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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도 현장에 저를 데려갔던 엄마, 그 기억이 잊히지 않아 괴로워요"

입력
2022.11.07 04:30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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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정우열의 회복’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정우열 원장이 <한국일보>와 함께 진행하는 정신 상담 코너입니다

일러스트 =박구원 기자

일러스트 =박구원 기자

어린 시절의 엄마를 떠올리면 화가 잔뜩 나 있는 모습뿐입니다. 아빠와 이혼한 후 엄마는 거의 매일 술을 마시고, 소리를 지르고, 욕을 하고…. 저는 입에 담을 수도 없는 욕과 고함을 듣는 게 일상인 아이였습니다.

엄마는 이혼 후 생계를 혼자 책임져야 했어요. 저를 키우기 위해 밑바닥부터 시작해 악착같이 일하며 아둥바둥 살아야 했죠. 엄마는 심리적으로, 경제적으로 늘 힘들어했고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습니다. 엄마의 유일한 가족인 저는 어려서부터 그 히스테리를 받아내야 했습니다.

저와 엄마는 엄마가 운영하는 식당에서 살았어요. 일이 끝나면 엄마는 고작 초등학생인 저를 두고 나가서 술을 마셨습니다. 매일같이 엄마가 술에 취해 밖에 쓰러져 있는 모습을 봤어요. 혼자 있는 것이 무서워 전화라도 하면 돌아오는 것은 욕설과 술주정뿐이었죠.

엄마가 저만 바라보며 살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어요. 엄마는 저에게 학업적으로 큰 기대를 했고, 제가 본인 인생에서 유일한 성공작품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면서도 스트레스는 저에게 풀었죠. 별것 아닌 일에도 항상 목소리를 높이며 화를 냈고, 잘못한 일이 없어도 엄마가 때리면 그저 맞고, 꾸중을 들어야 했습니다. 아빠에 대한 욕을 입에 달고 살던 엄마는 제가 꾸지람에 말대답이라도 하면 "네 아빠한테 가서 살아라, 네 아빠랑 똑같다"며 몰아붙였습니다.

엄마에게 남자친구가 생긴 후에는 집에 그 남자친구가 왔어요. 중학생이었던 제가 불편한 기색이라도 비치면 오히려 저에게 "못됐다"며 화를 냈어요. 엄마가 남자친구와 집에서 싸울 때도 있었는데 그때마다 무서워 방에 틀어박혀 벌벌 떨었죠.

가까이에 살던 외할머니와 이모에게 하소연한 적도 있습니다. 그때마다 "네가 이해해라", "엄마가 얼마나 힘들겠니", "술이 유일한 낙이다"라는 말만 들었습니다. 제 주위엔 항상 엄마 이야기만 들어주는 사람들뿐이었죠. 제가 그런 말을 한 사실이 엄마 귀에 들어가는 날에는 어김없이 심한 욕설과 비난이 돌아왔어요.

성인이 되어서도 그 기억이 지워지지 않아 괴로웠습니다. 너무 힘들어 한의원을 찾아갔을 때 '홧병' 증세가 보인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날 엄마와 이야기를 했고, 그동안의 울분이 폭발하듯 터졌습니다. 제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엄마는 자기 잘못이라고 인정했고, 후회한다면서 저에게 사과를 했습니다. 본인도 저를 혼자 키워야해서 너무 힘들어서 그랬으니 이제 잊어달라고요.

엄마가 저를 위해 많은 걸 희생하며 살아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돈 걱정 없이 학업을 마칠 수 있었고, 엄마가 속으론 저를 사랑하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은 엄마와의 관계가 나쁘지 않고, 제 결혼 후에는 남편을 따뜻하게 대해주고, 경제적 지원도 아낌없이 해주셔서 고맙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린 시절의 기억이 올라올 때마다 괴로운 건 어쩔 수가 없어요. 그때마다 엄마에게 호소하면 "내가 무릎이라도 꿇어야 하냐"며 오히려 화를 냅니다. 그러면 엄마와 저는 싸울 수밖에 없어요.

저를 가장 괴롭히는 기억은 이혼 전 엄마가 외도 현장에 저를 데려간 일이에요. 결혼 생활이 파탄 나기 전에 엄마는 몇 번의 외도를 했고, 그때마다 항상 저를 데리고 나갔습니다. "오늘 이 아저씨 만난 거 아빠한테 이야기하면 엄마가 쫓겨난다"는 당부를 하면서요.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르면, 아직도 그걸 기억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또 한번 괴롭습니다. 이 이야기는 엄마한테 차마 하지 못했어요. 엄마는 제가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도 모를 겁니다.

최근 들어 과거 엄마와 내 모습이 더 자주 떠오릅니다. 엄마가 무섭게 욕하며 저를 때리는 모습, 집에서 엄마와 남자친구가 술 마시는 모습, 새벽에 혼자 식당에서 울면서 엄마를 기다리는 내 모습, 그리고 이혼 전 엄마가 외도하는 모습까지요. 그 기억들에 사로잡힐 때마다 하염없이 눈물이 나요. 어린 저에게 그런 기억을 심어준 엄마가 너무 밉고, 그런 기억을 떠올리는 스스로가 싫습니다.

엄마에게 따지고도 싶지만 엄마가 상처받을 걸 생각하니 망설여집니다. 인간적으로 엄마가 불쌍하고 안쓰러워서 그냥 다 묻어두고 싶다가도 과거 기억이 떠오르면 저는 다시 상처 받은 어린아이가 됩니다. 이 기억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요.

김해진(가명·30세·직장인)

해진씨, 오랜 시간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나를 낳아주고 나를 가장 많이 사랑해주어야 할 엄마에게 받은 상처, 그 상처를 아프고 고통스럽다고 말하지 못하고, 여전히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조차 어려워하는 당신을 보면서 마음이 너무나 아팠습니다.

보통 아이들은 부모가 자신을 바라봐주는 대로 자신을 바라봅니다. 부모의 무조건 적인 사랑과 보호가 있어야 아이는 비로소 인생의 주인공이 되어 스스로 느끼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성장'을 할 수 있지요. 성장 과정에서 부모의 사랑 대신 방임, 정서적 학대를 겪게 되면 기본적으로 자기 존재에 대한 수치심이 자리 잡게 됩니다. 자신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니 감정을 표현하고 스스로를 보살피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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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게도 해진씨의 엄마는 자신의 스트레스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자녀에게 극단적인 방법으로 전가했어요.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대상으로부터 예측불가한 히스테리를 반복적으로 겪으면서 해진씨는 일종의 '복합 트라우마' 상황에 놓이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복합 트라우마는 생존의 위협에 압도돼 생기는 일반적 트라우마와 달리 양육자로부터 광범위하고 지속적인 신체적, 정서적 학대를 경험할 때 생깁니다. 특히, 해진씨 경험처럼 침묵하지 않으면 큰일이 날 것이라는 위협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면 강화됩니다.

해진씨가 받은 학대는 어린아이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었고, 어떤 부모라도 해선 안 되는 행동이었어요. 현재의 엄마 모습과 별개로 여전히 당신의 마음속에 적개심과 미움이 남아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성적으로 엄마의 처지를 이해해도 마음 깊은 구석에서는 본능적으로 그런 감정이 들지요. 반복적인 트라우마로부터 만들어진 모호한 감정을 오랜 기간 외면하고 지내다 보니 성인이 돼서도 그것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잊어버려야 할지, 표현해야 할지를 결정하지 못해 혼란을 느끼는 겁니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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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말씀드리고 싶은 건 해진씨가 겪은 감정적 트라우마는 엄마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용서를 구한다고 해서, 혹은 해진씨 스스로 기억을 잊는다고 해서 해결되는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어차피 과거가 떠오른다면 억압하고 외면하기보다 오히려 그때의 기억과 감정을 온전히 마주하고 지금이라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괴로워서 피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괴롭게 마주해야만 치유할 수 있는 것이 트라우마입니다. 억눌린 감정을 해소하지 않으면 당장은 넘어가도 앞으로 경험하는 다른 인간 관계에서, 혹은 양육 과정에서 끊임없이 반복될 수밖에 없어요.

핵심은 엄마와의 관계 회복이 아니라 진솔한 감정의 회복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어요. 어린 시절 상처 받은 자신의 모습을 직면하고, 그 감정을 말로 표현하는 것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누구든지 어린아이에게 그렇게 하면 안 되는 일이었고, 나를 무조건 보호하고 사랑해야 할 엄마는 절대로 해선 안 되는 행동이었다고, 그 일로 나는 굉장히 고통스럽고 힘들었다는 걸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이 상처를 회복하는 첫걸음이 될 거예요.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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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합 트라우마의 흔한 증상은 정서적 무감각으로 현재의 대인관계에서 애정, 친밀감 등의 긍정적 감정조차 충분히 느끼기 힘듭니다. 고통으로부터 나를 지키기 위해 감정의 통로를 닫은 것이죠. 반면, 진한 감정이 느껴지는 과거의 일을 떠올릴 때에만 관련된 감정을 경험하고, 비로소 살아 있는 느낌을 받아 고통스러우면서도 강박적으로 과거에 집착하게 됩니다. 그래서 과거뿐 아니라 현재 삶에서 느껴지는 다양한 감정도 자연스럽게 표현함으로써 감정의 통로를 회복해야 합니다.

전제는 안전하고 편안한 분위기와 믿을 만한 상대입니다. 전문가에게 꾸준히 상담을 받는 것을 추천하지만 여의치 않다면 해진씨가 신뢰하는 가족이나 지인과 시작해도 좋습니다. 또한 실제 트라우마 치료에서도 많이 사용하는 감정일기도 추천합니다. 해진씨 스스로 사연을 글로 쓰면서 감정을 꺼내 보인 것 역시 큰 용기였고, 좋은 시작이었습니다. 말과 글로 표현한다고 마음의 괴로움이 드라마틱하게 해결되지는 않겠지만 내면의 감정이 조금씩 해소되면서 어느날 불쑥 부정적 감정이 몰아치는 횟수와 강도가 점차 줄게 됩니다.

회복의 길은 엄마와의 관계를 위해서가 아니라 오롯이 해진씨 자신을 위해서 가야합니다. 자기만의 진솔한 감정이 회복되는 해진씨가 되길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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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손효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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