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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보다 무서운 가난

입력
2022.07.06 20:00
수정
2022.07.11 10:53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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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민석
기민석목사ㆍ한국침례신학대 구약성서학 교수

편집자주

'호크마 샬롬'은 히브리어로 '지혜여 안녕'이란 뜻입니다. 구약의 지혜문헌으로 불리는 잠언과 전도서, 욥기를 중심으로 성경에 담긴 삶의 보편적 가르침을 쉽고 재미있게 소개합니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핵무기의 위협에 나라가 국방과 외교에 총력을 쏟는다. 국민을 죽음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다. 코로나19와 같은 전염병이 돌면 나라가 사력을 다해 방역하고 격리하며 통제한다. 마찬가지로 국민을 죽음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사실 핵무기나 전염병 못지않게 사람 목숨을 위협하는 것이 있다. 바로 가난이다. 가난이 무서운 것은, 외부의 적이 아니라 스스로가 죽음을 선택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가 근간에 접하는 가장 마음 아픈 뉴스는, 가난이 죽음보다 더 두려웠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실제로 성경은 가난이 사람 목숨을 위협하는 것으로 묘사한다. "네게 가난이 강도처럼 들이닥치고, 빈곤이 방패로 무장한 용사처럼 달려들 것이다."(잠언 6:11) 가난은 우리의 목숨을 위협하는 무장 강도이다.

인생을 적나라하게 그리는 전도서가 이런 말을 시작한다. "주민이 많지 아니한 작은 성읍이 있었는데, 한 번은 힘센 왕이 그 성읍을 공격하였다. 그는 성읍을 에워싸고, 성벽을 무너뜨릴 준비를 하였다. 그때에 그 성 안에는 한 남자가 살고 있었는데, 그는 가난하기는 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이므로, 그의 지혜로 그 성을 구하였다."(전도서 9:14-15) 가난이 핸디캡이었던 이가 마을을 구했으니 드라마틱한 영웅기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 다음에 이어지는 말이 참 씁쓸하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 가난한 사람을 오래 기억하지 않았다. 나는 늘 '지혜가 무기보다 낫다'고 말해 왔지만, 가난한 사람의 지혜가 멸시받는 것을 보았다. 아무도 가난한 사람의 말에 더 이상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전도서 9:15-16)

나라를 구한 영웅 앞에 떨어지지 않고 붙었던 수식어는 '가난'이었다. 가난은 영웅도 멸시받게 만드니, 보통 사람이 죽음보다 가난을 더 두려워할 만하다. 성경은 왜 가난이 무서운지 대담하게 밝힌다. "가난하면 부자의 지배를 받고, 빚지면 빚쟁이의 종이 된다."(잠언 22:7) 성경은 가슴 아프게도 다음 사실을 덤덤하게 확인해 준다. "가난한 사람은 이웃에게도 미움을 받지만, 부자에게는 많은 친구가 따른다."(잠언 14:20) 가난으로 수많은 휴먼 드라마가 만들어졌으며, 덕분에 봉준호의 '기생충'은 칸 영화제의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 가난 때문에 노예가 되고 왕따를 겪는 것이라면, 가난을 더는 개인 단독의 문제만으로 두어서는 안 되지 않을까?

물론 성경은 게을러서 가난한 이들에게 채찍질을 마다치 않는다. "게으른 사람에게 개미를 보고 배우라고 하며 언제까지 누워만 있을 거냐고 호통친다."(잠언 6:6-10) 동시에 성경은 가난한 이들의 사정을 공동체가 예민하게 다루어야 할 것으로 본다. "가난하다고 하여 그 가난한 사람에게서 함부로 빼앗지 말고, 고생하는 사람을 법정에서 압제하지 말아라. 주님께서 그들의 송사를 맡아 주시고, 그들을 노략하는 사람의 목숨을 빼앗으시기 때문이다."(잠언 22:22-23)

많은 국가가 사람이 빈곤의 고통으로부터 헤어 나오도록 복지 및 구제 정책을 사회에 도입한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의 일반적 정서는, 사람의 경제 사정은 전적으로 개인의 몫이며 책임인 것으로 여긴다. 과연 옳을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은 매우 불평등하게 태어난다. 어느 사람도 가난을 스스로 선택한 이 없다. 아무리 노력해도 벗어나질 못할 저주에 허덕이다가 노년을 맞기도 한다. 노력의 가치마저 무색하게 만드는 것이 금수저의 흑마법이고, 자본주의 망언 가운데 당연히 톱은 '억울하면 너도 부자로 태어나지 그랬냐'다. 그런데 그 억울한 것은 절대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 금수저와 흙수저는 당신이 잡은 것이 아니라 운명이 쥐여준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난을 대하는 공동체의 격(class)은 다음과 같아야 하지 않을까. "남을 잘 보살펴 주는 사람이 복을 받는 것은, 그가 자기의 먹거리를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기 때문이다."(잠언 22:9)

기민석 목사ㆍ한국침례신학대 구약성서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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