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원유 확보 대안 베네수엘라 제제 완화 논의
사우디·UAE는 증산 요청 거부… 대러 제재에 걸림돌
中 러시아 원유에 관심… "에너지 동맹 강화할 수도"
미국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에 대한 최후의 제재로 8일(현지시간) 원유 수입 금지 카드를 꺼내면서 전 세계가 ‘오일 쇼크’ 공포에 떨고 있다. 영국도 올해 말까지 단계적으로 러시아산 원유 수입을 중단하고, 러시아 에너지에 절대적으로 의존해 온 유럽연합(EU)도 러시아산 천연가스 수입을 3분의 2가량 줄이기로 했다. 러시아산 원유 수입 금지는 에너지 수출이 국내총생산(GDP)의 30%를 차지하는 세계 3위 산유국 러시아에 치명타가 될 조치다. 그러나 국제유가 상승이 불가피하다는 점에서 미국은 물론 전 세계 경제에도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
세계적 에너지 위기의 당사자인 산유국들과 주요 에너지 소비국들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국제유가 안정을 위한 원유 증산 압박, 대(對)러시아 에너지 제재 동참 요구가 거세지고 있는 탓이다. 반면 중국과 러시아의 ‘에너지 동맹’은 한층 강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뜻밖의 수혜자 베네수엘라, 러시아 손절하나
원유 매장량 세계 1위를 자랑하는 베네수엘라는 반사이익을 볼 가능성이 크다. 미국이 러시아산 원유를 대체할 공급처로 낙점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금수 조치 발표에 앞서 지난 5일 베네수엘라에 고위급 대표단을 보내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을 만났다. 젠 사키 백악관 대변인은 7일 “에너지 안보를 논의했다”고 설명했다. 마두로 대통령도 “앞으로도 관심 사항에 대해 함께 노력해 나갈 것”이라고 화답했다.
과거 베네수엘라는 원유 생산량 대부분을 미국에 수출했다. 그러나 2019년 마두로 대통령의 부정 선거 의혹으로 양국 관계가 악화됐고, 당시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마두로 정권의 돈줄인 석유산업을 제재했다. 곧바로 베네수엘라 경제는 곤두박질쳤다. 경기 회복을 위해 제재 완화가 절실했던 마두로 정권에는 러시아산 원유 금수 조치가 미국과의 경색된 관계를 푸는 뜻밖의 기회가 된 셈이다.
헤이날도 퀸테로 베네수엘라석유협회 회장은 “하루 80만 배럴 수준인 원유 생산량을 120만 배럴까지 늘릴 수 있다”며 “북미 시장에서 필요한 양의 일부를 공급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영국 BBC방송에 말했다. 베네수엘라 정부는 8일 자국에 수감돼 있던 미국인 2명을 석방하며 화해의 손을 내밀었다.
미국 의회에선 “마두로 정권의 살인 통치에 새 생명을 불어넣어선 안 된다”(밥 메넨데스 상원 외교위원장)는 반발도 작지 않다. 그러나 미국이 그동안 인정하지 않았던 마두로 정권과 직접 대화에 나섰다는 것은 그만큼 러시아에 대한 제재 의지가 강하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또 남미에서 러시아의 가장 든든한 우방이었던 베네수엘라를 러시아로부터 떨어뜨려 놓는 부수적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다만 베네수엘라가 원유 시장 안정에 즉각적인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원유 시설 관리 부실과 투자 부족으로 생산량을 늘리는 데 시간이 걸릴 수 있다”고 짚었다.
냉담한 사우디, 미국에 등 돌리나
반면에 전 세계 원유 거래량 60%를 차지하는 세계 1위 원유 생산국 사우디아라비아는 냉담하다. 지난달 국제유가 안정을 위해 원유 생산량을 늘려 달라는 미국 요청도 단칼에 거절했다. 아랍에미리트(UAE)도 시큰둥하긴 마찬가지다. 두 나라는 하루에 200만~250만 배럴을 즉시 추가로 뽑아낼 수 있는 여력을 갖추고 있으나, 석유수출국기구(OPEC)와 러시아 등이 소속된 OPEC플러스가 합의한 하루 40만 배럴 증산 계획을 고수하고 있다.
사우디와 UAE는 미국의 전통적 안보 파트너로 꼽힌다. 그러나 바이든 행정부 출범 이후 관계가 다소 냉각됐다. 이란 핵합의 복원에 관한 견해 차, 이란의 지원을 받는 예멘 후티 반군의 미사일 테러에 대한 미국의 미온적 대응, 빈살만 왕세자가 배후로 지목된 사우디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살인 사건 등이 원인으로 거론된다.
백악관은 최근 무함마드 빈살만 사우디 왕세자와 UAE 모하메드 빈 자이드 알 나흐얀 왕세제에게 각각 전화 회담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은 미 행정부 관계자를 인용해 “전화 통화에 대한 기대가 있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며 “사우디산 원유 수도꼭지를 틀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고 보도했다. 미국 국가안전보장회의(NSC) 및 국무부 고위 관리들이 직접 두 나라를 방문해 설득에 나서기도 했으나 별다른 성과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워싱턴포스트는 “사우디와 러시아의 에너지 동맹은 OPEC의 힘을 강화하는 동시에 사우디와 UAE를 러시아에 더 밀착하게 만든다”고 분석했다.
대러 제제 불참한 중국, 러시아 원유에 군침
‘반미’ 기치 아래 러시아와 손을 맞잡은 중국은 러시아산 원유 금수 조치에 최대 걸림돌이다. 판로가 막힌 러시아가 중국 수출량을 늘려 당면한 위기를 타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제 성장을 위해 안정적인 에너지 수급이 절실한 중국에도 이득이다. 중국은 국제사회의 대러시아 제재 동참 압박에도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중국은 이미 러시아의 최대 고객이다. 지난해 하루 평균 160만 배럴을 수입했다. 전체 원유 수입량 중 러시아산이 차지하는 비중은 15.5%로, 사우디에 이어 두 번째로 많았다. 베이징동계올림픽 개막을 앞두고 러시아는 매년 100억㎥ 규모 천연가스를 중국에 공급하는 계약도 맺었다. 앞서 2014년에는 30년간 매년 380억㎥ 공급 계약도 체결했다. 두 차례 초대형 장기 계약으로 중국이 확보한 물량만 연간 480억㎥에 달한다. 여기에 값비싼 원유까지 좋은 조건으로 얻을 수 있다면 금상첨화다. 러시아와 중국 간 에너지 동맹이 더 강화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다만 운송과 대금 지불 과정에서 문제가 생길 소지가 있다. 유조선을 운영하는 선사들이 러시아산 원유 선적을 거부하는 데다 러시아가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ㆍ스위프트)에서 퇴출된 탓에 실무적 어려움에 부닥칠 가능성이 크다. 국제신용평가사 스탠다드앤드푸어스(S&P)는 “러시아산 원유를 구매하는 중국 업체들이 운송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거래를 자제하고 있다”면서도 “다른 나라들이 러시아산 원유 수입을 중단할 경우 남는 물량을 추가로 흡수하려는 수요가 있기 때문에 중국 정부도 현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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