기 왜 TNR이 화두에 올랐을까 궁금했는데 엊그제서야 이유를 알았습니다. 한 유튜버가 다룬 길고양이에 관한 영상이 발단이었습니다. '고양이만 소중한 전국의 캣맘 대디 동물보호단체 분들에게'라는 제목을 단 영상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길고양이가 생태계와 사회에 끼치는 해악이 적지 않으므로 적극적인 길고양이 개체수 조절 노력이 필요한데, 현재 실시 중인 TNR 정책은 개체수를 줄일 수 없는 '우산으로 폭포 막기'에 가까운 근시안적 정책에 불과하다는 이야기입니다.

해당 영상에서는 길고양이의 왕성한 번식력 탓에 TNR이 효과를 보려면 전체 길고양이의 75% 이상이 중성화되어야 하는데 현행 TNR 정책으로는 그것을 달성하기 어려우며, 길고양이를 포획했더라도 2㎏ 미만 고양이나 수유 중이거나 임신 중인 고양이는 중성화 수술을 하지 않고 다시 풀어줘야 하는 점 때문에 정책 효과를 보기가 어렵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대안으로 길고양이 밥 주기 행위를 제한하고 길고양이의 가정 내 입양을 독려하며 영상은 끝을 맺습니다.

수의사로서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효과적인 길고양이 개체수 조절을 위해 현재의 TNR 정책은 더 많은 사회적 논의를 통한 제도 개선이 필요합니다. 수의사협회 또한 현행 TNR 제도의 개선을 촉구하며 길고양이 몸무게가 2㎏이 안 되거나 임신과 수유 중이라 할지라도 수의사 판단에 따라 중성화 수술을 진행할 수 있어야 한다는 명확한 입장을 전달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의 TNR이 완전하지 않다고 해서 TNR이 효과가 없다거나 길고양이를 입양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주장에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길고양이의 생식 능력을 없애는 TNR 정책은 미약하나마 길고양이 개체수 조절에 기여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더 나은 TNR을 위한 대안도 존재합니다. 넓은 지역에서 산발적으로 TNR을 진행하기보다 특정 구역을 정해놓고 집중적인 TNR을 진행하는 지역 단위 TNR이 바로 그것입니다.

미국 매사추세츠주 뉴버리포트 지역 사례는 지역 단위 TNR이 효과를 본 좋은 예입니다. 뉴버리포트에서 1992년부터 2년 반에 걸쳐 300마리 이상의 고양이에게 집중적으로 TNR을 실시한 결과 1998년이 되었을 때 새끼 고양이 6마리 정도만이 발견된 것이죠. 산발적으로 진행되는 TNR을 지역 단위 TNR로 개편하고 고양이 마이크로칩 등록 의무화를 통해 고양이 유기를 막으면서 지금보다 적극적으로 TNR을 실시한다면 머지않아 길고양이 문제는 해결의 실마리를 찾게 될 것입니다.

혹시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전문가라면 가치 판단에 앞서 문제를 가장 빠르고 효과적으로 해결하는 대안을 제시하는 데 집중해야 하지 않는가?' 맞습니다. 만약 길고양이가 아닌 모두가 혐오하는 바퀴벌레와 같은 생물이 문제였다면 해결 방식이 달랐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2023년 대한민국에서 길고양이가 가지는 사회적 통념을 배제한 채 가치중립적인 논의를 전개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인간이 내리는 모든 의사 결정은 설령 그것이 자연과학의 영역일지라도 가치 판단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을뿐더러, 얼핏 빠른 해결책처럼 보이는 행동도 사회적 가치와 충돌할 경우 되레 문제 해결을 어렵게 만드는 광경을 우리는 자주 목격해 왔습니다. 지금의 TNR 논쟁에서 우리가 얻어야 할 결과는 증폭된 갈등을 중재하고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입니다.

전문가는 과학적 사실관계에서 벗어나 가치 판단의 시녀 역할을 해서도 곤란하지만, 실재하는 사회적 가치를 무시한 채 갈등의 첨병을 자처해서도 안 됩니다. 서로 다른 가치 판단 사이에서 슬기롭게 문제를 해결하도록 도와주는 믿을 수 있는 중재자, TNR 무용론의 확산과 무엇이 최선인지 정답을 말하라는 사회의 압력 속에 수의사의 역할은 여기에 있다고 믿습니다.

서상혁 아이엠디티 대표이사·VIP동물의료센터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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