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형 진술분석 방식 첫 개발한 최규환 경위
진술 엇갈리는 성폭력 진실 잇따라 규명 성과
"입증 두려워하지 말고 피해자 적극 용기 내야"
고교생 A(18)양은 지난해 1월 마을이장 B씨를 고소했다. 9세와 14세 때 B씨가 속옷에 손을 집어넣고 입술을 갖다 대는 등 강제추행을 했다며 “이제라도 죗값을 묻고 싶다”고 했다. 수사는 쉽지 않았다. 13세 미만 미성년자 강제추행죄는 공소시효가 없지만 1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 폐쇄회로(CC)TV나 목격자 등 핵심 증거가 없었기 때문이다. 경찰은 고민 끝에 ‘한국형 진술 분석 기법(K-SCAM)’의 권위자인 충남경찰청 프로파일러 최규환 경위에게 사건을 의뢰했다.
최 경위는 “피의자 진술이 부자연스러워 신빙성이 낮다”고 결론 내렸고, 수사팀은 A양 진술을 근거 삼아 B씨를 검찰에 송치했다. 법원은 그 해 11월 B씨에게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했다. 최 경위의 ‘진술평가결과 보고서’를 주요 증거로 받아들인 것이다.
K-SCAM이 성범죄 사건 해결에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독일의 준거기반 내용분석(CBCA), 이스라엘의 과학적 진술 분석 기법(SCAN) 등 선진 수사 방식을 우리 실정에 맞게 변형한, ‘한국형 진술 분석’ 기법으로 최 경위가 2020년 1월 개발했다.
K-SCAM의 효용성은 수치로 드러난다. 2020년부터 올 3월까지 K-SCAM을 실시한 65건 중 63건이 실제 수사 결과와 일치했다. 또 증거가 불분명한 성범죄 사건 가운데 ‘피의자 진술이 거짓’이라는 K-SCAM 분석 결과를 토대로 경찰이 검찰에 송치한 43건 중 2건을 제외한 41건이 기소됐다.
이 기법의 특징은 피해자와 피의자 진술을 버무려 교차 검증하는 데 있다. 가ㆍ피해자 진술을 따로 평가하는 기존 분석법과 차별되는 부분이다. 또 상황별로 진술의 일관성, 논리적 통일성, 태도ㆍ행동의 조화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한다.
K-SCAM 분석이 빛을 발한 대표 사례가 2년 전 충남에서 일어난 성폭행 사건이다. 피해 여성은 식당에서 같이 술을 마시던 남성에게 강간을 당했다. 가해자는 “피해자가 콘돔까지 줬다”며 합의된 성관계임을 주장했으나 경찰의 판단은 달랐다. 목이 졸리는 등 생명을 위협받는 상황에서 죽음보다 성폭행을 택한 행동, 혹시 모를 임신이 우려돼 콘돔을 제공한 행위 등을 ‘동의’가 아닌 ‘비자발적 승낙’으로 봤다.
최 경위는 “피해자 진술은 상황 묘사가 풍부하고 무엇보다 일관성이 있는 반면, 피의자 해명은 앞뒤가 불일치하는 지점이 많았다”고 설명했다. 가해자는 지난해 8월 1심에서 징역 3년형을 받았다. K-SCAM 분석을 통해 성범죄 유죄 판결을 이끌어낸 경험이 있는 충남 서산경찰서 강인아 수사관은 “사건이 진실게임 양상으로 흐르지 않도록 해 명확한 판단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K-SCAM은 지난달 경찰청이 주최한 ‘제10회 과학수사 아이디어 공모전’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장비가 아닌 수사기법만으로 법심리 분야(프로파일링, 폴리그래프, 법최면)가 수상한 첫 사례다.
물론 과제도 적지 않다. K-SCAM을 활용할 수 있는 프로파일러가 국내에 40여 명에 불과하고, 아직 널리 알려지지 않아 서울, 경기, 충남 등 일부 지방경찰청에만 도입됐다. 경찰 수사관이라면 누구나 K-SCAM을 이용해 진술 분석이 가능하도록 교육하는 것이 최 경위의 목표다. 그는 “‘내 증언이 입증될 수 있을까’ 하는 걱정 때문에 성범죄 피해 신고를 주저했던 이들도 적극 용기를 내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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