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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의 얼굴을 한 홈리스... 집 없고 가난한 여성들이 '증언'에 나섰다

입력
2022.12.20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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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홈리스 증언대회' 현장에서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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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일 서울 용산구에 있는 반빈곤 운동 및 홈리스 야학 공간 '아랫마을'에서 열린 여성홈리스 증언대회에서 여성홈리스 로즈마리(가명)씨가 마이크를 들고 발언하고 있다. 이혜미 기자

지난 19일 서울 용산구에 있는 반빈곤 운동 및 홈리스 야학 공간 '아랫마을'에서 열린 여성홈리스 증언대회에서 여성홈리스 로즈마리(가명)씨가 마이크를 들고 발언하고 있다. 이혜미 기자


노숙할 때는 참 여자로서 불편한 게 많죠. 짐승들은 자기가 자는 곳을 안 가르쳐준대요. 행여 잡아 먹힐까 봐요. 저도 마찬가지예요. 자는 곳을 절대 얘기하지 않죠.

여성 홈리스 '로즈마리(가명)'

한 번은 (쪽방에서) 문 잠그고 자는데 문 밖에서 "오빠 왔다"하면서 누가 저를 불렀습니다. "오빠 같은 소리 하네, 난 오빠 없어!"하고 내쫓았습니다.

길순자 양동쪽방주민회 사업위원

한국 사회에서 '홈리스(주거권이 박탈된 상태를 의미하며 거리에서 잠을 자는 '노숙인'을 포괄하는 개념)'라는 단어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실직 남성 가장'이 겪는 사회 문제로 대두된 이후, 줄곧 우리 사회에서 홈리스는 중노년 남성의 모습으로 그려졌다.

허나 개인적 불운과 구조적 불평등이 겹친 결과인 '빈곤'이 어찌 성별을 가리겠는가.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2021년도 노숙인 등의 실태조사(이하 실태조사)'에 따르면 전국의 홈리스 수는 1만4,404명인데, 그 중 여성은 3,344명(23.2%)이다. 남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수이지만, 적지 않은 인구다. 그렇다면 그 많은 여성홈리스들은 모두 어디에 있는 걸까.

그간 가시화되거나 설명되지 않았던 여성홈리스의 존재를 알리기 위한 '여성홈리스 증언대회'가 19일 서울 용산구의 반빈곤 운동 공간 '아랫마을'에서 열렸다. 이 자리에는 여성홈리스 5명의 증언이 직접 혹은 대독을 통해 소개됐다. '여성홈리스, 빈곤과 젠더의 교차점에서'라는 제목의 발제로 증언대회를 연 홍수경 홈리스행동 활동가는 "홈리스 복지체계의 원칙부터 실행까지 젠더 관점이 부재해, 여성들은 홈리스 논의에서 배제돼 사각지대에 놓여있다"고 설명했다.

19일 열린 여성홈리스 증언대회에서 발제를 맡은 홍수경 홈리스행동 활동가가 발언하고 있다. 이혜미 기자

19일 열린 여성홈리스 증언대회에서 발제를 맡은 홍수경 홈리스행동 활동가가 발언하고 있다. 이혜미 기자


성별 들킬까 숨고, 눈치보고 ... '보이지 않는 여성홈리스'

"거리에서 지낼 때 곁에 여자가 있으면 좀 든든해요. 매일 주변 시선을 신경 쓰면서 자려고 하니까 밤에 잠을 제대로 못 자요. 밤에 잘 못 자니 낮에는 멍하니 있어요."

첫 증언자로 나선 로즈마리(가명·66)씨는 거리에서도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여성홈리스의 곤궁한 삶을 설명했다. 노숙인 시설, PC방, 만화방처럼 비를 피할 지붕이 있는 곳은 물론이고, 고속버스터미널 등 거리에서도 잠을 잤다. 그러나 등을 뉘일 공간이 어디든 여성홈리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것'이라고 그는 강조했다.

성범죄 등 위험의 표적이 되기 쉬운 여성홈리스는 광장 등 노출된 곳에서 노숙을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성별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현행 실태조사 방식으로는 여성홈리스의 수를 파악하는 것부터가 난항이다.

"여성홈리스들은 남자처럼 보이기 위해 머리를 깎거나 눈에 띄지 않게 머물러요. 목욕탕을 청소하는 대신 잠자리를 확보하거나 돌봄노동을 하며 기도원에서 생활하기도 하죠. 이런 경우 실태조사에 잡히지도 않고, 정책대상으로 포섭되지도 않습니다. (홍 활동가)"

같은 홈리스라도 성별에 따라 다른 경험을 한다

어떤 여성들에게 임신과 출산은 더 없이 버거운 짐이다. 노숙 혹은 불안정한 주거 환경에서 남성은 존재만으로 위협적이지만, 거리의 약자인 여성으로서는 정서적으로든 경제적으로든 혹은 육체적으로든 어쩔 수 없이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대가 되기도 한다.

"아이들을 데리고 불안정한 곳을 전전하며 살아가는 게 참 힘들었습니다. 몸도 아프고 못난 엄마지만 아무리 어려워도 내가 데리고 살아야지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간질로 장애 등급을 받은 사계절(가명·46)씨는 거리와 쪽방, 반지하를 전전하며 아이 둘을 키웠지만, 결국 가난으로 인해 양육권을 모두 포기해야만 했다. 여성이자 엄마이자 장애인이자 홈리스라는, 그를 겹겹이 둘러싼 곤궁한 정체성은 필연적으로 스스로를 가난에 머물게 했다.

안전을 위해 남자들과 관계 맺기를 적극적으로 하기도 한다. 발달장애를 가진 김영숙(46)씨는 쪽방이나 고시원에 살면서 추근덕거리는 이웃 남자들을 피해 여러번 이사를 해야 했는데, 이후로는 다른 남자들의 괴롭힘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아는 삼촌들'과 친해지거나 남자와 함께 사는 것을 택했다.

위험에 노출되기 쉬운 여성홈리스들은 쉽사리 '시설 입소'를 고려하지만, 완전한 해법이 되진 않는다. 여성홈리스 중에는 자녀를 동반한 경우가 많은데, 아이와 함께 머물 수 있는 쉼터가 드물 뿐더러 여성들 앞으로 나오는 수급비나 후원 물품 등을 가로채기 십상이라고 여우하품(50)씨는 증언했다.

실태조사는 성별에 따라 홈리스가 되는 경로는 물론 겪는 경험들도 다르다는 점을 보여준다. 남성의 경우 △실직(45.9%) △사업 실패(13.5%) △이혼 및 가족 해체(11.0%)를 계기로 노숙에 이르게 되지만, 여성은 △실직(21.3%) △질병 및 장애(17.0%) △가정폭력(15.2%) 순이었다. 또한 남성홈리스(15.8%)에 비해 여성홈리스의 정신질환 비율(42.1%)이 훨씬 높았다.

19일 여성홈리스 증언대회에서 홍수경 홈리스행동 활동가가 '여성홈리스, 빈곤과 젠더의 교차점에서'라는 제목으로 발제를 하고 있다. 이혜미 기자

19일 여성홈리스 증언대회에서 홍수경 홈리스행동 활동가가 '여성홈리스, 빈곤과 젠더의 교차점에서'라는 제목으로 발제를 하고 있다. 이혜미 기자

현행 노숙인복지법은 '성별 특성을 고려하여 노숙인 등을 위한 지원사업을 하여야 한다'는 조항을 두고 있지만, 법령에서 구체적으로 언급된 것은 '보건위생에 필수적인 물품'이라는 단어 뿐이다. 홍 활동가는 "주거 노동 의료 급식 등 각 영역에서 여성홈리스들은 남성과는 다른 '젠더화된 경험'을 하기 때문에 모든 복지서비스에 있어 젠더 특성을 반영한 정책이 수립되어야 하며, 이를 점검할 수 있는 성별 평가체계를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혜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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