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상처 탓일까요…새 가족 만나는 명절이 두려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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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상처 탓일까요…새 가족 만나는 명절이 두려워요

입력
2022.09.08 15:00
수정
2022.09.08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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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정우열의 회복’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정우열 원장이 <한국일보>와 함께 진행하는 정신 상담 코너입니다.

일러스트=박구원 기자

저는 프리랜서 직장인이에요. 오랫동안 극심한 명절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단순히 명절이 싫은 정도가 아니라 일 년 내내 불안에 떨어요. 결혼을 앞두고 스트레스가 더 심해졌어요. 미혼일 때는 내가 가고 싶을 때 가고, 돌아오고 싶을 때 돌아오면 됐는데 결혼 후에는 피할 수도 없을 것이란 생각에 너무 두렵습니다.

시댁은 대가족이고 자주 모이는 화목한 분위기입니다. 그 대가족 사이에서 나는 스스로가 이방인 같아요. 식사 자리에서 쭈뼛거리고 혼자 아무 말 못하는 그 시간이 괴롭습니다. 어색하고 불편한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온몸으로 수치심을 받아내는 느낌이에요.

어린 시절부터 여러 사람과 있는 것이 불편했어요. 학창시절엔 한두 명의 친구들과만 친하게 지냈고, 수학여행이나 수련회를 앞두고는 늘 불안에 시달렸습니다. 성인이 됐지만 단체 생활이 불편하고 괴롭기는 마찬가지였어요. 그래서 회식이 없고, 혼자 일할 수 있는 곳으로 취업을 했어요.

모든 모임이 괴롭고 힘든 것은 아닙니다. 술자리는 좋아하는 편이고, 상대가 안전하다고 느끼면 말도 곧잘 하고 심지어 사교성이 좋다는 얘기도 들어요. 하지만 안전하다고 느끼지 않거나 나를 잘 받아주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으면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숨이 막힐 정도로 괴롭습니다.

저는 어릴 적에 의지할 데 없는 가정환경에서 자랐어요. 아빠는 제가 일곱 살이었을 즈음 외도로 집을 떠났습니다. 대신 한 달에 한 번씩 집 앞으로 찾아왔어요. 아빠를 참 좋아하는 아이였던 저는 아빠로부터 칭찬을 듣는 게 그렇게 좋았어요. 하지만 아빠가 평소 저에게 가장 많이 했던 표현은 '너는 왜 그런 것도 못하냐'라는 핀잔이었어요. 저는 아빠에게 언제나 모자란 딸이었나 봅니다.

엄마는 직장에 다녔는데 항상 바쁘고 힘들어하셨죠. 여덟 살 때에는 엄마가 이모 댁에 가셨는데 며칠 동안 돌아오지 않으셨어요. 엄마의 서랍을 뒤지다가 '이렇게 두고 가서 미안하다'로 시작하는 편지를 발견했죠. 마음을 바꿨던 건지 엄마는 다시 돌아오셨어요. 엄마는 저희를 이뻐해주시다가도 가끔씩 '첫째만 낳고 너희 둘은 낳는 게 아니었는데', '뭐하러 셋씩이나 낳았을까', '너희 아빠에게 가버려'라는 모진 말을 쏟아내셨습니다.

저에겐 어린 시절 사촌 오빠에게 성추행을 당한 기억이 아직까지도 악몽처럼 남아있어요. 3년 전 엄마와 통화를 하다가 우연히 엄마도 그 사건을 알고 있었고, 당시 제가 도움을 청했는데도 아무 조치도 없이 그냥 넘어갔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저는 심약한 엄마가 내 이야기를 들으면 얼마나 마음이 아플지 걱정했는데 정작 엄마는 어린 나를 지켜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날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릅니다.

어린 시절의 상처 때문일까요. 많이 노력했지만 인간관계가 여전히 어렵고 두렵습니다. 이제 결혼을 해서 새로운 가족을 만나는데 어디서부터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예민한 기질로 태어난 제 탓인 것 같아 막막하기만 합니다. 이렇게 계속 살아가도 괜찮은 걸까요.

김우진(가명·34세·프리랜서)

우진씨, 당신의 사연을 읽으면서 어린 시절부터 겪었을 외로움과 불안이 고스란히 전해져 마음이 아팠습니다. 수치심을 마주하는 상황에 대한 두려움이 얼마나 컸을지 그때마다 얼마나 괴로웠을지 충분히 이해됩니다. 당신이 겪고 있는 괴로움의 근원인 과거 부모님과의 관계, 현재 자신과의 관계, 앞으로 펼쳐질 결혼생활에 대해 다시 한번 천천히 생각해봐야 할 것 같아요.

어린 우진씨의 삶은 참으로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삶이었어요. 어린 당신은 부모에게 언제든 버려질까 불안했고, 사랑과 인정을 받지 못할까봐 두려웠어요. 그때의 기억 때문에 당신은 누가 조금이라도 나를 평가하거나 비난할 것 같은 느낌이 들면 수치심에 압도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 상황을 마주하기가 늘 두려우니 스스로 위축되고 삶이 막막하게만 느껴지지요.

게티이미지뱅크

아버지는 당신에게 무심했어요. 아버지의 사랑과 인정을 갈구했지만 불안한 관계 속에서 반복해서 좌절을 경험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진씨가 의지할 곳은 어머니였지만 어머니 역시 따뜻하게 받아주지 못했고, 위기의 순간에 든든한 보호자가 돼 주지도 못했습니다. 우진씨에게 여전히 아픈 기억으로 남아있는 사건에서 어머니가 보여준 태도는 그 사건 자체만큼이나 큰 아픔으로 남게 된 것 같습니다. 아버지의 냉담, 어머니와의 단절 경험으로 우진씨는 상대가 그럴 의도가 아니었더라도 당신을 조금이라도 서운하게 하거나 당신을 아주 소중하게 여기지 않으면 버려질 것 같은 두려움에 사로잡히지요.

타인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감정과 느낌, 생각에 대한 자기 확신이 떨어지면 사람은 누구나 불안과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런 감정으로부터 자기를 지키는 여러 방어기제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괴로운 상황 자체를 피해버리는 '회피성 행동'입니다. 회피가 대인관계의 패턴으로 굳어진 사람은 거절에 매우 예민해서 자신을 거절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드는 사람만을 대상으로 관계를 맺습니다. 거부에 대한 두려움이 커서 혼자 지내려고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친밀한 관계를 누구보다 간절히 원하고 있죠. 우진씨 역시 스스로 묘사한 대로 안전하다고 느껴지지 않거나 공격할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을 것 같으면 상황 자체를 피하는 식으로 자기 마음을 지킨 것으로 생각됩니다.

게티이미지뱅크

인간 관계는 기본적으로 의도와 감정을 주고받는 관계이니 늘 모호함에 대한 불안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스스로에 대한 신뢰와 확신이 있는 사람은 모호함에서 오는 불안을 수용하고 극복하는 과정을 쌓아가면서 성장합니다. 하지만 우진씨는 그런 대인관계 경험이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안타까운 점은, 혹여나 비난을 받고 부끄러움과 수치심을 느낄 수 있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관계 자체를 피하면서도 감정의 끈을 놓아버리지 못하고 실은 온 신경을 쓰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짐작건대 이런 감정 노동에 쏟는 에너지는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컸을 겁니다. 명절이 돌아올 때마다 불안이 엄습해오고 그 상황을 거부하거나 외면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에너지를 쏟으며 감정적으로 소진되는 루틴이 반복되면서 내면에 메우기 힘든 구멍을 만들었죠. 그동안은 회피함으로써 불안과 두려움을 통제해왔지만 결혼을 앞두고 무너지기 시작한 것으로 보입니다. 결혼을 통해 새로 형성된 미지의 관계들에 대한 불안, 더 이상은 회피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인생의 중요한 사건인 결혼을 앞두고 자연스러운 불안에 더해져 너무 큰 스트레스가 되었을 것 같습니다.

제가 우진씨에게 꼭 전하고 싶은 것은 결혼을 앞둔 지금이 우진씨에게 도전이자 기회라는 사실입니다. 결혼은 타인에게 자신을 그대로 드러내고 그 자체로 받아들여짐으로써 맺어지는 인간관계를 경험할 수 있는 일생일대의 기회입니다. 제가 보기에 우진씨는 내가 어린 시절 중요한 사람으로부터 이런 영향을 받아 이런 면이 형성됐고, 그래서 현재 삶 속에서 이런 게 건드려지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점이 무엇보다 훌륭합니다.

게티이미지뱅크

이제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결혼을 계기로 좀더 적극적인 관계 맺기를 시도해볼 것을 조언하고 싶어요. 남편은 인생의 동반자로 우진씨를 선택했습니다. 잘나지 못해도, 잘 해내지 못해도, 지금 모습 그대로 우진씨를 아껴줄 수 있는 사람이죠. 아직은 남편이 자신에게 안전한 사람이고 있는 그대로 자신을 사랑해줄 것이란 믿음이 단단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결혼생활을 통해 배우자와의 관계 속에서 그 믿음과 신뢰를 천천히 뿌리내릴 수 있을 거예요. 아이가 부모와 애착 관계를 맺으며 세상을 살아가는 근본적인 신뢰감을 형성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인 역시 부부 관계를 통해 신뢰감을 쌓아가게 되는데 이를 '성인애착'이라고 합니다.

내면의 구멍이 아프다 못해 너무 부끄러워서 남편에게조차 노출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을 거예요. 자신의 기질이 너무나 예민하게 느껴져서 원망이 들고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우진씨는 감정의 결을 누구보다 섬세하게 느끼는 사람이고, 최선을 다해 자신을 지켜왔습니다. 그리고 아주 다행스럽게도 당신을 아끼고 사랑하는 동반자를 만났습니다. 결혼을 축하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사람인 남편과 함께 친밀감을 충분히 누리며 내면이 성장하고 깊어갈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 추석 연휴로 다음주 월요일 휴간하기 때문에 이번 상담은 금요일자에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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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결되지 않는 내면의 고통 때문에 힘겨운 분이라면 누구든 상담을 신청해 보세요. 상담신청서는 한국일보 사이트(https://www.hankookilbo.com/counseling) 또는 아래 바로가기를 통해 양식을 내려받아 작성하신 후 이메일(advice@hankookilbo.com)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선정되신 분의 사연과 상담 내용은 한국일보에 소개됩니다. ▶상담신청서 바로가기

정리= 손효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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