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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플레에 무릎 꿇은 인권외교

입력
2022.06.17 18:00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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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조 바이든(왼쪽) 미국 대통령과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 리야드=로이터 연합뉴스

조 바이든(왼쪽) 미국 대통령과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 리야드=로이터 연합뉴스

사막(중동)의 황혼은 오지 않았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바꿔 놓은 변화 중 하나는 중동 지정학이다. 이스라엘은 러시아의 천연가스 패권을 위협하고 이란과 베네수엘라는 끈끈한 반미 동맹을 구축했다. 미국은 체면을 구기고 사우디아라비아와 관계 개선에 나섰다. 원유 천연가스 등 중동의 에너지가 여전히 이런 변화의 동인이다. 의외인 이스라엘 부상도 천연가스가 없다면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 이스라엘은 해저에서 매장량 1조㎥ 규모 천연가스가 확인되자 주변국과의 갈등도 줄고 있다. 요르단 이집트에 수출하고 있고 15일엔 유럽연합(EU)까지 찾아와 공급계약을 맺었다. 이탈리아 터키도 에너지 협력을 하자며 손을 내밀 정도다. 러시아의 에너지 패권을 무력화하기에 턱이 없지만 유럽의 숨통은 트일 것이란 기대가 높다. 베네수엘라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은 11일 이란을 방문해 에너지 국방 등 포괄적 분야 협력에 서명했다. 서방제재 완화 전망 속에 보조를 맞춘 행보다.

□ 최대 반전은 조 바이든 미국 정부와 사우디 관계다. 언론인 카슈끄지 살해, 예멘 초토화 작전에 진저리를 친 바이든은 사건 배후인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를 국제사회 왕따로 만들겠다고 공언했다. 하지만 화가 난 빈 살만이 전화도 받지 않자 바이든은 결국 7월 중순 직접 찾아가기로 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바이든 처지는 안타깝지만 러시아 제재로 인한 하루 원유 부족분(100만 배럴)을 상쇄할 곳은 사우디가 유일하다. 세계 2위 원유 매장국이자 생산국으로 순위가 한 단계 밀려났어도 시장 지배력은 여전하다.

□ 미국 대통령 전화 한 통에 원유시장 안정자를 자임하며 증산 펌프를 돌리던 과거의 사우디도 아니다. 글로벌 인플레와 공급망 문제는 사우디 입지를 더욱 탄탄하게 만들고 있다. 그래선지 바이든이 찾아가겠다는 데도 크게 내키지 않는 표정이다. 왕세자를 모욕한 것에 사과까지 하라는, 고개만 숙이지 말고 무릎까지 꿇으라는 분위기다. 36세 원유부국 실세에게 굴복한다고 증산이 이뤄지고 유가가 떨어지리란 보장은 없다. 그럼에도 정치적 명분을 접고 사우디를 찾는 모험을 할 수밖에 없는 80세 바이든을 보면, 사막의 황혼은 아직 먼 얘기 같다.

이태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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