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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로가 놓친 '이야기꾼' 소설가 천명관, 28년 만에 감독 데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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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로가 놓친 '이야기꾼' 소설가 천명관, 28년 만에 감독 데뷔

입력
2022.03.22 04:30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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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개봉하는 영화 '뜨거운 피' 연출
"다음 영화는 제 소설 원작으로"

영화 '뜨거운 피'를 연출한 소설가 출신 천명관 감독. 그는 "이번 영화에선 제가 제일 자신 있다고 생각하는 코미디가 잘 통하지 않아 자존심이 조금 상했다"면서 "제 소설 ‘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를 영화화할 다음 작품에선 꼭 코미디를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키다리스튜디오 제공

영화 '뜨거운 피'를 연출한 소설가 출신 천명관 감독. 그는 "이번 영화에선 제가 제일 자신 있다고 생각하는 코미디가 잘 통하지 않아 자존심이 조금 상했다"면서 "제 소설 ‘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를 영화화할 다음 작품에선 꼭 코미디를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키다리스튜디오 제공

한국영화 역사상 충무로 입성 후 감독 데뷔에 가장 오랜 시간이 걸린 인물. 23일 개봉하는 영화 ‘뜨거운 피’를 연출한 천명관(58) 감독이 그 주인공이다. 물론 비공식 기록이다. 시나리오 작가 데뷔작인 영화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이 1994년 개봉한 이후 감독 데뷔작 ‘뜨거운 피’가 개봉하기까지 흐른 시간은 무려 28년. 충무로가 놓친 이 이야기꾼은 그 사이 소설가로 변신해 괴력을 과시하며 독자들을 사로잡았다. ‘고래’ ‘고령화 가족’ ‘나의 삼촌 브루스 리’ 등이 그 증거다.

21일 화상으로 만난 천명관 감독은 “시나리오 작가로 일하던 30대 때는 나이보다 어려 보이고 왜소한 모습 때문인지 문학청년처럼 생겼다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요즘엔 어떻게 봐도 감독처럼 생겼다고 해서 이제야 감독 이미지를 갖게 됐나 생각했다”며 웃었다.

2016년 출간된 동명 소설을 극화한 ‘뜨거운 피’는 부산 변두리 가상의 포구 마을 구암을 둘러싼 두 조폭 집단의 충돌을 그린다. 도박 빚에 시달리며 비루한 삶을 보내는 희수(정우)는 성인오락기 납품으로 돈을 벌어 건달 생활을 벗어나는 것이 꿈이지만, 이웃동네 조직 영도파가 구암을 집어삼키려 모략을 꾸미면서 계획이 꼬이기 시작한다. 천 감독은 “조직원들이 검은 양복을 입고 몰려다니며 구역 싸움을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세탁공장을 운영한다거나 술집에 보드카를 공급하는 등 건달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먹고사는지를 설득력 있게 그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원작 소설은 오랫동안 친하게 지내던 김언수 작가가 썼다. 천 감독은 술자리에서 김 작가에게 소설의 바탕이 되는 이야기를 듣고 글로 써보라고 권하기도 했다. 연출 제안은 평소 가깝게 지내던 영화제작자가 먼저 했다. 책이 출간되기도 전이었다. “처음엔 내가 다른 작가의 이야기로 데뷔한다는 게 좀 웃기지 않나 싶어 몇 번 거절했죠. 결국 승낙을 한 건 소설이 너무 재미있어서였어요.”

영화 '뜨거운 피' 중 한 장면. 키다리스튜디오 제공

영화 '뜨거운 피' 중 한 장면. 키다리스튜디오 제공

'뜨거운 피'로 감독 데뷔하기까지 천 감독은 오랜 기간 '방외인'으로 살았다. 그가 자전적 소설 ‘20세’에서 주인공을 표현한 단어이기도 하다.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골프숍 직원, 보험판매원으로 일하며 지냈던 자신의 20대 시절에 대한 묘사였다. 영화 ‘총잡이’ ‘북경반점’ ‘이웃집 남자’까지 4편의 시나리오를 쓴 뒤에도 크게 바뀌지 않았다. 유학파나 명문대 출신, 영화 전공자들이 지배하는 영화계에서 그는 철저히 방외인이었다. 스타 작가가 된 뒤에도 문단의 권력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다.

“어떤 때는 좀 서글프기도 하고 외롭기도 하죠. 그런 기분으로 사는 건 무척 지치는 일이에요. 영화과나 문창과를 나온 친구들은 다들 ‘내가 멋진 작품을 만들어서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욕망이 있잖아요. 주변이 다 같은 부류이니까. 제겐 그런 ‘주변’이 없었어요. 반면 그런 게 없어서 자유로운 것도 있었죠. 자유로운 상상력은 제가 갖고 있는 가장 큰 장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천 감독의 소설 중 ‘고령화 가족’은 2013년 송해성 감독이 영화로 만들었다. ‘고래’와 ‘나의 삼촌 브루스 리’도 판권이 팔려 영화나 드라마로 제작될 예정이다. 한때 두 작품의 연출 제안을 받은 적도 있지만 엄두가 나지 않아 거절했다고 한다. 대신 차기작으로 자신의 소설 ‘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를 준비 중이다.

“2년 전 코로나19로 개봉이 미뤄졌을 때 ‘정말 온 우주가 나를 막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지만 그 덕에 오히려 후반작업과 편집에 공을 더 들일 수 있게 됐어요. 전화위복이 된 거죠. 마찬가지로 제가 마흔이 될 때까지 감독 데뷔를 못해서 ‘어쩌면 이렇게 안 풀릴 수 있을까’ 싶었는데 소설가가 됐잖아요. 일찍 데뷔를 했으면 거장이 됐든 한두 편 만들다 사라졌든 어쨌거나 소설은 쓰지 않았을 겁니다. 소설가로 한 15년 살았는데 그렇게 제 인생이 채워진 게 아주 의미있고 재미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고경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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