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제재 전례·제도 없어 조치 늦어져
美 줄세우기, 한러관계... 난제 수두룩
한국도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 제재와 관련, 4일 미국의 ‘역외통제(FDPRㆍ해외직접제품규칙)’ 면제 대상국에 포함됐다. 처음엔 정부의 늦은 대응 탓에 ‘실기(失期)’ 논란이 불거졌지만, 전례 없는 조치라는 점에서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문제는 앞으로다. 사실상 ‘독자 제재’에 들어가는 만큼 미국의 동맹 줄세우기, 러시아의 반발 등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면밀한 대책 마련이 요구된다.
미국을 방문 중인 여한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은 3일(현지시간) 워싱턴에서 백악관ㆍ상무부 관계자 면담 후 특파원들과 만나 “FDPR 면제 대상 국가 목록에 한국을 포함하는 것으로 (미국 측과) 합의했다”고 밝혔다. 미 상무부는 조만간 관보에 관련 내용을 고시하고 시행할 계획이다.
FDPR은 미국 밖 외국기업이 만든 제품이라도 미국이 통제 대상으로 정한 기술을 사용했을 경우 수출을 금지할 수 있도록 한 제재 조항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자 미국은 지난달 24일 수출 통제 제재 방침을 발표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독자 제재에 나선 32개 국가에는 FDPR 적용 면제 방침을 공개했으나 한국은 여기서 빠졌다. 이어 한국이 1일 제재 계획을 공개했고, 한미 간 실무 및 고위급 협의를 거쳐 한국 역시 면제 국가 명단에 올리는 데 합의한 것이다. 외교부 당국자는 “한미 양국은 대러 제재 이행을 포함해 우크라이나 사태 해결을 위한 외교ㆍ경제적 조치를 계속 긴밀히 협의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대러 제재 왜 늦어졌나
한국이 FDPR 적용을 면제받게 된 이유는 FDPR 관련 품목에 대해 한국이 직접 수출을 통제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정책의 주체만 바뀌어 큰 틀의 경제적 효과는 비슷할 것으로 전망된다.
외교가에서 보다 주목하는 부분은 이번 결정이 미국의 동맹 관리에 미칠 영향이다. 미국이 각국 제재 동향을 협력 관계의 ‘리트머스지’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근거로 국내 일각에선 침공이 현실화한 지난달 24일엔 적어도 우리의 제재 계획이 나왔어야 한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미국이 발표한 FDPR 예외국에 포함된 32개 나라와 한국을 동일선상에 놓기 어렵다는 반론도 있다. 유럽연합(EU) 27개국은 2014년 크름(크림)반도 합병 당시 내놓은 제재를 살짝 손보기만 하면 되고, 일본과 영국, 캐나다 등은 주요 7개국(G7)에 속해 공조 책임이 훨씬 크다는 논리다. 민정훈 국립외교원 교수는 “미국과 동시에 제재 조치를 취해 외교적 카드를 소진하는 건 미국, 러시아 어느 나라를 상대하더라도 꼭 유리한 선택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여기에 한국은 북한을 빼고 정치적 이유로 특정국을 겨냥해 독자 제재를 단행한 전례가 없다. 미국은 수출관리규정(EAR) 외에도 행정명령이나 의회 차원에서 실행 가능한 제재 제도를 복합적으로 갖춰 손쉽게 다른 나라를 경제적으로 옥죌 수 있다. EU와 몇몇 주요국도 비슷하다. 반면 한국은 대외무역법에 기초한 포괄적 전략물자 수출통제 제도를 제외하면 독자제재를 가할 법적 근거가 없어 기존 제도하에서 우회로를 찾아야 한다. 외교부가 “한국과 미국의 수출통제 제도는 다르다”며 줄곧 신중한 태도를 강조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FDPR은 '불확실성 입구'... "복합 위기 대비해야"
FDPR 면제 대상에 들어갔다고 안심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미국과 EU는 러시아를 돕는 벨라루스에도 수출통제를 실시하는 등 추가 제재를 속속 내놓고 있다. 미국의 줄세우기를 따라야 할지 말지, 숙제가 계속 늘고 있는 셈이다. 정부는 “추가 제재 동참 여부는 알 수 없다”며 여전히 신중론을 고수하고 있다.
가뜩이나 한국은 다른 동맹국에 없는 북한 변수까지 고려해야 한다. 외교 소식통은 “러시아가 대북 이슈에서 결정적 도움을 주는 나라는 아니지만, 국제사회의 압박을 무력화하는 등 확실한 훼방은 놓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결국 우크라이나 사태는 한국에 ‘복합 안보위기’라는 난제를 안겼다. 익명을 요구한 국책연구기관 관계자는 “언제든 독자 제재 요구가 재연될 수 있고, 기술패권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각국에 적용되는 수출통제도 더욱 복잡해질 것”이라며 “제도 전반을 정비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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