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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변호사’ 권민우와 반쪽짜리 공정

입력
2022.07.30 04:30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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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우영우와 권민우가 공존하려면 어떤 '공정'이 필요할까

편집자주

젠더 관점으로 역사와 문화를 읽습니다. 역사 에세이스트 박신영 작가는 '백마 탄 왕자' 이야기에서 장자상속제의 문제를 짚어보는 등 흔히 듣는 역사, 고전문학, 설화, 속담에 배어 있는 성차별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번갈아 글을 쓰는 이한 작가는 '남성과 함께하는 페미니즘 활동가'로서 성평등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남녀가 함께 고민해볼 지점, 직장과 학교의 성평등 교육 현장의 이야기를 담아냅니다.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속 우영우와 권민우(오른쪽)의 모습. ENA제공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속 우영우와 권민우(오른쪽)의 모습. ENA제공


“이 게임은 공정하지가 않아요!”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속 권민우, 왜 강자는 못 건드리면서 우영우를 괴롭히냐는 질문에

최근 화제의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재밌게 보고 있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가 있는 천재 변호사 우영우가 로펌에서 벌어지는 일을 해결하는 게 주된 스토리다. 이 드라마 속 로펌에는 우영우와 그의 로스쿨 동기 최수연, 입사 동기 권민우, 세 명의 신입 변호사가 등장한다. 앞의 두 무해한 매력의 캐릭터와 달리 권민우는 '권모술수 권민우'라고 불리며 일과 관련한 중요 정보를 제대로 공유하지 않는 등 얄미운 짓을 일삼는다.

그렇다고 막연히 납작한 악역은 아니다. 치열한 경쟁과 이른바 '뒷배'가 없다는 절박함이 그를 권모술수로 내몰았을 거라며 동정 어린 시선을 보내는 이들도 있다. 그의 모습에서 요즘 청년 남성의 분노와 억울함, 그리고 공정의 감각이 엿보인다. 드라마 6~7화에서 권민우는 우영우가 공식적인 절차가 아닌 아버지 '빽'으로 회사에 입사했음을 의심하며 분노한다. 그에게 우영우는 약자, 소수자, 그냥 동료도 아닌 경쟁자일 뿐이다. 더 강력한 존재이면서도 부당한 특권을 등에 업고 있는 비열한 경쟁자다. 그렇기에 직장 상사 정명석, 동료 최수연 변호사의 봄날 햇살 같은 선의를 냉소한다. 이 경쟁은 공정하지 못하다고 일갈하며 그 분노의 칼끝은 직장 상사나 채용 담당자, 대표, 회사, 사회구조도 아닌 우영우만을 향한다.

권민우에서 엿보인 청년 남성

왜 이런 캐릭터에서 청년 남성에 대한 기시감을 느끼는지, 누군가는 불쾌하고 억울해할지 모른다. 하지만 마냥 근거 없는 기시감은 아니다. 작년부터 이어졌던 몇 차례 굵직한 선거에서 이른바 '이대남'이라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들이 등장했다고 기성 언론과 정치권이 호들갑을 떨어댔다. 좋든 싫든 그 집단에 속한 한 사람으로 이야기를 얹지 않을 수 없었다. 다양한 문제의식이 있지만, 요즘 등장하는 '이대남'이라 이야기되는 청년남성은 (좋게 표현하면) 독특했다. 유난히 '페미니즘'을 싫어할 뿐만 아니라, 각종 소수자 이슈에 있어 무관심하거나 배타적이다.

자료:2021년 6월 KBS-한국리서치 세대인식 집중조사. 그래픽=송정근 기자

자료:2021년 6월 KBS-한국리서치 세대인식 집중조사. 그래픽=송정근 기자

개인적으로 현장에서도 이런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어린이, 청소년, 청년을 불문하고 남성을 대상으로 성평등 교육을 할 때, 빠지지 않고 나오는 이야기가 있다. 초등학교 5학년 교실에서 성평등 교육을 할 때였다. 우리 사회에서 여성이 겪는 구조적 차별을 이야기하던 중, 한 남자 어린이가 소리쳤다. "그런데 여자는 군대 안 가잖아요!" 여성을 향한 차별과 폭력에 공감하고 분노하던 어린이들도 뜬금없는 그 이야기에 말문이 막혔고, 교실 분위기는 싸늘해졌다.

교실은 곧 각자 자신들이 더 피해자이고 약자임을 경쟁하는 억울함 호소의 장으로 변했다. 중, 고등학교로 올라가면 상황은 더 심각해진다. 군대 이야기만 나오면 거의 모든 남자 청소년이 한숨을 푹 내쉬고 억울해한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하고 물으면, '그것도 성차별이니까 여자도 군대 가야죠'하고 볼멘 대답이 나온다. 분노는 여성전용 주차장과 여성전용휴게실 등 여성정책으로 빠르게 번져나간다. 화룡점정은 '여성 할당제'다. 많은 남성들은 '여성 할당제'가 불공정한 '역차별'의 대표 사례라고 말하며 분노한다.

그래픽=송정근 기자

그래픽=송정근 기자

이런 분노와 억울함은 일견 그럴싸해보인다. 여성가족부의 '2021년 국가성평등보고서'에 따르면 교육·직업훈련 영역의 성평등 점수는 90점 대로, 비교적 성평등하다고 여겨진다. 실제로, 학교에서 남자가 반장, 여자는 부반장 하던 시절도 지났고, 대학진학률도 비슷해진 마당에 성차별이라니. 고리타분한 옛날 얘기처럼 느껴질 수 있다. 게다가 '나'라는 개개인은 대체로 '작고 귀여워서' 우리 사회의 치열한 경쟁에서 고군분투하다보면 스스로에게 가엾은 마음이 들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이들에게 여성정책은 안 그래도 각종 경쟁으로 힘들어서 울고 싶은 와중에 뺨 때리는 격이다. 그래서 이들은 '공정'을 말한다.

시스템이 아니라 우영우를 향하는 분노...권민우의 공정이란?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속 우영우의 모습. ENA제공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속 우영우의 모습. ENA제공

많은 이들이 우리 사회가 당연히 공정해야 한다고 여기지만, 막상 그 공정이 무엇인지를 묻거나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앞서 이야기한 권민우와 청년 남성들이 주장하는 공정은 무엇일까?

권민우의 분노와 공정의 감각은 다분히 개인적이고 선택적이다. 우영우를 강자라 말하지만, 우영우가 뛰어난 성적과 능력을 갖고도 자폐 스펙트럼 장애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취업과 직업현장에서 번번이 차별받는 현실은 모른 체한다. 그는 직장 상사인 정명석이나 대표 한선영, 우리 사회의 불공정한 구조에는 분노하지 않고 고분고분 '사회생활'을 한다. 하지만, 동료 최수연과 우영우에게는 쉽게 윽박지르고 분노한다. 이 분노의 방향과 모습은 그가 이미 우리 사회의 권력구조와 특권을 너무나 잘 체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군대 문제로 분노하는 이들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남성 예비군이 "요즘 군대가 군대냐!"라고 하는 말에는 크게 분노하지 않는다. 군대 내 부조리나 비리, 폭력에 대해 분노하고 개선을 요구하기보다, 옆자리 여성이 군대에 가지 않는 것에만 분노한다. 이 분노의 방향은 우리 사회 권력구조를 너무나 투명하게 보여준다. 이때의 '공정'은 우리 사회의 '공정'을 위함이라기보다 자신의 이익과 분노를 정당화하기 위한 쓰임에 불과하다.

시야를 조금 넓히면 보이는 것들

남성에겐 모를 수 있는 특권, 모르고 분노하는 특권이 있다. 예컨대, 여성전용주차장과 휴게실이 무슨 이유로 만들어졌는지, 우리나라에 실상 '여성 할당제' 같은 건 없다는 걸 몰라도 살아가는 데 아무 지장이 없는 사람들이 있다. 여성전용주차장은 어둡고 폐쇄된 지하주차장 같은 공간에서 빈번히 발생하는 여성 대상 폭력을 예방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여성전용휴게실도 마찬가지다.

여성할당제는 어떨까? 많은 남성이 '역차별'이라고 분노하는 것이 무색하게도, 우리나라에 제대로 기능하는 여성할당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공무원 채용 시 양성평등채용목표제도가 있지만, 이는 한 성별이 30%에 미치지 않을 경우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예방하기 위해 해당 성별을 추가 합격시키는 제도로, 시행 이래 추가 합격된 인원은 남성이 800여 명이나 더 많았다. 앞서 이야기한 여성가족부의 성평등 보고서 자료만 봐도 그렇다. 교육·직업훈련 영역의 성평등 수준은 90점 대였지만, 경제활동 영역은 70점대, 의사결정 영역은 30점 대를 벗어나지 못하는 수준이다.

즉, 우리가 조금만 시야를 넓히고 바라보면, 우리 사회는 여전히 너무나 성차별적임을, 그래서 공정을 위한 각종 여성정책이 필요함을 알 수 있지만, 어떤 이들은 여성정책이 없어도 잘 사는 사람들이라 굳이 이에 대해 알려 하지 않는다. 다만 남성을 위한 정책도 만들어달라고 이야기하기보다는 '공정'을 빙자해 여성정책과 여성기구 폐지만을 이야기한다. 우리 사회 권력구조가 기울어져 있음을 알기에 손쉽게 중립적인 척할 수 있는 것이다.

'분노'를 넘어 '공동체를 위한 공정'으로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공정은 지금까지 우리가 함께 쌓아올린 공동체적 가치의 중추다. 공정은 역사적이고 사회구조적인 맥락에서 이해되고 이야기돼야 하는 공동체의 가치다. 우리는 마땅히 공정해야 한다. 어떤 이들은 자신에게 불리하고 어떤 때는 본능과 부딪히더라도 공정하기 위해 노력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 모습에 감동해 자신 역시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자문하며 닮고자 노력한다. 그것은 개인의 유불리를 뛰어넘는 공정의 가치가 우리 모두를 지켜왔고 또 지속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공정은 역사적이고 공동체적인 맥락에서 이해하고 이야기할 때 비로소 힘을 갖는다.

그 탑을 쌓아온 역사와 배경, 맥락을 돌아보지 않고 개인의 이익만을 위해 하나씩 꺼내어 쓴다면 어떻게 될까? 오랜 우화 속 양치기 소년은 자신의 즐거움만을 위해 마을 사람들의 선의와 약속을 남용하다가 결국 공동체의 감각을 파산에 이르게 한다. 그 결과는 알다시피 파국이다. 우리 사회의 권력구조를 살피지 않고, 개인의 이익과 약자를 향한 분노를 정당화하기 위해 반쪽짜리 공정을 남용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계속해서 공정을 빙자하여 공동체의 감각을 갉아먹은 그 끝에 공정은 힘을 잃고 냉소만 남는다. 무한경쟁과 적자생존, 각자도생의 늑대가 무너진 울타리를 타고 넘는다. 양과 소년은 모두 잡아먹히고 남는 건 굶주림과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뿐이다.

이한 작가는?

‘남성과 함께하는 페미니즘’(이하 남함페)과 성평등 교육 활동을 하고 있다.
남함페는 이름에 걸맞게, 남성과 함께 페미니즘을 공부·실천하고자 캠페인, 교육, 책 모임, 글쓰기, 집회연대, 기자회견 등 다양한 활동을 도모하고 있다. 활동에 대한 열정과 의지에 비해서 아직 작은 모임에 가까운지라 페미니스트 활동가들 사이에서도 아는 사람만 아는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활동 의의와 목적은 뚜렷하다. 페미니즘을 통해 성별 구애 없이 함께 성평등한 세상을 만든다.

이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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