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명복을 빈대 ㅋㅋ" '심심한 사과'가 드러낸 불신의 시대

알림

"명복을 빈대 ㅋㅋ" '심심한 사과'가 드러낸 불신의 시대

입력
2022.09.12 12:50
수정
2022.09.12 15:31
22면
0 0

['오독'은 왜 사회적 쟁점이 됐나]
'명징' '금일' 거쳐 '심심한 사과' 논란으로
세대간 충돌, 문해력 문제 만은 아냐
팬데믹·필터버블로 불신과 배타성 커져
다양성의 붕괴... "사회 교육에서 가장 필요한 화두"
"내가 덜 보는 것 추천 알고리즘도 필요"

"나는요, 완전히 붕괴됐어요." 영화 '헤어질 결심'에서 한국어에 서툰 중국인 서래(탕웨이)는 형사 해준(박해일)이 한 이 말을 듣고 휴대폰으로 '붕괴'란 뜻을 찾아본다. 인터넷 국어사전을 통해 상대의 말뜻을 제대로 이해해 진심을 확인하려는 외국인의 간절함이다. 스크린 밖 현실은 영화와 영 딴판이다. '심심(甚深)한 사과'를 두고 오독 논란이 불거져 세대 갈등으로 비화했다. CJ ENM 제공

"나는요, 완전히 붕괴됐어요." 영화 '헤어질 결심'에서 한국어에 서툰 중국인 서래(탕웨이)는 형사 해준(박해일)이 한 이 말을 듣고 휴대폰으로 '붕괴'란 뜻을 찾아본다. 인터넷 국어사전을 통해 상대의 말뜻을 제대로 이해해 진심을 확인하려는 외국인의 간절함이다. 스크린 밖 현실은 영화와 영 딴판이다. '심심(甚深)한 사과'를 두고 오독 논란이 불거져 세대 갈등으로 비화했다. CJ ENM 제공

1,00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에 출연한 A씨는 지난 5월 동료 배우 사망 소식을 접하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렸던 추모글을 지웠다. '명복(冥福)을 빈다'고 쓴 글이 '명복을 빈대 x웃겨 ㅋㅋ'란 댓글이 달린 채 온라인에 퍼지고 있는 걸 알고 난 뒤였다. 저승에서 복을 받아 사후세계에서 평안하길 바라는 마음에 쓴 명복의 뜻을 일부 누리꾼이 '죽었는데 복을 빈대'란 뜻으로 곡해해 웃음거리로 만든 것이다. A씨는 "이곳(SNS)에서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면 안 되겠다는 걸 알게 됐다"고 했다. 누군가의 오독으로 구설에 오르는 게 불편해 온라인에 추모글도 마음 놓고 쓰지 못하게 된 것이다.

'심심한 사과' 논란의 불씨가 된 사과문. 웹툰 작가 사인회 예약 관련 소동에 대해 업체가 '심심한 사과 말씀 드린다'고 썼는데, 온라인에서 이 표현이 조롱거리가 됐다. 심심한을 '지루한'이라고 오독하고 일부 네티즌이 적의를 표한 탓이다.

'심심한 사과' 논란의 불씨가 된 사과문. 웹툰 작가 사인회 예약 관련 소동에 대해 업체가 '심심한 사과 말씀 드린다'고 썼는데, 온라인에서 이 표현이 조롱거리가 됐다. 심심한을 '지루한'이라고 오독하고 일부 네티즌이 적의를 표한 탓이다.


동상이몽을 넘어선 적의

언어의 오독이 사회적 쟁점으로 떠올랐다. 2019년 '명징(明澄)'과 '직조(織造)'로 시작된 구설은 2020년 '사흘', 2021년 '금일(今日)'과 '무운(武運)'을 거쳐 최근 '심심(甚深)한 사과' 곡해 논란으로 커졌다. '깊고 간절한'을 뜻하는 심심을 '지루하고 재미없게'로 오해한 데 대해 기성세대는 개탄했다. 반대로 젊은 세대는 빛바랜 책에나 나올 법한 한자어를 굳이 사용해 읽는 사람을 배려하지 않았다며 못마땅해했다. 언어를 둘러싼 동상이몽이 어휘력 논란을 넘어 세대 갈등으로 비화한 셈이다.

세대마다 쓰는 언어가 달라 생기는 소통의 오류는 비단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하지만 해프닝으로 끝날 일이 사회적 갈등으로 치닫는 것은 단순히 문해력의 문제 때문만은 아니라는 지적이 나온다. 타인의 언어를 이해하려 들지 않고, 그 언어의 진의를 믿지 못하는 불신과 그로 인해 팽배해진 배타적 적의가 오독 논란 근저에 깔려 있다는 것이다. 윤석진 충남대 국문과 교수는 "심심한 사과가 조롱의 대상이 된 데는 심심한 사과를 기계적이거나 정치적 수사로 받아 들여 그 사과에 대한 진정성을 믿기 어렵다는 불신이 담겼다"며 "말이 넘쳐나는 시대에 타인의 말을 그만큼 신뢰하지 않는다는 뜻"이라고 진단했다. 심심한 사과를 지루하고 재미 없는 사과로 해석하는 것은 사과의 진정성 자체를 믿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 적극적 오독 행위라는 얘기다. 김혜정 창원대 특수교육과 교수는 "사과문을 낸 측은 Z세대와의 소통을 전제하기보다 정중함의 격식을 갖추려 한 것 같다"며 "하지만 심심한 사과는 옛 커뮤니케이션에서 선호되던 표현이고 Z세대는 그 사과를 불충분하다고 여겨 그에 따른 불만족으로 적극적 오독을 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댄서 서바이벌 프로그램 '스트릿 맨 파이터' 약자 배틀 예고 영상에서 '남자로서 구실을 못 한다는 것'이란 자막이 나오고 있다. '남자들의 세계에서 최약체가 된다는 것은' 자막 뒤에 나온 장면이다. 각기 다른 출연자가 한 말을 엮어 승부를 남성에게 한정시키고 성 역할을 고정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Mnet 영상 캡처

댄서 서바이벌 프로그램 '스트릿 맨 파이터' 약자 배틀 예고 영상에서 '남자로서 구실을 못 한다는 것'이란 자막이 나오고 있다. '남자들의 세계에서 최약체가 된다는 것은' 자막 뒤에 나온 장면이다. 각기 다른 출연자가 한 말을 엮어 승부를 남성에게 한정시키고 성 역할을 고정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Mnet 영상 캡처


코로나·필터버블... '동굴'에 갇힌 뒤

언어에 대한 불신의 골은 코로나 팬데믹과 개인 맞춤형 추천 알고리즘이 고도화되면서 더욱 깊게 파이고 있다. 사람들은 코로나를 피하고자 더 작은 '동굴'로 찾아들었고 온라인에선 특정 성향의 정보만 제공하는 '필터버블(Filter Bubble)'이 또 다른 동굴을 만들었다. 오프라인과 온라인 모두 겹겹의 동굴 속에 갇혀 살다 보니 배타성은 더욱 강해졌다.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보는 현상이 극단으로 치달으면서 자신이 속한 곳에서 쓰지 않는 언어를 사용하는 이들에게 불신을 품고 그 배척이 적의로 표출되는 악순환이 증폭된 것이다. 성상민 문화평론가는 "한국은 다른 나라에 비해 온라인 커뮤니티 문화가 강하고 세대와 성별마다 주로 쓰는 SNS와 커뮤니티가 다르다"며 "팬데믹으로 오프라인 모임까지 위축되면서 편견이 더욱 강화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표=송정근 기자

표=송정근 기자

실제 온라인 공론장은 세대별로 극명하게 나뉘는 추세다. 정보통신정책연구원이 6월 낸 세대별 SNS 이용 현황 보고서를 보면, 베이붐세대(만 55~65세)는 카카오스토리(38.3%)를, X세대(39~54세)는 페이스북(27.0%)을 주로 사용했다. 밀레니얼 세대(25~38세)와 Z세대(9~24세)는 인스타그램(45.4%, 40.3%)을 가장 많이 썼다.

예능프로그램 '구해줘! 홈즈'에서 '한 남'이 굵은 자막으로 부각돼 노출됐다. '한남'은 한국 남성을 싸잡아 일컫는 혐오 표현이다. MBC 방송 캡처

예능프로그램 '구해줘! 홈즈'에서 '한 남'이 굵은 자막으로 부각돼 노출됐다. '한남'은 한국 남성을 싸잡아 일컫는 혐오 표현이다. MBC 방송 캡처


"남자구실 못 해" 편견 키우는 미디어

이처럼 온라인 서식처가 나뉘면서 세대별로 쓰는 언어와 문화의 간격이 더욱 벌어지는 상황에서 방송사들이 동굴 속 언어를 부각시켜 오독과 편견을 부추기고 있다는 비판도 거세다.

Mnet 댄서 서바이벌 프로그램 '스트릿 맨 파이터'('스맨파') 제작진은 최근 공개한 약자 지목 배틀 예고편에서 '남자들의 세계에서 최약체가 된다는 것은' '남자로서 구실을 못 한다는 것'이란 자막을 내보냈다. MBC 예능프로그램 '구해줘! 홈즈'는 '못 웃는 한 남자'라는 자막을 송출했는데 그중 '한 남'만 크게 키워 논란을 빚었다. '한남'은 한국 남성을 싸잡아 일컫는 혐오 표현이다. 모두 남성과 여성을 갈라치기하고 편견을 조장해 불신과 배타성을 키우는 언어들이다. 공희정 문화평론가는 "예전에는 TV의 가족극이나 사극을 통해 세대별로 언어, 문화를 공유할 수 있는 지대가 존재했는데 요즘엔 그마저도 찾기 어렵다"며 "다매체 시대인데 배타성이 더 강화되는 모순적 현상이 벌어져 언어 오독에 대한 갈등이 첨예화되는 것"이라고 했다.


공존의 위기... "다양성 교과 필요"

학계는 심심한 사과 논란을 다양성의 위기로 보고 있다. 타인의 언어를 불신하는 배타성은 결국 타인의 환경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 문화 자체를 부정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대학 강단에 서는 김성우 언어응용학자는 "맥락과 의도를 헤아리기보다 '심심한'을 사용했다는 이유만으로 분노하는 시민들이 전혀 다른 언어와 문화의 이주노동자들과 자연스럽게 공존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며 "'심심한도 모르는 한심한 것들'이라며 이들을 대화 상대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 역시 새로운 세대의 언어와 문화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 사회 교육에서 가장 시급하고도 중요한 주제가 다양성이다"며 "다양성 교과를 초중고교에 개설해 논의를 진행할 필요가 있다"고 의견을 냈다.

아울러 알고리즘의 문제점 등을 개선해 폭넓은 소통의 장을 만드는 것도 필요한 과제다. 김규정 숭실대 글로벌미디어학부 교수는 "내가 자주 찾는 게 아닌 덜 찾는 것에 대한 중요성을 환기하는 알고리즘 등으로 정보 편향성을 개선하는 방안과 각기 다른 세대가 서로의 언어 세계와 인식 지평을 공유할 수 있는 플랫폼을 고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양승준 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