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진군 산불 이재민, 임시신분증 발급받아 투표
사전투표자가 시험 삼아 투표지 재교부받기도
후보들의 유세전은 어느 때보다 치열했지만 투표 분위기는 차분했다. 20대 대선 선거일인 9일, 전국 투표소엔 자녀의 부축을 받은 118세 어르신부터 선거 연령 하향으로 투표권을 얻은 18세 고등학생까지 각자 소중한 한 표를 행사했다. 신분증까지 태워버린 산불 피해도 새로운 내일을 기대하는 투표 의지를 꺾지 못했다. 다만 투표 절차를 둘러싸고 크고 작은 마찰을 빚은 투표소가 있었고, 일부는 경찰까지 출동하는 소동으로 번졌다.
나이도 재해도 뛰어넘은 투표 행렬
경북 울진군에선 지난 4일부터 시작된 대형 산불로 대피 중인 주민 180여 명이 투표에 참여했다. 이들은 오전 8시 20분쯤 경북선거관리위원회가 마련한 버스 4대에 나눠 타고 지정된 투표소로 이동했다. 신분증이 불에 탄 일부 이재민들은 읍면 사무소에서 발급한 임시신분증을 제시했다. 김모(77)씨는 "집은 다 타버렸지만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투표는 당연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거동이 힘든 고령 유권자들도 투표에 나섰다. 광주광역시 최고령 유권자인 박명순(118)씨는 오전 10시쯤 북구 문흥1동 행정복지센터에 마련된 투표소를 찾았다. 1903년 태어난 박씨는 "좋은 대통령이 되면 좋겠다"며 "6월 지방선거에도 투표할 것"이라고 말했다. 충북 옥천군 최고령 유권자인 이용금(118)씨도 지팡이를 짚고 딸과 함께 청산면 팔음산마을회관에서 투표했다. 이씨의 딸은 "어머니가 투표를 다시는 못 할 줄 알았는데 기쁘다"고 말했다.
투표지 반출·촬영·훼손… 경찰 출동도
일부 투표소에선 유권자가 위법적 행위로 투표관리자들과 마찰을 빚었다. 강원 춘천시 중앙초에 마련된 투표소를 찾은 70대 남성 A씨는 신분증을 제출하고 투표용지를 받자마자 자신이 지난 5일 사전투표를 한 사실을 밝히며 "이미 투표한 사람에게 투표지를 또 주는 게 말이 되느냐"고 항의했다. A씨는 사전투표 과정에서 불거진 투표관리 부실 의혹을 확인하고자 본투표를 시도했다고 주장했고, 춘천시 선관위는 A씨가 공직선거법 163조(투표소 등 출입제한)와 248조(사위투표죄)를 위반했다며 경찰에 고발했다.
부산진구 부암1동 제2투표소에선 50대 여성 B씨가 휴대폰으로 자신의 투표용지를 촬영하다가 선거관리원에게 적발됐다. 선관위는 현장에서 해당 사진을 지우도록 했고 B씨를 경찰에 고발하기로 했다. 대구 남구 대명동의 한 투표소에선 60대 남성 C씨가 투표용지를 투표함에 넣지 않고 퇴장해 경찰이 추적에 나섰다. C씨는 기표를 잘못했다며 투표지 교체를 요구했다가 거절당하자 그대로 투표소를 빠져나간 것으로 알려졌다. B씨의 행위는 공직선거법 166조의2(투표지 촬영행위 금지), C씨는 투표지 탈취를 금지한 같은 법 244조에 저촉된다.
투표 과정 불신에 가짜뉴스도
기표용구를 둘러싼 마찰도 있었다. 경기 하남시 신장2동 투표소에선 한 유권자가 "도장이 제대로 찍히지 않았다"며 투표지 교체를 요구했다가 거부당하자 투표지를 찢는 일이 벌어졌다. 제주시 한경면의 투표소에선 유권자가 "도장이 잘 안 찍힌다"고 소리치며 항의했고, 부산 강서구 명지2동 제3투표소에선 한 여성이 "인주가 연하다"고 항의하며 새 기표용구를 받아 투표했다.
일각에선 투표지의 특정 후보자 기표란이 코딩돼 있어 기표 도장이 절반밖에 찍히지 않는다는 가짜뉴스도 떠돌았다. 중앙선관위 관계자는 "전혀 근거없는 소문일뿐더러 투표지에 절반만 기표되더라도 정규 기표용구임이 명확하면 유효로 처리한다"고 설명했다.
부산 북구 화명1동 제4투표소에선 60대 남성이 투표소 천장에 뚫린 구멍에 카메라가 설치된 것 아니냐고 항의하면서 선거관리원과 실랑이를 벌였다. 선관위는 해당 구멍을 테이프로 막은 뒤 투표를 진행했다. 대구 중구 남산2동 투표소에선 한 남성이 "투표관리관 도장이 (규정과 달리) 개인 도장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며 투표함 봉인지를 훼손했다.
투표 안 했는데 명부에 이미 서명돼
투표하지 않은 유권자가 이미 투표한 것으로 표기된 일도 잇따랐다. 경기 오산시 중앙동 제2투표소에선 유권자가 선거인명부에 서명하려다가 해당란에 자신의 이름이 쓰여 있어 투표하지 못했고, 부산 사하구 장림1동 제3투표소를 찾은 30대 유권자도 이런 이유로 투표권을 행사하지 못했다. 경북 예천군에서 같은 상황을 맞은 유권자는 별도 신원 확인을 거쳐 투표한 뒤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과 경북선관위는 동명이인이 잘못 서명했거나 명의가 도용됐을 가능성 등을 조사하고 있다.
선거관리원의 부적절한 처신도 문제가 됐다. 오전 9시 55분쯤 전주시 덕진구의 투표소에선 투표사무원이 여성 유권자의 신원을 확인하다가 "살이 쪄서 사진과 다르다"고 말했다가 경찰에 신고당했다.
서울 종로구 혜화동주민센터 투표소엔 사전투표 때처럼 시민단체 '부정선거감시단'이 출입구에 카메라를 설치했다. 단체 회원 이모(53)씨는 "직접 촬영한 선거인 수와 추후 발표되는 선거인 수를 대조해 부정선거 여부를 밝혀내겠다"고 말했다.
경찰은 이날 비상업무 최고 단계인 '갑호비상' 근무 체제를 발령하고 6만8,786명을 동원해 투표 경비에 나섰다. 경찰은 개표 종료 시간까지 연계 순찰 및 신속대응팀 출동 대기 등 우발 상황에 대비하고, 확진자 투표와 투표함 회송 시간대에도 집중 순찰 활동을 벌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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