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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을 '딜리트'한 소설가...사라짐과 살아감의 판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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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을 '딜리트'한 소설가...사라짐과 살아감의 판타지

입력
2022.09.02 04:30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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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혁 신간 '딜리터: 사라지게 해드립니다'
다른 세계로 사물·사람 이동시키는 '딜리터'
몰입 끌어내는 호흡·영상 보는 듯
'살아낸다'는 삶의 가치도 생각케 해
정식 출간 전 작가명 뺀 가제본 마케팅 화제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사라지고 싶다.' 가볍게는 회사 가기 싫은 날 그런 생각을 한다. 진지하게 논하자면, 현실에 숨이 턱턱 막히고 앞은 막막한데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순간에도 같은 생각이 든다. 그때 누군가가 감쪽같이 사라지게 해주겠다고 한다면 우리는 그 손을 잡을까.

김중혁 작가의 신작 '딜리터: 사라지게 해드립니다'는 이런 상상에서 출발한 장편소설이다. 세상이 여러 겹의 레이어(층)로 이뤄져 있다는 세계관이 전제다. 우리가 볼 수 있는 이 세계에서 다른 레이어의 세계로 사람도 물건도 옮길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을 '딜리터'라 부른다. 즉 어떤 물건이나 사람을 이 세상에서만 사라지게 할 수 있다. 소설은 독자에게 흥미로운 상상의 시간을 선사하면서 동시에 '살아낸다'는 삶의 가치도 생각케 한다.

주인공인 소설가 '강치우'는 최상급 딜리터다. 물건뿐 아니라 사람까지 사라지게 만들 수 있다. 대가로 의뢰인의 삶을 소설로 써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것이 그의 비밀이다. 소설은 그가 실종사건 용의자로 의심받으면서 시작된다. 교통사고로 가족을 모두 잃고 죽음을 생각하는 여자친구 '소하윤'을 살리기 위해 다른 세계로 이동을 제안한 게 사건의 발단이 됐다. 고통을 덜고 싶었던 '소하윤'은 주인공의 제안을 받아들여 다른 레이어로 옮겨졌다. 현실에선 사라졌다는 얘기. 이후 주인공이 그 선택을 후회하며 되돌릴 방법을 찾는다.

김중혁 작가. 한국일보 자료사진

김중혁 작가. 한국일보 자료사진

'딜리터'란 소재는 김중혁의 전작 '당신의 그림자는 월요일'(2014)에서도 활용됐다. 다만 개념이 달라졌다. 전작에서는 의뢰인이 컴퓨터 하드디스크나 일기 등 꼭 없애고 싶은 물건을 죽기 전에 미리 부탁하면 이를 없애주는 인물을 '딜리터'라고 칭했다. 이번 작품에는 다층 세계를 전제로 한 판타지적 요소가 가미됐고, 메시지의 여운도 한층 진해졌다. 가령 사후 세계를 보는 인물의 대사는 진흙탕 같은 현실이라도 뿌리 박고 서 있으려 애쓰는 이들을 다독인다. "죽은 사람들의 세계를 계속 보고 있으면 평화로워 보일 때가 있어요. 거긴 모두 과거형으로 이야기하니까, 미래에 대해서는 아무런 고민도 없으니까, 그런게 좋아 보일 때가 있어요. 그런데 거기에 속으면 안돼요."

소설 곳곳에 김중혁 특유의 호흡은 그대로다. 주인공과 형사가 대화하는 첫 장면이 대표적이다. 경쟁하듯 저격하듯 하는 둘의 티키타카가 소설이란 '레이어'로 쉽게 이동하게 끈다. 판타지의 장르적 특성에서 그의 재기는 더 빛을 발하는 듯도 하다. 22년차 소설가로 여전히 "소설을 쓸 때 가장 행복하다"고 자신을 소개하는 작가 본인도 이번 작품을 계기로 "판타지만이 줄 수 있는 기분 좋은 상상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고 돌아봤다. '가제본 마케팅'으로 솜씨 좋은 이야기꾼임을 재입증하기도 했다. 출간 전 작가명을 지운 가제본을 200명의 독자에게 전달해 상당한 호평을 받았다.

딜리터: 사라지게 해드립니다·김중혁 지음·자이언트북스 발행·296쪽·1만5,900원

딜리터: 사라지게 해드립니다·김중혁 지음·자이언트북스 발행·296쪽·1만5,900원

주인공의 직업(소설가)은 캐릭터의 현실감을 더한다. 직업적 특성과 내면의 고민 등이 소설 군데군데 드러난다. 작가만의 유머코드를 버무린 대목에선 피식 웃음도 난다. "소설가는 관찰하는 사람이에요…소설가는 경력이 거듭될수록 눈에 잘 띄지 않는 사람,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사람으로 변하게 되는 겁니다. 소설가 중에 잘생긴 사람이 거의 없죠? 다 그런 이유 때문이에요." (김중혁이 자신의 작품에 소설가를 등장시킨 건 이번이 두번째다. 픽션과 작가가 분리돼야 한다는 생각에 올해 상반기 출간된 소설집 '스마일' 전까지는 일부러 소설가 인물을 피했다고 한다.)

읽는 내내 책 옆에 영상 화면을 떠올리게 하는 점도 특징이다. 생동감 있는 캐릭터, 인물 간 대화를 주축으로 서사를 끌고 가는 방식 등이 힘을 발휘한다. 사실 '딜리터'는 최근 문학계의 큰 흐름인 IP(지식재산권)·영상화 사업의 중심에 선 작품이라는 점에서도 주목받는다. 이는 올해 초 배명훈의 '우주섬 사비의 기묘한 탄도학'으로 스타트를 끊은 '언톨드 오리지널스' 프로젝트의 두 번째 작품이다. 작가 에이전시 블러썸크리에이티브와 CJ ENM이 진행하는 영상화를 전제로 한 소설 출간 프로젝트는 천선란, 김초엽 작가가 이어갈 계획이다.

진달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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