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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잡 시위 한 달, '이란의 봄' 오나... 교도소에서도 "독재자 죽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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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잡 시위 한 달, '이란의 봄' 오나... 교도소에서도 "독재자 죽어라"

입력
2022.10.16 20:30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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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범 수감 테헤란 교도소서 소요 사태
반정부 시위 한 달… 남성·노동자도 가세
여성·자유 넘어 '이슬람공화국 종식' 요구

지난달 19일 이란 수도 테헤란에서 마흐사 아미니의 의문사 진상 규명과 히잡 강제 착용에 항의하는 여성이 히잡을 불태우고 있다. 마시 알리네자드 트위터

지난달 19일 이란 수도 테헤란에서 마흐사 아미니의 의문사 진상 규명과 히잡 강제 착용에 항의하는 여성이 히잡을 불태우고 있다. 마시 알리네자드 트위터

이란 소녀들이 히잡을 벗어던졌다. 히잡 안에 늘 꽁꽁 감춰야 했던 머리카락도 숭덩 잘라내 버렸다. 도시마다, 마을마다, 거리마다 “여성, 생명, 자유”를 갈망하는 외침이 울려 퍼졌다. 히잡을 제대로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경찰에 끌려갔다가 의문사한 22세 여성 ‘마흐사 아미니 사건’으로 촉발된 이란 반정부 시위가 17일(현지시간)로 한 달을 맞는다.

히잡은 작은 불씨였을 뿐, 억눌렸던 분노가 삽시간에 거센 불꽃으로 타올랐다. 10~20대 남성들도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국가 경제를 떠받치는 석유부문 노동자들은 파업으로 동조했다. 어느새 구호는 “독재자에게 죽음을”으로 바뀌어 있었다.

사회 통제가 엄격한 이란에서 시위가 한 달간 계속된 것은 전례 없는 일이다. 시위 주축이 10~20대 젊은 여성이고, 성별과 나이를 불문하고 광범위한 지지를 받는다는 점에서 혁명적이다.

정치범 교도소에서도 “반독재” 구호

15일 화재가 발생한 이란 수도 테헤란 북쪽에 위치한 에빈교도소 앞에 반정부 시위대가 몰려와 있다. 인근 주민들은 교도소 안에서 "독재자에게 죽음을"이라는 구호가 울려 퍼졌다고 전했다. 지난달 히잡을 제대로 착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경찰에 끌려갔다가 의문사한 22세 여성 마흐사 아미니 사건 이후로 이란에선 한 달째 반정부 시위가 열리고 있다. 테헤란=AFP 연합뉴스

15일 화재가 발생한 이란 수도 테헤란 북쪽에 위치한 에빈교도소 앞에 반정부 시위대가 몰려와 있다. 인근 주민들은 교도소 안에서 "독재자에게 죽음을"이라는 구호가 울려 퍼졌다고 전했다. 지난달 히잡을 제대로 착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경찰에 끌려갔다가 의문사한 22세 여성 마흐사 아미니 사건 이후로 이란에선 한 달째 반정부 시위가 열리고 있다. 테헤란=AFP 연합뉴스

15일 고문과 인권 유린으로 악명 높은 수도 테헤란 에빈교도소에서 의문의 화재가 발생했다. 야당 정치인, 언론인, 인권운동가, 보안 관련 혐의를 받는 외국인 등 정치범들이 수감된 곳이다. 미국 뉴욕타임스(NYT)와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이란 국영통신에서 교도소 화재가 진압됐다는 보도가 나온 이후에도 대규모 폭발음이 수차례 들렸고, 기관총을 쏘는 듯한 총성까지 빗발쳤다.

이란 사법당국은 “죄수들의 다툼으로 교도소 작업장에서 불이 났다”며 반정부 시위 연관성을 부인했으나, 목격담은 전혀 다르다. 인근 주민들은 “교도소 창문 밖으로 수감자들이 ‘독재자에게 죽음을’을 외치고 있다”고 전했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는 보안군과 특수부대가 투입됐다는 증언이 잇따랐다.

에빈교도소에는 이번 시위로 체포된 사람도 수백 명 구금돼 있다. 교도소 밖에도 시위대가 몰려들었고, SNS에는 현장 영상과 함께 '폭발물' '탈출 시도' '외부 침투' 등을 언급하는 게시물이 올라왔다. 지역 주민인 한 대학생은 “주택들이 재와 연기, 최루가스로 뒤덮였다”며 “전쟁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제2, 제3의 아미니들… “이란의 미래 바꾼다”

지난달부터 시작된 '히잡 의문사' 시위가 3주차를 맞은 7일 이란의 수도 테헤란의 한 공원에 있는 분수가 붉게 물들어 있다. 이 사진을 촬영해 트위터에 올린 한 활동가는 이 분수를 '피로 물든 테헤란'이라는 예술작품으로 묘사했다. 테헤란=AFP 연합뉴스

지난달부터 시작된 '히잡 의문사' 시위가 3주차를 맞은 7일 이란의 수도 테헤란의 한 공원에 있는 분수가 붉게 물들어 있다. 이 사진을 촬영해 트위터에 올린 한 활동가는 이 분수를 '피로 물든 테헤란'이라는 예술작품으로 묘사했다. 테헤란=AFP 연합뉴스

이란 정부는 시위대를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있다. 기자들은 잡혀갔고, 인터넷과 전화 연결도 잘 되지 않는다. 이란 사법부는 15일 통신사들에 문자메시지 서비스 금지명령까지 내렸다. 시위대를 국제 연대로부터 고립시키려는 의도다. 이란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는 “미국과 이스라엘이 선동한 폭동”이라고 강변했다.

첫 사망자인 아미니의 고향이자 쿠르드족이 밀집한 쿠르디스탄주(州), 발루치족과 아랍계 소수민족이 다수 거주하는 시스탄-바-발루치스탄주와 후제스탄주 등에서는 경찰이 무차별 총격을 가하는 일이 빈발하고 있다. 12일 테헤란에선 경찰이 시위 참가 여성의 머리채를 잡아 끌고 가면서 성추행하는 장면도 영상에 찍혔다.

아미니 이후에도 수많은 사람이 죽고 다쳤다. 이란 인권운동가 통신(HRANA)에 따르면 한 달간 미성년자 32명을 포함해 240명이 숨졌고, 8,000명 이상 체포됐다. 시위는 111개 도시, 73개 대학에서 열린 것으로 집계됐다. 16세 고등학생 니카 샤카라미와 사리나 에스마일자데 등 시위에 동참했다가 의문사한 또 다른 소녀들은 ‘제2, 제3의 아미니’로 다시 태어났다. NYT는 “여성이 주도하는 시위는 이란의 미래 비전을 제시하는 상징이 됐다”고 평했다.

경제적 좌절감이 분노로… “신정 체제 끝장내자!”

이란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가 12일 테헤란에서 열린 국정조정위원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그는 지난달부터 지속되는 '히잡 의문사' 항의 시위를 이란의 적이 기획한 '폭동'으로 규정했다. 이란 최고지도자실 제공

이란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가 12일 테헤란에서 열린 국정조정위원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그는 지난달부터 지속되는 '히잡 의문사' 항의 시위를 이란의 적이 기획한 '폭동'으로 규정했다. 이란 최고지도자실 제공

시위는 이제 자유와 여성 인권 존중을 넘어 ‘이슬람공화국 정권 종식’ 요구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강력한 신정 체제와 신권적 리더십에 본격적으로 반기를 든 것이다. 그 기저에는 최악의 경제난이 자리 잡고 있다.

서방의 경제 제재로 이란에선 지난 10년간 상품 및 서비스 비용이 1,135% 올랐다. 닭고기 가격은 20배, 식용유는 40배 각각 상승했다. 5년간 이란 통화인 리알의 가치는 90% 폭락했고, 빈곤층은 20%에서 30%로 늘었다. 지난해 취임한 에브라힘 라이시 이란 대통령은 제재 해제에 필수인 이란 핵합의 복원에도 미온적이라 젊은 세대는 더 절망했다.

특히 여성의 사회·경제적 지위는 더욱 나빠졌다. 강경 보수 정권이 여성의 가정 내 역할을 강조하면서 지난 4년간 여성 취업자 수는 5분의 1로 줄었다. 여성 대졸자 실업률도 22.3%로 남성보다 2배나 높다.

사남 바킬 영국 왕립국제문제연구소 선임연구원은 “이란 청년들은 국제 제재와 함께 정권의 경제 실정에 대해 책임을 묻고 있다”며 “경제적 정의나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다는 좌절감이 광범위한 분노를 몰고 왔다”고 분석했다. 수잰 멀로니 미국 브루킹스연구소 외교정책 담당 부국장은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사회운동은 더 성장할 것이고 지속될 수 있는 힘이 있다”며 “이란이 전환점을 맞았다”고 평했다.

김표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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