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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을 기다린 아름다운 기운의 아이들

입력
2022.12.16 22:00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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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자료사진

한국일보 자료사진

겨울이다. 몇 번의 눈도 내렸고 일주일 후면 크리스마스다. 예전의 난 첫눈조차 기다리지 않았다. 눈은 성가신 날씨 현상일 뿐이었다. 그러나 이젠 여름에도 가끔 눈을 기다린다. 내 아이가 걸음도 걷지 못할 때, 창문을 짚고 한참을 섰다가 "누운" 하던 날부터였다. 그날 이후 아이는 여름에도 가끔 창문 앞에서 "눈 안 와"라며 눈을 기다린다.

얼마 전 눈이 펑펑 내린 날이었다. 나의 아이는 한 번의 숨도 쉬지 않고 "눈썰매 타러 가자" 했다. 밖이 너무 춥다는 나의 말에 "눈 오는 날은 추워도 안 추워"라면서. 이미 밖엔 겨울을 보내며 한 뼘 넘게 자랄 아이들이 가득했다. 목도리를 두르고 양말을 한껏 올려 신고 빵빵한 점퍼를 입었다. 그중 몇몇은 장갑이 없어 연신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뺐다. 그들은 빨개진 손으로 눈을 만지고 던지고 떠들썩하게 뛰어다닌다.

눈 오는 날처럼 특별한 날이 아니면 밖에서 마음껏 뛰노는 아이들을 보기 힘들다. 공공놀이터의 가치를 높이고 무장애 놀이터, 공동체를 위한 놀이터 등 여러 이름으로 놀이터의 변화를 시도하지만, 정작 놀이터의 사용자인 아이들은 바쁘다. 수학학원에 영어학원에 독서논술에 기타와 피아노 축구클럽까지.

동네 초등학교 3학년 아이였다. "눈이 와서 좋아?" "네, 좋아요." "눈이 왜 좋아? 춥고 손도 시리잖아." "눈 오는 날은 학원에 늦어도 선생님도 엄마도 뭐라고 안 해요." 난 그만 웃음이 났다. "그리고 전 여름부터 눈을 기다려요." "왜?" "뭔가 기다리면 기분이 좋아지거든요." 아이가 웃었다. 눈보다 더 빛나는 아이의 웃음이라니.

아이들의 말과 행동엔 아우라(Aura)가 있다. '아우라'는 독일의 철학자이자 평론가 발터 벤야민이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사용하면서 유명해진 개념이다. 벤야민은 아우라를 예술작품 '원본'만이 주는 어떤 분위기라고 말한다. '가깝고도 먼 어떤 것의 찰나적인 현상'을 경험하는 순간이다. 그는 예술의 위기가 아우라의 상실이라고 본 것도 원본 복제로 인해 일회적이지 않고 유일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뿔처럼 자라는 아이들'은 제각각 특별하다. 아니 모두 유일하다. 그 어떤 아이도 같은 모습을 하지 않았다. 같은 말과 같은 행동을 하지 않는다. 아이들의 말과 행동에 아우라를 느끼는 건 나만의 특별한 일이 아니다.

얼마 전 한 관광지에 갔을 때였다. 한 아이가 까르륵 웃으며 덜 녹은 눈밭으로 뛰어들었다. 백년해로한 듯 보이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말했다. "여기 오니 아이들이 많구먼." "그러게. 아름다운 기운을 오랜만에 느껴 보네." "아이는 원래 아름답지. 우리가 아름답게 키우지 못해서 아쉽지." "많이 웃으며 자라게 하고 싶었는데." "어른이 못 해주는 걸 눈이 해주네." 내가 유독 눈 오는 날의 아이들에게서 아우라를 느끼는 건 그들이 아름다운 웃음소리를 내고 아름다운 기운을 뿜어내기 때문일 것이다. 그 기운이 나에게 달라붙어 나도 그날만큼은 조금 더 아름다운 사람이 되는 것 같기도 하고.

북미항공우주방위사령부(www.noradsanta.org)에선 크리스마스에 24시간 동안 산타의 이동 경로와 현재 위치, 선물 개수를 실시간으로 보여준다. 이번 크리스마스엔 내 아이와 산타 할아버지의 비행을 지켜봐야겠다. 산타는 자신을 믿는 아이에게만 온다고 말해주면서, 여름에도 겨울을 기다리는 아이가 되길 바라면서. 조금 더 아름다운 기운을 가지길 바라면서.


구선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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