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차별이 어딨어"... 젊은 여성들은 왜 불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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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차별이 어딨어"... 젊은 여성들은 왜 불만일까

입력
2022.03.26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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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되돌릴 수 없는 페미니즘

편집자주

젠더 관점으로 역사와 과학을 읽습니다. 역사 에세이스트 박신영 작가는 '백마 탄 왕자' 이야기에서 장자상속제의 문제를 짚어보는 등 흔히 듣는 역사, 고전문학, 설화, 속담에 배어 있는 성차별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번갈아 글을 쓰는 비평 전문가 이연숙 작가는 영화, 미술, 만화 등이 여성을 어떻게 그리는지를 통해 성별화된 감정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1992, 1993년 방영한 드라마 '아들과 딸'은 196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까지 만연했던 가부장제와 성차별 시대상이 담겨 있는 드라마다. 딸이란 이유로 집 안에서도 차별을 당한 후남이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고된 하루를 살아가는 모습. 유튜브 캡처

'성차별은 우리 할머니나 어머니 세대나 있었고 지금은 없다. 차별받고 고생은 할머니 어머니 세대 여성들이 했는데 왜 별로 차별받아본 적도 없는 요즘 젊은 여성들이 불만인가?'라는 의견을 댓글에서 많이 읽었다. 의견주신 애독자님들을 위해 이번 글을 준비했다.

14, 15세기 유럽에서는 대규모 농민봉기가 많이 발생했다. 1358년 프랑스에서 자크리의 난, 1381년 영국에서 와트 타일러의 봉기, 1395년 스페인에서 카탈로니아 농민 봉기가 일어났다. 정점은 1524년에 독일어권 지역에서 일어난 농민 전쟁이었다.

전 시대에도 영주에 저항한 농민들의 봉기는 많았지만 요구를 들어 주거나 주동자를 처벌하면 해산하는 1회성 봉기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 시기의 농민 봉기는 달랐다. 규모가 커진 데다가 기존 체제에 도전하는 성격을 지녔다. 와트 타일러가 봉기 당시에 외친 말이 15세기 내내 유행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아담이 밭을 갈고 이브가 베를 짤 때 귀족이 있었던가?"

왜 이들은 14세기 후반에서 15세기에 집중적으로 대규모로 봉기하게 되었을까? 그 이전 시대의 농민들보다 살기가 더 힘들어져서? 아니다.

흑사병이 무너뜨린 권력구조

패스트(흑사병)를 모티브로 한 '죽음의 춤' 그림. 위키피디아 캡처


1300년께, 소빙하기의 이상 기후로 유럽에 기근이 들었다. 설상가상으로 1348년, 페스트(흑사병)가 번지기 시작했다. 영양실조로 면역력이 낮아진 유럽인은 전체 인구의 3분의 1이 사망했다. 인구가 줄어 일손이 부족하게 되자 생산성 낮은 토지는 버려졌다. 경작지 면적이 줄어 곡물 수확량이 줄어들었다. 페스트로 인구가 감소하자 곡물 수요도 줄어 곡물 가격은 떨어졌다.

장원에서 난 농산물에 의존하는 영주의 수입은 줄어든 반면 노동력 부족으로 임금은 높아졌다. 영주는 직영지를 경작할 일손을 구하지 못하게 되자 토지를 빌려주고 임대료를 화폐로 받았다. 돈을 받고 농노를 해방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페스트에서 살아남은 농민은 이전 중세시절보다 지위가 향상되었다.

중세 농노의 삶은 비참했다. '뿔 없는 소'라고 불릴 정도였다. 영주는 그 지역의 실질적 지배자였다. 중세 영주와 농노의 관계는 지주와 소작농 관계와 다르다. 영주에게는 사법권이 있었기 때문이다. 영주는 토지에 대한 세금을 걷고 부역을 강제하고 장원의 영민을 꼼꼼히 착취했다. 인두세, 상속세, 혼인세를 걷고 공용 화덕이나 방앗간 등 생활에 필요한 시설을 강제로 이용하게 하여 사용료를 받았다. 결정적으로 영주에게는 생살여탈권(生殺與奪權·살리고 죽이는 것을 맘대로 할 수 있는 권리)이 있었다. 그러나 페스트로 인한 장원의 붕괴는 영주의 경제는 물론, 권력 기반도 무너뜨렸다. 해방된 농노에게는 사법권을 행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편, 일부 지역의 영주는 악화된 경제 상황을 만회하기 위해 세금을 올리고 농민을 더욱 착취하려 들었다. 경작보다 목축을 택하고 양을 키우기 위해 마을 공유지에 울타리를 쳐서 농민들을 내쫓기도 했다. 숲과 공유지에 의존하던 농민들이 반발하자 영주는 형벌과 벌금으로 대응했다. 이에 페스트에서 살아남은 농민들은 봉기했다.

각성과 저항 경험의 힘

독일 농민전쟁 중 농민들이 기사를 둘러싸고 있는 모습을 그린 삽화. 위키피디아 캡처


페스트가 유행하던 시절, 사람들이 동시에 대규모로 죽어가는 산지옥을 본 중세인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아무리 기도하고 회개해도 소용없었다. 이제 교회와 영주가 가르치는 대로 고된 현실을 참고 일하다 죽은 후에 천국에 가기를 원하던 농민들은 다르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원했다. 현세에서 천국을 누리기를,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기를. 그리하여 14세기 후반 이후 서유럽 농민들은 현실의 압제에 대규모 무력봉기로 저항하게 된다.

가장 대규모 농민봉기인 독일 농민전쟁을 살펴보자. 지금의 독일, 스위스와 오스트리아 지역에서 1524년부터 1년간 대략 20만 명에서 30만 명에 이르는 가난한 농민과 도시 하층민이 참가했다. 이들이 '농민 강령 12개조'에서 요구한 내용에는 인신 예속을 폐지하고 부역을 줄일 것, 영주의 자의적 사법권 행사를 규제할 것 등 봉건적 예속에 저항하는 급진적 조항이 있다. 봉건 영주 세력은 무자비한 진압으로 답했다. 농민군의 봉기에 영향을 준 종교 개혁가 루터는 영주 편을 들었다. 약 10만 명이 희생당하고 봉기는 실패로 끝났다.

16세기가 되자 페스트로 줄어든 인구는 이전 수준으로 회복되었다. 그러나 농민 봉기 이후 서유럽 대부분 지역의 영주는 과거의 봉건 영주 지위로 다시 돌아갈 수 없었다. 농민들이 변했기 때문이었다. 비록 실패했더라도, 각성해서 힘을 모아 저항해 본 경험을 가진 자들은 결코 과거로 돌아갈 수 없는 법.

카를 마르크스는 독일 농민전쟁을 '프랑스혁명 이전 유럽에서 일어난 가장 주목할만한 민중봉기'라고 평가했다. 여기서 '프랑스혁명'이 기점이 되는 것은 역사적으로 중세적 신분제도가 그때 폐지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프랑스혁명은 1789년에 일어났다. 왜 이때였을까? 이 시기 농민들의 상황이 그 이전 17세기 혹은 더 이전의 중세 시대보다 더 나빠서였을까? 아니다.

대혁명을 일으킨 '명분 없는 억압'

1789년 프랑스 혁명의 서막이 된 바스티유 감옥 습격. 위키피디아 캡처


18세기 농민들은 그 이전보다 더 잘 살았다. 프랑스의 경우, 페스트 대유행 후 14세기 중엽 정도면 농노제가 사라지고 봉건적 의무가 줄어들기 시작한다. 일부 지역에 남아 있던 농노제는 프랑스혁명 때에 완전히 폐지된다. 혁명 정부가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을 선포하여 종교와 신분에 따른 차별을 없애고 법적 평등을 보장하기 전까지 프랑스에는 출생에 따른 신분제 차별이 굳건했다.

초기 중세 사회는 성직자와 세속인,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 자유민과 비자유민 등 대립한 두 집단으로 나뉘었다. 대개 직업이나 기능으로 구분한 것이기에 고정된 신분제도는 아니었다. 8, 9세기에 봉건제도가 성립하면서 소수의 전사 집단이 지배 계급이 되었다. 크리스트교의 사제는 전사의 폭력성을 다스려 그들을 교회와 종교의 보호자로 만들려고 했다. 봉건 영주가 된 전사 귀족들은 교회가 내민 손을 잡았다. 신의 뜻을 빌려 피지배민들을 순종하게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기도하는 사람, 싸우는 사람, 일하는 사람 즉 사제, 전사, 농민이란 중세의 세 위계가 성립한다. 11세기부터 세 위계는 신분제로 변한다. 프랑스에서는 삼신분제로 정착한다. 제1신분은 성직자, 제2신분은 귀족, 그 외는 제3신분이었다. 이러한 중세적 신분 질서를 구체제, 앙시앵 레짐(ancien regime)이라고 부른다. 프랑스 대혁명 때까지 이어진 절대 군주 정체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한다.

혁명 당시 제1신분과 제2신분은 프랑스 인구의 약 2%였지만 대부분의 경작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두 신분 모두 세금을 면제받았으며 고위 성직과 관직을 차지했다. 제3신분인 평민은 전체 인구의 약 98%였다. 대다수는 농민들이었다. 이들은 농노 신분에서 해방되어 자유민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구체제 아래에서 억압을 받고 전 시대에 비해 조금 경감되었지만 무거운 부담을 지고 있었다.

문제는 귀족들이 봉건적 부담금과 부역을 강요하던 애초의 명분이 다 사라졌다는 점. 중앙집권 국가가 완성된 후 귀족들의 군사적 기능은 사라졌다. 과거에 장원의 영민들에게 군사적 보호를 제공하던 귀족들은 이제 왕의 무도회에서 춤추고 있었다. 귀족들의 행정 기능도 사라졌다. 그들은 장원을 경영하지 않고 영지를 떠나 궁정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런데도 그들은 여전히 영주로서 영민의 세금과 부역, 복종을 요구했다. 농노 신분에서 해방되어 봉건적 의무는 점점 줄어들고 있었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농민에게 남아 있는 의무가 더욱 압제적으로 보였던 것이다. 점차 해방되는 경험을 해본 자들은 결코 과거로 돌아갈 수 없는 법.

요즘 여자들이 싸우는 이유

2020년 4월 대학생 페미니즘 연합동아리 '모두의 페미니즘' 활동가들이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텔레그램 n번방 사건' 방지법 제정을 촉구하고 있다. 뉴스1


14, 15세기의 유럽 농민전쟁이든, 18세기의 프랑스 혁명이든, 봉기와 혁명은 가장 억압받던 정점에 일어나지 않았다. 억압의 제도가 일부 사라지거나 파괴되어 갈 때 발생했다. 역사적으로 모든 봉기와 혁명이 발생하는 패턴이 이렇다. '차별받고 고생은 할머니와 어머니 세대 여성들이 했는데 왜 별로 차별받아본 적도 없는 요즘 젊은 여성들이 불만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도 이 패턴에 있다.

맞다. 지금의 젊은 여성들은 덜 차별받고 살기 편해졌다. 그 점이 바로 요즘 젊은 여성들이 싸우는 이유다. 제도적 차별이 일부 시정되고 '남존여비' 등 차별을 정당화하던 명분이 사라졌기에 남아 있는 차별이 더욱 억압적으로 느껴지고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가증스러워 견디기 힘들기 때문이다.

어쩌면 앞의 질문은 답이 궁금한 것이 아니라 '예전 여성들처럼 참고 복종하라'는 말을 하고 싶어서였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각성해서 힘을 모아 저항해 본 경험을 가진 자들은, 점차 해방되는 경험을 해본 자들은 결코 과거로 돌아갈 수 없는 법.

덧. 여성이 차별받는 현실에 대해 비교를 하려면, 다른 세대 여성들이 아니라, 같은 세대/지역/계급 남성들과 하는 것이 옳다.


박신영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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