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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돈 빌미로 모욕하는 엄마와 엄마 애인..."그들에 의지하는 게 너무 고통"

입력
2022.10.10 04:30
수정
2022.11.04 10:28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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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정우열의 회복’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정우열 원장이 <한국일보>와 함께 진행하는 정신 상담 코너입니다.

일러스트=박구원 기자

일러스트=박구원 기자

저는 이십대 중반의 성인이지만 같이 살고 있는 엄마에게 휘둘리며 살고 있습니다. 엄마는 아빠와 이혼하고 애인을 만났어요. 아직 취업을 하지 못한 저는 엄마와 제가 '아저씨'라 부르는 엄마의 애인과 살면서 경제적인 지원을 받고 있습니다. 용돈을 빌미로 두 사람은 저의 모든 것을 간섭하고 자신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요구합니다. 화가 나지만 어느 순간 두 사람의 명령과 말도 안 되는 요구에 따르고 있는 저 자신에게 자괴감이 듭니다. 당장 독립할 수 없는 상태에서 그들에게 의지해 살아야 하는 게 너무나 괴롭고 힘이 들어요.

엄마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만나 저를 낳았습니다. 아빠는 엄마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났지만 경제적인 능력이 없어서 빚에 시달렸죠. 경제적인 문제로 부부 사이가 늘 좋지 않았고, 싸울 때면 자주 폭력적으로 돌변했습니다. 엄마는 아빠에게 모욕적인 말을 서슴지 않았고, 평소에 자상하던 아빠도 술을 마시면 180도 돌변해 어머니를 때리고 물건을 던지곤 했습니다.

부부 갈등이 심각해서인지 엄마는 학창시절 저에게도 늘 예민하고 날카로운 반응을 보이셨습니다. 저는 좋은 성적을 유지하는 모범생이었지만 성적표가 나오는 날만 칭찬하고 평소엔 차갑게 대하셨어요. 오히려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면서 위로해주지 않는 저를 가리켜 '아버지의 더러운 피를 물려받아 냉정하다'고 비난하셨죠.

어머니는 평소에도 감정 기복이 심했고, 그 때문에 저는 항상 두렵고 불안했습니다. 성인이 됐을 때도 별반 다르지 않아요. 집에 온 손님에게 인사를 크게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저를 끌고 밖으로 나가 길에 세워두고 지나가는 자동차를 향해 90도로 인사를 하며 "어서 오십시오", "안녕히 가십시오"를 외치게 했습니다. 당시 엄마로부터 체벌도 당해 두려움이 컸던 저는 행인들이 다 보는 앞에서 자동차에 대고 인사를 했습니다. 그때의 수치심과 좌절감은 평생 잊지 못할 겁니다. 지금도 엄마는 취업을 못했다는 이유로 다른 집 자식들과 비교하며 모욕감을 줍니다. 하지만 저 없으면 어머니는 아무것도 못 하실 분입니다. 홈쇼핑 주문, 인터넷 검색, 계좌이체 등 잡다한 일들을 모두 저에게 시킵니다.

엄마는 애인을 만났고 지금은 그에게 전적으로 의지합니다. 저에게는 한 번도 차려준 적 없는 육첩 반상을 새벽부터 정성스럽게 만들고, 저를 깨워 배달하라고 합니다. 아저씨와 싸울 때면 사과도 대신 하게 합니다. 제 의사와 상관없이 그 둘 사이의 연애 과정을 지켜 보게 하고, 메시지를 전달하는 중간 전달책 역할을 시킵니다. 여행을 갈 때도 저를 데려가서 여행계획을 짜거나 호텔 비행기를 예약, 통역 같은 일을 시켜요. 싫다고 하면 아저씨에게 받은 용돈을 생각하라고 협박합니다. 30만 원 용돈을 받으며 취업 준비 중인 저에게 거절이라는 선택지는 없습니다.

아저씨는 돈으로 사람의 호의를 사는 것을 좋아하고 그것이 통하지 않을 때 분노합니다. 아저씨가 엄마와 다투다 때린 것을 알았을 때 화가 난 저는 아저씨의 연락처를 차단했습니다. 두 사람은 화해한 뒤 아저씨는 제가 자신을 기만했다며 온갖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두렵고 억울해서 울며 호소했지만 엄마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습니다. 집을 마음대로 들락날락하는 아저씨가 언젠가 집에 들어와 제 속옷 빨랫감을 보면서 '지금 아무것도 안 입고 있는 거냐' 식의 성희롱을 했을 때도 아무렇지 않은 듯 웃으면서 넘겼어요.

엄마, 아저씨 사이에 끼여 살면서 반복적으로 불안과 갈등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처음엔 마냥 싫고 화가 났지만 점점 학대당하고 있다는 느낌까지 들었고, 이제는 벗어나고 싶습니다. 집을 나가자니 어머니와 크게 싸우게 될 것이라 다짐이 쉽지 않고, 취업 준비 중이라 경제적으로 독립하는 것도 막막합니다. 이대로 엄마와 살면 엄마도 아저씨도 저를 가만 두지 않을 것 같아 두렵습니다. 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최지연(가명)·25세·취업준비생

지연씨, 오랜 시간 얼마나 불안하고 외로웠을까요.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그런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그 감정을 선명하게 느낄 겨를조차 없었을 것 같습니다. 이제는 벗어나고 싶다는 얘기를 듣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지연씨가 직접 선택해서 겪은 일은 하나도 없으니까요.

지연씨는 자기개념이 부정적으로 형성되고 오랫동안 무력감을 느낀 것으로 보입니다. 지연씨는 그 자체로 소중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성장 과정에서 그런 사실을 충분히 경험하지도 배우지도 못했던 것 같습니다. 부모의 반복된 갈등상황이 지연씨를 늘 불안하게 했을 거예요. 가정폭력에 아동을 노출시키는 것은 아동학대에 해당합니다. 어머니는 지연씨를 정서적으로 방치했습니다. 아버지도 무책임했구요. 아쉽게도, 지연씨는 성숙한 부모와 어른이 없는 상태에서 자란 것 같습니다.

지연씨의 어머니는 불안이 높고 충동적이며 의존적인 사람인 것 같아요. 힘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무조건 맞춰 주고 자세를 낮추죠. 문제는 그게 지연씨가 아닌 어머니의 두려움이자 기준이라는 겁니다. 어머니는 애인을 살피면서도 지연씨의 마음은 신경 쓰지 않아요. 오히려 지연씨를 이용해 애인과의 갈등을 해결하려 하죠.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연씨는 그 상황을 참고 감당하며 어머니를 떠나지 못합니다. 그렇게 고통스러우면서도 왜 어머니 곁을 떠나지 못하고 오히려 어머니를 지나치게 신경 쓰고 있을까요? 아이는 생존하기 위해 부모에게 의지하고 애착 행동을 합니다. 부모가 거절하면 아이는 절망하고 부모에게 다가가지 않습니다. 겉으론 오히려 더 독립적인 사람처럼 보이죠. 하지만 내면의 결핍은 그대로고 무의식 중에 그것을 채우려고 하기 때문에 성인이 되어서도 심리적 거리를 두지 못합니다. 서로 필요한 존재라고 합리화를 하게 되는 것이죠. 어머니의 뒤치다꺼리를 하면서 무의식적으로는 스스로 위안을 삼기도 했을 거예요.

어머니 입장에서 지연씨는 막 대해도 떠나지 않는 만만한 대상이자 주변 사람 중 가장 약자입니다. 어머니는 그런 지연씨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힘을 휘두르고 착취하면서 자시 자신의 결핍을 채우려는 것 같아요. '나르시시스트' 성향을 보이는 어머니의 애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냉정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지연씨는 어머니, 어머니의 애인으로부터 멀어져야 합니다.

어머니와 관계를 단절하고 원수처럼 지내라는 얘기가 아니에요. 성인이 된 지연씨의 마음이 충분히 단단하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에 지금부터 힘을 키워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지연씨 내면에서 무엇이 독립을 가로막고 있는지 고민해보고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머니와 어머니의 애인이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같은 문제가 반복될 수밖에 없습니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막상 어머니와 거리를 두려고 하면 내 편이 더 이상 없을 것이라는 느낌 때문에 두려울 거예요. 이미 어머니는 내 편이 아닌 것 같은데도요. 어머니도 애인도 지연씨를 놔주려 하지도 않고 비난도 할 겁니다. 그것은 결코 지연씨가 잘못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지연씨가 앞으로 인생에서 자기 자신으로 행복하게 살기 위해 선택하는 삶의 방식을 비난할 사람은 없으니까요. 어머니와 아저씨를 벗어나 어떻게 살지 막막할 수 있습니다. 지연씨는 성인임에도 불구하고 거절의 선택지가 없다고 생각할 정도로 의존적으로 보입니다. 지연씨의 잘못이 아니라 그렇게 길들여졌기 때문이죠.

심리적으로 독립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아가 견고해야 합니다. 저의 조언은 우선 자기의 마음에 집중하라는 겁니다. 소소한 상황에서부터 솔직한 자신의 상태, 감정, 생각에 집중하는 것이 견고한 자아를 형성하는 시작입니다. 아쉽게도 지연씨는, 인생을 살면서 자연스럽게 경험하는 감정을 충분히 느끼고 공감받은 적이 별로 없었을 것 같아요.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곰곰이 생각해보면 분명 지연씨도 호불호가 있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이 있을 겁니다. 그 어느 누구도 지연씨 대신 느낄 수도, 판단할 수도 없습니다. 주체적인 인생 경험을 쌓아가기 위해서는 두렵더라도 자기 감정과 생각을 100% 믿어야 해요. 그런 경험이 별로 없어서 익숙하지 않다면, 매일 감정일기를 쓰며 내 마음에 집중해보는 연습을 추천드립니다. 어떤 이야기를 쓰게 되더라도 그런 자신을 판단하지 마세요. 지연씨 입장에서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지연씨는 어머니에게 지나치게 책임감과 미안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것은 진짜 감정이라기보다는, 오랫동안 나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세력에 반발하고 싶은 심리적 갈등을 복종이라는 방식으로 해결하는 미숙한 방어기제에 익숙해졌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에게서 심리적 거리를 두고, 의견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것에 조금이라도 죄책감을 갖지 않았으면 합니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인격체로 살아갈 지연씨의 미래를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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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손효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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