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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에 쫓겨난 '제자리 실향민'들...흔적없는 고향터엔 쓸쓸한 망향비만이

입력
2022.04.23 04:30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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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덕
김시덕문헌학자

편집자주

도시는 생명이다. 형성되고 성장하고 쇠락하고 다시 탄생하는 생로병사의 과정을 겪는다. 우리는 그 도시 안에서 매일매일 살아가고 있다. 과연 우리에게 도시란 무엇일까, 도시의 주인은 누구일까. 문헌학자 김시덕 교수가 도시의 의미를 새롭게 던져준다.

<26> 망향비를 따라 울산을 걷다

'실향민' 하면 아마도 한국전쟁 당시 공산주의 정권을 피해 남한으로 피란 온 사람들부터 떠오른다. 나 역시 실향민 가정 출신이다. 하지만 북한에서 내려온 실향민 외에 또 하나의 거대한 실향민 집단이 한국에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이 실향민은 날이 갈수록 늘어난다. 바로 '제자리 실향민'이라 부르는 사람들이다. 자신이 살던 집과 마을이 대규모 개발 프로젝트 부지로 수용되는 바람에, 고향을 떠나야 했던 사람들을 가리킨다.

1989년 제1기 신도시 사업 때 고향인 경기 성남시 분당지역을 떠나야 했던 동간마을 사람들이 있다. 동간마을은 지금 분당과 수서의 경계에 아파트단지로 바뀌어 있다. 동간마을 실향민들은 1993년 아파트단지 뒤편의 근린공원에 옛 시절 연자방아와 함께 '동간마을 모향비'라는 망향비를 세웠다.

망향비는 이렇게 적고 있다. "그러나 참아야지 새길을 찾아야지 / 멀지않은 새터에다 새집을 마련하고 / 고향터를 바라보며 더 깊은 정 이루리라."

비석 뒤편에는 망향비를 세운 이유가 적혀 있다. “이제는 개발과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진 정 깊던 터전과 그 시절의 모든 정경이 못내 아쉬워서 이 기념비를 뜻 모아 세운다.“

분명 고향 땅이지만, 그곳에 가보면 이제 옛 고향 모습은 전혀 찾아볼 길이 없다. 이런 경험을 하는 제자리 실향민은, 언젠가 북한에 가면 고향 땅이 예전 모습 그대로 남아 있으리라 믿는 실향민들과는 또 다른 맥락에서 상처가 크다.

온산의 실향민들

온산 망향비 공원. 2020년 10월. 김시덕 제공

온산 망향비 공원. 2020년 10월. 김시덕 제공

많은 제자리 실향민이 양산된 곳이 울산이다. 반세기 전 공업화의 결과다.

울산 온산공업지대 한복판에 망향비가 서 있다. 1974년 온산국가산업단지 건설로 고향 땅을 떠나야 했던 사람들이 2010년에 세운 비석이다. 이 망향비를 읽어보면, 온산의 제자리 실향민들도 동간마을 사람들과 똑같은 상처를 입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 우리는 누군가가 고향이 어디냐고 물어오면 온산국가산업공단이라 답해야만 한다. 차라리 우리들 고향이 북한이라면 언젠가 통일이 되어 갈 수라도 있으려만, 차라리 우리들 고향이 수몰되었다면 잠수하여 볼 수라도 있을 것을… 설사 남아있는 곳이라 해도 높은 굴뚝 옆의 그곳은 이미 그 옛날의 그곳이 아니더라."

고향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서글픔이 배어난다.

용연마을 사람들의 한

용연 옛터비. 2020년 10월. 김시덕 제공

용연 옛터비. 2020년 10월. 김시덕 제공

울산 신항과 주변 공단을 만드느라 고향을 떠난 용연마을 사람들은, 예전 고향터에 '용연 옛터비'라는 망향비를 세웠다. 망향비의 마지막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나라의 발전을 생각하는 우리들의 큰 뜻이 있었기에 산업화의 물결을 수용한 것임을 밝혀두고자 하며 아울러 이 땅이 누구의 땅이 되든 어떤 용도로 쓰이든 축복 속에 번창하길 기원하는 바이다."

고향 땅을 떠나는 것은 마음 아프지만, 국가 발전을 위해 떠나겠다는 말이다. 전국 곳곳에 세워진 망향비엔 이렇게 나라 발전을 위해 기꺼이 실향의 아픔을 감수한다는 글귀들이 많이 나오는데, 가장 애절한 한 구절이기도 하다.

황암 옛터비. 2020년 10월. 김시덕 제공

황암 옛터비. 2020년 10월. 김시덕 제공

'용연 옛터비' 비문을 쓴 옛 용연마을 주민 장정국 선생은, 이 마을 부지에 공장이 들어설 SK에너지에서 근무했다. 그리고 하필이면 자신의 고향집에 세워질 원유저장탱크를 기초 설계하는 일을 맡았다. 그는 제자리 실향민이 된 심정을 이렇게 말한다. "고향을 지척에 두고도 갈 수 없다는 사실은 묘한 슬픔이 쌓이게 합니다. 강원도 두메산골이어도 좋으니 고향마을이 보존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지요. 아이들에게 고향을 물려주지 못했다는 것이 가장 아쉽습니다."

1980년 7월 7일자 동아일보 '온산 공해·이주 늑장 공단 주민 이중고'(왼쪽), 1985년 4월 23일자 동아일보 '온산공단 주민 이주시키기로'.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80년 7월 7일자 동아일보 '온산 공해·이주 늑장 공단 주민 이중고'(왼쪽), 1985년 4월 23일자 동아일보 '온산공단 주민 이주시키기로'.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용연마을은 한국의 공해를 상징하는 지역으로서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1995년 6월 26일 자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에, 용연국민학교 뒤로 산업쓰레기가 산처럼 높이 쌓인 사진이 실린 것이다. 용연국민학교는 울산에서 공업단지 조성공사가 시작된 1962년에 개교했지만, 워낙에 주변 지역 공해가 심각해서 36년 뒤인 1998년 폐교했다. 온산 지역 주민들을 이주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나던 1980년 7월 7일 동아일보에 실린 '온산 공해·이주 늑장 공단 주민 이중고'라는 기사에는, 마을 위로 공장의 컨베이어 시스템이 지나는 충격적인 사진이 실리기도 했다.

용연마을을 포함한 개운포 지역 주민들이 공단 한복판에 조성한 망향비. 아라비아 출신의 처용이 이 개운포를 통해 신라로 들어왔다는 전설이 있어서, 망향비에는 처용무를 추는 사람들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2020년 10월. 김시덕 제공

용연마을을 포함한 개운포 지역 주민들이 공단 한복판에 조성한 망향비. 아라비아 출신의 처용이 이 개운포를 통해 신라로 들어왔다는 전설이 있어서, 망향비에는 처용무를 추는 사람들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2020년 10월. 김시덕 제공

온산 지역의 공해는 '온산병'이라는 이름의 환경 질환을 지역 주민들에게 발생시켰다. 1985년 경제기획원이 작성한 '울산·온산공단 피해 주민 이주대책(안)'을 보면, 정부가 공해병의 존재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정부는 끝내 온산병이라는 공해병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은 채 지역 주민들을 다른 곳으로 이주시킴으로써 사태를 무마해버렸다. 이주할 때에도 충분한 보상금을 책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도시로 흘러들어 빈민층이 되었고, 원래 살던 오염된 고향으로 되돌아와 농업·어업을 재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처용이 왔다는 전설이 있는 처용암 주변의 옛 세죽 마을 실향민들이 세운 처용가비와 세죽옛터비. 2020년 10월. 김시덕 제공

처용이 왔다는 전설이 있는 처용암 주변의 옛 세죽 마을 실향민들이 세운 처용가비와 세죽옛터비. 2020년 10월. 김시덕 제공

1995년 6월 2일 자 한겨레 ''온산병'에 집단 이주, 버려진 공해의 땅' 기사에는, 이주 대상 주민들이 고향으로 되돌아와 오염된 바다에서 미역을 양식해서는, 자신들은 이 미역을 먹지 않고 산지를 숨겨 타지로 판매한다는 내용이 실렸다. 폐광산 주변의 오염된 토양에서 농사를 지은 농민들이, 카드뮴 쌀을 자신들은 먹지 않고 산지를 속여 타지로 판 것과 비슷한 일이 울산에서도 일어난 것이다.

공단 조성 및 공해로 인해 이주한 양죽마을 주민들이 세운 망향비. 2020년 10월. 김시덕 제공

공단 조성 및 공해로 인해 이주한 양죽마을 주민들이 세운 망향비. 2020년 10월. 김시덕 제공


수몰지역 실향민들

대암댐 건설로 수몰된 둔기마을 주민들이 세운 망향비. 2020년 10월. 김시덕 제공

대암댐 건설로 수몰된 둔기마을 주민들이 세운 망향비. 2020년 10월. 김시덕 제공

향토사학자 김진곤 선생은 울산의 제자리 실향민을 크게 세 부류로 나눈다. 첫 번째는 1962년 이후 공장부지를 확보하기 위해 마을들을 수용하면서 발생한 이주민, 두 번째는 온산처럼 환경오염이 심각해서 발생한 이주민, 세 번째는 식수·공업용수를 확보하기 위해 댐을 건설하면서 수몰된 지역에서 발생한 이주민.

공업도시가 되면서 급속히 인구가 늘어난 울산에는 선암 사연 대암 회야 대곡 등 댐도 많이 건설됐다. 1986년 회야댐 건설로 고향이 물에 잠긴 중리·신전·신리·통천마을 주민들은 망향비에 이렇게 적고 있다. "울산광역시 시민의 식수원인 회야댐을 축조함으로써 조상님들의 혼과 얼이 담겨 있는 고향을 물 속에 두고 정든 고향산천을 뒤로하고 떠났다."

특히 유명한 곳이 대곡댐이다. 대곡댐 건설로 반구대 암각화가 수몰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타지 사람들은 대곡댐이라고 하면 반구대 암각화와 신라시대 무덤만 기억하지만, 대곡댐으로 인해 고향을 떠난 제자리 실향민들은 모두가 잊고 있다.

대암댐 주변에 복원된 신격호 전 롯데회장의 생가. 2020년 10월. 김시덕 제공

대암댐 주변에 복원된 신격호 전 롯데회장의 생가. 2020년 10월. 김시덕 제공

대암댐으로 수몰된 둔기마을은 롯데그룹 창업자인 고 신격호 회장의 고향이기도 하다. '둔기마을 망향비'에는 “둔기는 울산의 명산인 문수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어 그 정기를 받은 영산 신씨의 신격호는 세계적인 재벌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1969년 대암댐으로 수몰됨에 따라 70여 호가 되었던 마을주민은 뿔뿔히 흩어져 고향을 떠났다"는 사연이 적혀 있다.

KTX 울산역 부지에 수용된 신화리의 망향비와 당나무. 2020년 10월. 김시덕 제공

KTX 울산역 부지에 수용된 신화리의 망향비와 당나무. 2020년 10월. 김시덕 제공

울산에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제자리 실향민이 탄생하고 있다. 가장 최근에는 KTX울산역을 짓느라 신화리 주민들이 제자리 실향민이 되었다. 혹시 KTX를 타고 울산역에 내릴 기회가 있다면 바삐 차를 타고 그곳을 떠나지 말고, 역 앞에 남겨진 옛 신화리 마을 당나무와 그 한쪽에 세워진 망향비를 잠시 보는 것도 좋겠다.

“조상님들의 얼과 혼이 담긴 정든 고향을 뒤로하고 울산광역시 울산 역세권 택지 조성으로 인하여 정든 고향 산천을 뒤로하고 떠나는 그 마음 정다운 고향 이웃 그리워 찾아와 쉬어 갈 망향비를 여기에 세운다.”

*울산의 김진곤·김정수 두 분 선생님께서 귀중한 자료들을 보여주시고 망향비가 세워진 현장을 구석구석 안내해주신 덕분에 이 글을 쓸 수 있었음을 밝힌다. 두 분 선생님께 이 자리를 빌려 감사드린다.

김시덕 문헌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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