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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시간 관람은 기본인데도 '매진'... 여전히 사랑받는 일본 전통 예능

입력
2022.07.09 04:40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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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건재한 일본 전통 예능의 세계

편집자주

우리에게는 가깝지만 먼 나라 일본. 격주 토요일 연재되는 ‘같은 일본, 다른 일본’은 미디어 인류학자 김경화 박사가 다양한 시각으로 일본의 현주소를 짚어보는 기획물입니다.

도쿄에 가부키가 있다면 오사카에서는 ‘분라쿠(文楽)’라는 전통 인형극 공연이 은근한 인기를 이어가고 있다. 사진은 오사카 중심가에 있는 분라쿠 전용 극장의 객석이다. 일러스트 김일영

도쿄에 가부키가 있다면 오사카에서는 ‘분라쿠(文楽)’라는 전통 인형극 공연이 은근한 인기를 이어가고 있다. 사진은 오사카 중심가에 있는 분라쿠 전용 극장의 객석이다. 일러스트 김일영


대중적 인기가 여전한 일본 전통 예능

일본에서는 전통 예능이 지금까지도 대중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다. 수백 년 이상 계승되어 온 전통 공연이나 퍼포먼스가 건재할 뿐 아니라, 상당한 팬덤이 형성되어 있어서 대중 문화계에서도 영향력이 크다. 한국에서는 예능이라고 하면 TV 오락 프로그램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을 것 같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신체를 직접적으로 이용하는 예술, 공연, 퍼포먼스 등 다양한 표현 장르를 예능이라고 말한다.

전통적 예술 장르가 문화유산으로서 사회적 가치를 인정받는 것은 물론 일본만의 일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도 판소리나 민요, 사당놀이, 농악 등 무형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은 전통 공연이나 예술 양식이 있다. 이들 고유의 양식을 보존, 계승하기 위해서 국가적으로도 적지 않은 공을 들이고 있다. 이에 비해 일본의 전통 예능은 무형문화재라는 인식도 있지만, 대중적 인기와 관심이 현재진행형이라는 점에서 존재감이 다르다. 역사와 전통의 후광 덕분에, 대중 문화 장르 중에서도 ‘프리미엄급’ 대접을 받고, 종사자들도 대중 예술계의 셀럽으로 유명세를 누린다.

‘가부키’, ‘라쿠고’, ‘만자이’, 여전히 사랑받는 전통 예능의 세계

일본 전통 예능의 대표 격인 ‘가부키(歌舞伎)’라는 공연 장르가 있다. 짙은 분장을 한 남자 배우들이 박력있는 퍼포먼스로 무대를 휘어잡는 전통극 형식이다. 개성있는 신체 퍼포먼스에 더해 전통적 방식의 무대 연출, 화려한 의상, 분장, 전통 음악과 소도구 등이 어우러진 종합 예술 장르다. 17세기 에도시대에는 저잣거리의 서민적인 오락 공연물이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도쿄에서도 유서있는 번화가인 긴자에 자리한 호화스러운 전용 극장 ‘가부키자(歌舞伎座)’나 국립 극장 등에서 상연되는 고급 공연 장르가 되었다.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해외 방문객들의 단골 관광 코스이기도 하다.

사실 가부키는 초심자에게는 진입 장벽이 꽤 높다. 작품 한 편의 길이가 꽤 길어서, 최소 4시간은 관람석에 붙어있을 각오를 해야 한다. 7, 8시간이 넘는 대작인 경우에는 한 편을 감상하기 위해 하루를 꼬박 투자해야 한다. 대사에 고어가 많이 포함된 시대극은 자막 없이는 내용을 이해하기도 어렵다. 이렇게 불친절한 공연 장르임에도 불구하고, 가부키 신작은 늘 화제가 되고 티켓은 매진 사례다. 기모노(일본 전통 의상)를 갖추어 입고 극장을 찾는 단골들은, 휴게시간에는 ‘마쿠노우치(幕の内, ‘막간’이라는 뜻)’ 도시락을 먹으면서 하루 종일 극장에 머무른다. 극장의 엄숙한 분위기나 격식을 따지는 관람 매너가 팬들에게는 오히려 즐길 만한 문화로 자리 잡았다. 주연급 가부키 배우들도 상당한 팬덤을 누린다. 예를 들어, 가부키 배우인 이치카와 에비조(市川海老蔵)는 현재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연예인 중 한 명이다. 에도시대에 명성을 떨쳤던 명배우 이치카와 단쥬로의 5대손으로 가업을 계승했다는 가족력이나 배우로서 출중한 실력으로도 주목받지만, 소셜미디어에서는 140여만 명 팔로워의 관심을 받는 인플루언서이자 스캔들 메이커다. 그래서 연예계 호사가들의 관심이 끊이지 않는다. 가부키 공연을 본 적이 없다는 사람도 플레이보이 기질이 다분한 그의 사생활은 훤히 알 것이다. 일본에서 가부키는 나날이 새로워지는 공연 예술이자 늘 ‘핫’한 연예 비즈니스인 것이다.

한편, ‘라쿠고(落語)’나 ‘만자이(漫才)’라고 부르는 전통 만담도 변함없이 큰 사랑을 받는 예능 장르다. 요즘의 스탠드업 코미디와 비슷한 라이브 퍼포먼스인데, 격식을 갖춘 가부키와 달리 소탈하고 통쾌한 맛이 있다. 라쿠고는 공연자가 무대 위에 홀로 나서서 위트있는 입담으로 관객을 사로잡는 1인극 라이브 퍼포먼스다. 다다미방에 방석이 한 장 깔릴 뿐인 무대는 소박하다 못해 썰렁할 정도다. 단정하게 전통 의상을 갖춰 입은 공연자가 부채 하나, 손수건 한 장만 든 단출한 모습으로 무대에 오른다. 그가 방석 위에 정좌하면 곧 물 흐르는 듯한 언어의 유희가 시작된다. 퍼포먼스의 형식은 에도시대를 계승했지만, 만담의 내용은 현대적 유머 감각이 돋보이는 위트와 해학으로 가득 차 있다. 유창한 말재간과 절제된 제스처, 은근한 얼굴 연기만으로 관객의 박장대소를 이끌어내는 ‘라쿠고카(落語家, 라쿠고 공연자를 뜻한다)’의 퍼포먼스에 저절로 감탄이 나오고 만다.

도쿄에 라쿠고가 있다면 오사카에는 만자이가 있다. 만자이는 서로 역할이 다른 두 명의 공연자가 함께 무대에 올라 농담과 허튼소리를 주고받는 2인 만담 퍼포먼스다. 과장된 몸 개그는 없지만 아슬아슬하게 경계를 넘나드는 풍자와 독창적 유머 감각이 한번 빠지면 좀처럼 헤어나기 어려운 매력이 있다. 전용 극장을 찾아 생생한 만자이 라이브를 즐기는 팬도 많지만, TV 등의 오락 프로그램, 코미디 프로그램 등에서도 만자이 퍼포먼스를 자주 접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만자이는 가부키나 라쿠고보다 훨씬 오래 전에 성립한 예능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거창한 연출이나 장치가 불필요하고 말재간에만 집중하는 퍼포먼스인 만큼 현대적인 오락 스타일에도 쉽게 적응한 것이다.

실제로 라쿠고나 만자이 등의 전통 만담은 ‘오와라이(お笑い)’라고 하는 일본 대중 코미디의 문화적 근간이다. 라쿠고의 정기 라이브를 녹화, 방영하는 <쇼텐(笑点)>이라는 인기 TV프로그램은 1966년 방송이 시작된 이래 반 세기 넘게 매주 일요일 오후의 안방극장을 책임지고 있다. 일본 최초 희극 프로그램이 바로 라쿠고에서 시작된 것이다.

한편, 일본에서 최고 인기를 누리는 코미디언들은 대부분 ‘만자이시(漫才師, 만자이 기술자)’ 출신이다. 매년 기라성 같은 코미디언들이 만자이 콘테스트에 참여해 웃음을 뽑아내는 기술을 겨루기도 한다. 일본에서는 코미디언들이 사람들을 웃길 줄 아는 기능(技能)을 갖춘 기술자로 대접받는 분위기가 있다. 라쿠고나 만자이 같은 전통 예능의 계승자라는 인식이 작용하기 때문일 것이다.

전통 예술을 ‘전통’이라는 프레임에 박제시킬 이유는 없다.

일본 전통 예능이 오래도록 건재한 것은, 전통적 형식을 어느 정도 고집하면서도 대중들과의 접점에 있어서는 유연성과 창의성을 발휘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가부키의 경우, 전통과 격식을 중시하는 연극 형식은 고수하면서도, 만화나 애니메이션 등 현대적 장르를 재해석한 신작을 꾸준히 시도하고 있다. 최신의 대중문화 트렌드를 받아들이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 것이다. 라쿠고나 만자이 등의 전통 만담 예능도 TV 등 새로운 대중문화매체를 껴안으면서 현대인의 입맛에 맞도록 열심히 변화해왔다.

요즘 한국 젊은이들도 고유한 우리 문화에 관심이 높다고 한다. 민요, 판소리 등의 전통 음악과 그루브한 전자 음악을 쿨하게 뒤섞고, 그 위에 ‘힙’한 춤사위까지 얹은 흥겨운 퓨전 장르가 꽤 인기라는 이야기도 들린다. 한편으로는 예술의 역사와 전통 속에서 문화적 다양성을 재발견하는 젊은이들이 대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지금까지 기성 세대가 전통 예술을 보는 관점이 굳어있었던 것은 아닌지 새삼 돌아보게 된다. 예술의 매력은 창의적 자유로움과 재해석의 잠재력 속에 있는 법. 전통 예술을 ‘전통’이라는 프레임에 박제시킬 이유는 없는 듯하다.

김경화 미디어 인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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