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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로 가득한 세상에서도 소리하지 않는 소리를 듣는다

입력
2023.03.01 19:00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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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원
정명원검사

편집자주

17년차 베테랑 검사이자 ‘친애하는 나의 민원인’ 저자인 정명원 검사가 전하는 다양한 사람과 사건, 우리가 사는 세상이야기.

대구지검 상주지청의 청어무성. 정명원 검사 제공

대구지검 상주지청의 청어무성. 정명원 검사 제공


새로 부임한 검찰 청사와 사무실의 '청어무성' 글귀
유명 정치인 영장 청구로 온 세상에 큰 소리 퍼져도
시골 음주운전 등 작은 것도 꼼꼼히 챙긴 젊은 검사

청어무성(聽於無聲), 새로 근무하게 된 대구지검 상주지청의 청사 앞 머릿돌에 쓰여 있는 글귀다. '소리로 가득 찬 세상, 소리하지 않는 소리를 듣는다'는 뜻이라고 아래에 작은 돌판에 그 풀이가 쓰여 있다. 같은 글귀는 내 사무실의 벽면에도 걸려 있는데 한바탕의 급한 업무를 마치고 멍한 순간에는 여지없이 글귀와 마주하게 된다. 소리 없는 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과연 어떤 것일까?

세상은 소리로 가득하다. 요즘 가장 크게 울리는 소리는 유명 정치인에 대한 검찰의 구속영장 청구 소식에 대한 것이다. 모든 언론은 그에 대해 보도하고 정치인과 각종 전문가들이 가세하고 찬성여론과 반대여론이 질세라 서로 목소리를 높인다. 사실과 전망과 추측과 대책이, 찬탄과 옹호와 비난과 성토가 사방에서 일어나 그야말로 거대한 소리가 된다. 소리의 근거와 출처를 따져 묻는 소리들과 소리의 배후와 음모를 추측하는 소리들이 다시 하나의 소리가 되고, 그사이에 각각의 이해득실의 셈이 재빠르게 돌아간다. 소리가 커질수록 자가증식의 속도는 더 빨라지고 규모도 커진다.

그래픽=송정근기자

그래픽=송정근기자

옛날이나 지금이나 언론이 제공하는 많은 뉴스들은 검찰의 수사와 연관되어 있었다. 검찰이 어디를 압수수색했다거나 누구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했다는 소식들은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보도되고 그것은 다시 거대한 이슈와 소리가 된다. 애초에 소리는 존귀한 것이다. 국민의 알 권리 차원에서도, 수사권력에 대한 시민 사회의 감시와 견제 측면에서도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데 어느 시점부터인가 검찰의 수사 뉴스와 그에 대한 소리들이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거대한 소리 폭풍 아래에 있으면 세상에는 오직 소리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된다. 그 심각한 착각 속에 미처 소리가 되지 못한 일들의 중요함이 문득 잊힌다. 잊힌 작은 것들은 아닌 줄 알면서도 어쩐지 좀 외로워지고 어깨가 움츠러든다.

소리 폭풍에 잠식당한 세상에 대해 생각을 이어가고 있는데, 후배 검사가 음주 무면허운전을 일삼고 있는 한 남자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하겠다는 보고서를 가지고 들어온다. 이미 지난겨울 만취 상태로 차를 운전하다 담벼락을 들이받는 사고를 낸 일로 재판을 받고 있는 중인데 불과 3개월도 되지 않아 다시 만취 운전을 하다가 논두렁에 빠지는 바람에 발각되었다는 남자. 검사는 그의 일상을 세세히 살핀 끝에 그가 경찰에 입건된 것은 2건이지만 매일 술을 마시고 매일 운전을 하고 다닌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검찰 조사를 받으러 오면서도 거리낌 없이 무면허로 운전을 해 온 남자를 이대로 두면 스스로 다치든 남이 다치든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며 구속이 필요한 이유를 조목조목 설명하는 검사의 눈빛이 단단했다.

거대 정치인의 구속 여부와는 달리 한적한 시골 마을에 혼자 살면서 매일 술을 마시고 매일 만취운전을 하다 담벼락이나 논두렁에 처박히는 사람의 구속에 대해 세상은 아무런 소리를 들려주지 않는다. 그러나 흔한 기록 속에 섞여 넘어가도 몰랐을 사건에서 한 남자의 위태로운 일상을 읽어내고 연이어 닥쳐올지 모를 더 큰 비극을 우려하는 젊은 검사는 저도 모르게 소리하지 않는 소리를 듣고 있었던 것이다.

큰 소리를 일으키는 일들은 대개 세상을 움직일 만큼 중요한 일들일 것이다. 거대한 소리들이 결국은 우리 사회와 개인의 삶을 보다 멋진 곳으로 밀고 나가는 과정이리라 믿는다. 그러면서도 어느 귀퉁이에서는 큰 소리에 휩쓸리지 않는 귀들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저 큰 소리에 놀라지 아니하고, 어깨 움츠린 작은 소리들, 미처 소리가 되지 못한 소리들 곁에 오래 서 있을 수 있기를 조용히 빌어 본다.

정명원 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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