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흥민 김민재 이강인 황희찬 등 유럽파 선수들이 완전체로 경기하는 모습을 국내에서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설렜습니다."
직장인 이상준(36·가명)씨는 23일 오후 8시 경기 고양종합운동장에서 열린 대한민국 축구대표팀과 코스타리카의 A매치 평가전을 '직관'했다. 유럽파 선수들이 포함된 완전체로 경기를 치르는 건 꽤 오랜만이다. 특히 최근 스페인리그 라리가에서 물오른 경기력으로 재평가 되고 있는 이강인(마요르카·21)과 현재 이탈리아 세리에A 1위팀을 이끄는 김민재(나폴리·26)가 오랜만에 '벤투호'에 합류해 기대감은 하늘을 찔렀다. 물론 아쉽게도 이강인은 이날 경기에 나오지 않았지만. 이씨는 28일 서울 마포구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리는 카메룬과의 평가전 티켓도 예매했다. A매치 평가전 2연전이 모두 안방에서 진행돼 국내 축구팬들의 눈이 즐거울 전망이다.
그럼에도 어쩐 일인지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국내에서만 A매치 평가전을 가져 코앞으로 다가온 2022 카타르월드컵에서 성과를 올릴 수 있을지 의문이 남아서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6월 펼쳐진 4개의 A매치 평가전(브라질, 칠레, 파라과이, 이집트)조차 모두 안방에서 열렸다. 심지어 카타르월드컵 본선에 진출한 32개국 중 '9월 A매치 평가전'을 국내에서만 치르는 국가는 한국이 유일하다고 한다.
게다가 우리 대표팀은 오는 11월초 출정식을 겸한 A매치 마지막 평가전을 가질 예정인데, 이 역시도 국내에서 진행할 가능성이 높다. 무슨 이유가 있는 것일까.
"국내 평가전도 자신감 얻을 수 있어" VS "해외서 해야 대표팀에 더 도움"
잉글랜드 프로축구 프리미어리그(EPL)에서 활약 중인 황희찬은 이번 월드컵을 위한 A매치 평가전이 국내에서만 열린 것에 대해 "문제될 건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그의 발언은 박문성 축구해설위원이 운영하는 유튜브채널에서 공개됐다. 박문성 위원은 지난 19일 대표팀의 새 유니폼을 공개하는 자리에서 진행자로 나섰는데, 이날 황희찬이 모델로 참석하면서 만나게 됐다. 박 위원은 대기실에서 "요새 화두가 되는 게 '왜 유럽에서 (A매치) 안 하고 여기(국내)에서 하느냐'는 것이다"며 황희찬에게 질문했다.
황희찬은 이에 자신의 소신을 밝혔다. 그는 "솔직히 얘기하면 어웨이(해외) 분위기를 익힐 수 있지만 여기서 얻는 것도 충분히 있다"며 "해외로 나가거나 여기서 있을 때도 좋고 안 좋은 점이 똑같이 있다. 한국에서 잘했을 때도 선수들이 자신감을 얻을 수 있다"고 국내 평가전을 긍정적으로 봤다.
하지만 황희찬이 유럽에서 활동하는 선수라는 점에서 해석이 다를 수 있다. 국내 파 선수들에겐 해외 경험이 더 중요할 수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월드컵에서 좋은 성과를 올리려면 현지 적응력을 키우는 게 급선무이기 때문. 2018 러시아월드컵 당시 대표팀은 본선 첫 경기 한 달 전 오스트리아에 입성해 캠프를 차렸다. 이곳에서 두 번의 A매치 평가전을 치르며 폼을 최대한 끌어올렸다.
게다가 월드컵에 진출한 거의 대부분 국가가 9월 A매치 평가전을 유럽에서 치른다. 우리와 함께 H조에 편성된 국가들을 보면 우루과이와 가나는 모두 유럽에서, 현재 유럽축구연맹(UEFA) 네이션스리그 중인 포르투갈도 홈 앤드 어웨이 방식으로 경기를 치른다.
우루과이는 24일 오스트리아에서 이란과, 28일 슬로바키아에서 캐나다와 평가전을 한다. 가나도 24일 브라질, 28일 니카라과와의 경기를 각각 프랑스, 스페인에서 연다. 포르투갈은 UEFA 네이션스리그 일정 탓에 25일 체코, 28일 스페인과의 경기를 각각 체코와 포르투갈에서 갖는다.
일본도 독일 뒤셀도르프에서 평가전 2연전을 치른다. 23일에는 미국, 27일엔 에콰도르와 경기가 있다. 이란도 오스트리아에서 24일 우루과이, 27일 세네갈과 각각 경기가 예정돼 있다. 우리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우리 대표팀이 "역행하고 있다"는 우려도 있다. 실제로 유럽파가 포함된 완전체로 해외 평가전을 치른 건 2020년 11월 오스트리아에서 가진 평가전(멕시코, 카타르)이 마지막이었다. 이후 6월 A매치 4경기와 9월 A매치 2경기 모두 안방에서 진행했다.
그렇다고 경쟁력 있는 국가와의 평가전도 아니었다. 6월과 9월 A매치 평가전에서 브라질을 제외하면 국제축구연맹(FIFA) 순위가 우리보다 낮은 국가들이 대부분이었다. 2002년 한일월드컵 당시 히딩크 감독은 본선 경기를 한 달 앞두고 스코틀랜드, 잉글랜드, 프랑스 등 일부러 어려운 상대를 골라 실전 감각을 키웠다. 그래서 20년 전 평가전 전략에 비해 퇴보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대표팀의 수장도 이러한 우려에 대해 입장을 밝혔다. 파울루 벤투 대표팀 감독은 지난 13일 9월 A매치 평가전 명단 발표 기자회견에서 "유럽에서 경기가 가능한 팀을 찾는 것이 쉽지 않았다"며 "대한축구협회와 모든 것을 논의하고 있다. 9월 친선전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모든 걸 저희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축구협회의 국내 평가전...수익 창출? 국내파 선수 배려?
"많은 분들이 와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파이팅!"
그리스에서 뛰고 있는 황인범은 23일 코스타리카와의 평가전 좌석 티켓이 매진됐다는 소식에 이같이 말했다. 대한축구협회는 유튜브채널을 통해 황인범과 이재성(마인츠·30)에게 이날 경기장 티켓이 매진됐다고 알렸고, 두 사람은 축구팬들에게 감사의 메시지를 전했다.
그러나 국내 평가전에 아쉬움의 목소리가 나오는 상황에서 축구협회의 행에 눈길이 쏠리고 있다. 손흥민과 김민재, 이강인, 황희찬 등 유럽파 선수들이 총출동하는 9월 A매치 일정을 자칫 돈벌이로 여기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한 누리꾼은 "축구협회가 평가전을 돈벌이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국내를 고집해선 안 된다"고 꼬집었고, 다른 누리꾼은 "유럽파를 등장시킨 홈에서 만원 관중의 응원을 받으며 A매치를 하는 건 본선과 분위기가 다르니 오히려 마이너스"라고 비판했다.
전문가들도 쓴소리를 이어갔다. 서형욱 축구해설위원은 자신이 운영하는 유튜브채널에서 축구협회가 국내 평가전을 고집하는 이유에 대해 "입장 수익, 스폰서, 중계권료 수익 등을 통해 협회의 재정난을 완화시키기 위한 것 아닌가"라고 지적했다. 만약 유럽에서 평가전을 가질 경우 한국에선 새벽 시간에 중계하게 될 텐데, 이렇게 되면 시청률을 보장할 수 없고 이에 따른 광고 수익도 적자를 볼 게 뻔하다는 것이다.
특히 11월초에 마지막 A매치 평가전조차 국내에서 예정돼 있기 때문에 이런 주장에 힘이 실리고 있다. 비록 FIFA가 월드컵 본선 대회 일주일 전까지 리그 진행을 보장해 유럽파 소집이 불가능해도, 월드컵 전 마지막 평가전이라는 상징성 때문에 관중 몰이에 성공할 수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다른 국가들은 우리와 다른 행보를 보인다. H조에 편성된 국가들 중 가나는 11월 18일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에서 스위스와 마지막 평가전을 갖는다. 일본도 17일 UAE 두바이에서 캐나다와 평가전이 예정됐다. 카타르와 같은 중동지역인 UAE에서 막바지 담금질을 하는 셈이다.
일각에선 국내 평가전이 국내파 선수들을 위한 배려라는 해석도 있다. 이번에 처음으로 11~12월 월드컵이 개최되기 때문에 K리그도 2월에 개막하는 일이 벌어졌다. 국내파 선수들은 K리그, 대한축구협회(FA)컵, A매치 등에 이어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까지 빡빡한 일정을 소화했다.
국내파도 올해 일정이 고되다는 입장을 보였다. 대표팀 수비수인 김진수(전북현대·30)는 지난달 29일 포항 스틸러스와의 K리그 경기를 마치고 "올해 일정이 아쉽다"고 말할 정도였다. 김진수는 지난달 일본에서 열린 AFC 챔피언스리그에서 전북이 준결승까지 진출해 세 경기를 치렀다. 모든 경기를 연장전으로 소화, 체력적인 문제가 발생했다. 그럼에도 곧바로 K리그 경기에 나선 것이다. 김진수는 "모든 K리그 선수들이 힘든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며 "이런 상황에서 월드컵에 가서 100%를 발휘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근래 많이 든다"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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