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강 내려다보는 절벽 위 요새...고구려 남부 국경사령부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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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강 내려다보는 절벽 위 요새...고구려 남부 국경사령부였을까

입력
2022.03.12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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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기동
배기동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편집자주

우리 역사를 바꾸고 문화를 새롭게 인식하도록 한 발견들을 유적여행과 시간여행을 통해 다시 한번 음미한다. 고고학 유적과 유물에 담겨진 흥분과 아쉬움 그리고 새로운 깨달음을 함께 즐겨보자.


<17> 경기 연천 호로고루성

임진강 고랑포의 현무암 적벽 위에 자리한 호로고루성(타원 표시 부분)

호로고루, 이름이 왠지 대단히 토속스럽고 생소하게 들린다. 파주시 적성읍의 북쪽 임진강변 적벽 위에 오롯이 있는 고구려성의 이름이다. 자미성(紫眉城) 또는 재미성(財尾城)이라고도 부르는 이 성은 고구려가 처음 만들었지만, 신라와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사용되었다. 아주 작은 규모의 성이지만, 우리 민족사에서 남과 북의 문화 흐름을 함축하는 의미심장한 성이다.

성터는 일찍이 일제강점기에 확인됐다. 그러나 발굴은 1990년대 후반 토지박물관이 처음으로 실시하면서 그 정체가 알려지게 되었다. 남한지역에서 가장 풍부하게 고구려 유물들이 출토됐고 그 구조가 드러나면서 국가 사적 467호로 지정됐다. 아차산의 여러 고구려 보루들과 함께 대표적인 한강 유역의 고구려 유적으로 꼽히지만, 특히 임진강변에 자리한 호로고루성(瓠瀘古壘城)은 고구려가 남쪽으로 확장하는 과정과 통치의 실체에 대해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담고 있다. 성터의 끝에 서서 호로탄(瓠瀘灘), 즉 임진강을 내려다보고 있으면 이곳을 지나간 사람들의 애수가 느껴진다.

임진적벽이 이루는 최고의 절경

호로고루성 입구의 홍보관과 광개토왕비 복제품. 대동여지도상으로는 술탄(戌灘)으로 표기된 곳이다

자유로를 달리다 파주시 문산읍 당동리에서 꺾어 37번 국도를 타고 전곡 방향으로 향하면 ‘적벽(赤壁)’이라 불리는 현무암 단애(斷崖: 깎아세운 듯한 낭떠러지)가 강의 양쪽으로 이어진다. 적성읍을 조금 못 가서 나타나는 '황포나루'로 표기된 지점에서 새로 생긴 장남교다리를 건너 북행하다가 간판이 보이는 곳에서 좌회전하면 된다. 그리 멀지 않다.

과거에는 접근이 어렵고 볼거리가 없어 한적했지만, 지금은 주변이 깨끗이 정리됐다. 유적과 지역문화를 소개하는 관광안내소가 있고, 복제된 광개토왕비 옆으로 가을이면 해바라기밭이 성터 전면에 펼쳐지며 임진강과 멋진 풍광을 이뤄 항상 인적이 이어진다. 철원·평강지역에서 흘러온 현무암은 임진강에 침식돼 강을 따라 수직단애를 형성하는데, 다른 강에서 볼 수 없는 아주 특별한 풍광이다.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이 된 이유이기도 하다.

성안으로 통하는 남쪽 회랑. 성의 남쪽 끝자락과 임진강 사이의 통로다

성의 남쪽에 해당하는 강의 절벽에서 약간 물러나 성을 쌓았는데 이곳이 성문 역할을 했던 모양이다. 직사각형의 현무암을 쌓아올린 높은 성벽의 옆에 성안으로 들어가는 통로가 있다. 지금은 남아 있지 않지만 아마도 동문(東門)이 이곳에 있었을 것이다. 성 안으로 들어서니 초등학교 운동장만 한 확 트인 평평한 대지가 눈앞에 들어오는데 전면에 나타나는 임진강과 이루는 풍광이 감동적이다. 노을이 강하게 반짝이는 여울에 낚시를 던지고 있는 풍경이 마치 영화 속의 한 장면에 서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 정도다.

햇빛이 반사되는 고랑포 여울에서 낚시하는 사람들


천혜의 작은 요새

북편으로도 샛강이 현무암을 침식한 탓에 성은 평면이 삼각형으로 생긴 높은 대지 위에 위치한다. 동쪽에 쌓은 둑은 그 지점을 완전히 고립시킬 수 있게 한다. 그래서 삼면이 높이가 15m나 되는 절벽으로 되었고 한쪽 면은 성으로 차단돼 외부에서 접근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이스라엘이 로마군에 대항해 최후의 결전을 벌인 사해(死海) 옆 마사다(Massada) 유적을 떠오르게 한다. 그만큼 처절한 전투를 대비했고 자연 조건을 이용해 방어에 유리한 단단한 성이다.

남쪽에서 본 호로고루성. 수직 단애 위 삐죽한 이등변 삼각형의 대지에 쌓았다. 서쪽보다 동쪽 땅이 더 높다. 토지박물관 제공

'호로'라는 명칭에 대해 학설이 갈리고 있지만 한번 들어가면 나오기 어려운 호로병구조의 성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 호로고루성은 전체 길이가 400여m, 실제로 쌓은 성인 동벽은 90여m밖에 되지 않는다. 작은 성이지만 접근이 어렵고 방어하기 유리해 쉽게 함락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고구려군 남부지역사령부인가?

위에서 본 호로고루성 4차 발굴 모습. 사각형의 구덩이는 성에서 하천 역할을 한 집수정으로 바닥은 목재구조물이고 유기물층에선 탄화곡물과 동물뼈가 수습됐다. 오른쪽은 고구려 온돌건물지. 토지박물관 제공

뱀을 잡기 위해 성을 파헤치다가 속살이 드러나면서 성의 정체가 알려지게 된 것이라면 사람들이 웃을 일이다. 외부는 신라식 축성법으로 비교적 멀리서 가지고 온 화강편마암을 이용해 보강했는데, 드러난 고구려성은 강변에서 풍부하게 발견되는 현무암을 잘라 쌓았기 때문에 쉽게 구분된다. 성의 길이가 짧지만 유명한 안시성의 축조기법처럼 고구려의 전형적인 토목기법으로 쌓았다. 바깥에 목책을 세우고 내부에 판축을 만든 다음 돌을 양쪽으로 쌓아서 견고한 성을 만들었다.

호로고루성 치성 발굴 현장(왼쪽)과 복원된 모습. 신라축성과 고구려축성이 대비된다. 토지박물관 제공

성문은 동편 성벽의 남쪽으로 단애에 기대어 만들었다. 유일한 문이고 닫아걸면 들어가는 것이 정말 어려워 보인다. 정면에 튀어나온 성벽은 아마도 문을 방어하기 위한 치성(雉城: 성벽의 바깥으로 덧붙여서 쌓은 벽)이었을 것이다. 비슷한 구조인 당포성, 은대리성이 동쪽으로 연이어 임진강-한탄강의 북안에 있고 서쪽으로는 당포성이 있다. 모두 고구려가 축조한 것들이다. 임진강은 고구려로서는 물러설 수 없는 국경선이었을 것이다.

호로고루성에서 발굴된 연화문 고구려 와당(왼쪽 윗줄에서 시계방향으로), 호자(虎子)편, 흑색마연 짧은 목 항아리와 회갈색 곧은 목 항아리, 고구려 상고(相鼓) 악기편. 토지박물관 제공

호로고루성의 내부 발굴에서 고구려 와당(추녀 끝 기와) 등 여러 고구려 유물들이 수습되었는데 남한지역 고구려 유적 가운데 가장 많은 종류와 수량이다. 좁은 구역이지만 발굴된 와당이나 치미(기와지붕장식)편으로 미루어 기와지붕의 관아가 있었고 지위가 높은 사람이 거류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유물이다. 특히 방 안에서 소변을 볼 수 있는 토제 호자(虎子)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높은 신분의 귀인의 체류를 짐작하게 한다. 물을 모아 사용하는 우물이 있고 또 나중에 창고로 사용되었지만 저수조를 돌로 쌓아 만들었다. 열거한 성들의 배치로 미루어 보아 임진강은 고구려가 절대적으로 지키고자 했던 방어선이었다. 출토된 유물로 보건데 그중에서도 호로고루성은 이 성들을 거느리는 치소, 즉 사령부 역할을 했을 것이다.

한강 이남의 고구려의 미스터리

남하정책을 도모하던 장수왕(재위 413~490년)이 475년 한성을 함락하고 백제 개로왕을 죽인 후 백제는 공주로 천도하는데 역사기록에서는 고구려가 죽령과 남양만을 잇는 선에서 백제, 신라와 경계를 이루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고구려 유적으로서 호로고루성을 비롯한 임진강의 성들이 강을 따라 분포하고, 다시 한강 이북의 구의동과 중곡동 그리고 잘 알려진 아차산에 보루들이 확인되고 있다. 그 남쪽으로는 청주 청원의 남성곡성이나 대전 월평동의 목책성이 있을 뿐 고고학적 유적이 발견된 것이 별로 없다. 신라가 한강유역에 진출한 553년 이전에 군현을 설치하고 다스렸다고 하지만, 큰 성이나 관아 유적이 반드시 남아 있어야 함에도 거의 없는 것이다.

역사기록에 경주에도 주둔군이 있었고 가야에도 고구려의 남하로 인해 멸망한 집단이 있었다는 것을 보면 고구려가 한반도의 남쪽까지 도달한 것은 틀림없을 것이다. 그리고 장수왕이 세웠다고 추정되는 충주의 고구려비의 존재, 충주와 단양 사이에 열지어 있는 강돌을 쌓아 만든 적석총들, 곳곳에 분포하는 모죽임 천장(천장의 공간을 줄여서 쌓는 방식)의 석실묘들에도 불구하고 지역을 다스리는 관아지라고 할 만한 곳이 분명하게 남은 것이 없다는 점이 고대학자들의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고구려는 한강 이남의 땅을 어떻게 다스린 것일까? 혹자는 임진강이 고구려 통치의 남방한계선이고 그 이남 지역에서는 주둔하지 않고 길을 통해서 지배했다고 하는데 정말 가능한 일일까? 남하의 길목인 호로탄에서 가지는 의문이다.

호로탄을 지키다

황해 바닷물이 만조에도 고랑포 아래까지만 밀려오기 때문에 이곳은 하류와는 달리 배가 없어도 말을 타고 쉽게 강을 건널 수 있다. 다리가 없던 시대에는 평양과 서울을 연결하는 가장 중요한 길목이었고 임진강 물류의 중심지였다. 고대 삼국의 쟁패과정뿐 아니라 나당의 전쟁에서도 임진강은 접경지로서 충돌의 현장이었다. 한반도 내에서 남북 이동의 통로가 여럿 있지만 가장 중요한 육로가 바로 이곳 고랑포였다. 특히 역사적인 갈등의 시간에 이 지역을 통과해 남북으로 이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현대사에서도 1968년 김신조 일당이 이곳을 통과해 서울로 진입했고 한국전쟁 발발 시에도 전설적인 백선엽 장군이 이끄는 제1사단이 북한군 전차가 이곳으로 우회해 남하하는 것을 저지하려 한 곳이다.

역사의 길목인 호로탄(고랑포)에 석양이 비치는 모습과 1903년 고랑포구의 전경. 남북에서 오는 육로뿐 아니라 서해에서 임진강을 거슬러 오는 배들도 고랑포에서 짐을 풀었다.

신라도 한강유역 점령 이후 호로탄으로 고구려군이 남하하는 것을 막기 위해 맞은 편의 적성고개마루에 칠중성(七重城)을 축조하고 감악산 꼭대기에 석비를 세웠다. 비운의 신라왕 경순왕의 무덤이 이곳에서 서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있는데 아마 그 상여도 개성에서 이곳을 지나 양주와 광주를 거쳐 경주로 가려고 했을 것이다. 수많은 아프고 슬픈 역사들이 강물에 씻겨 갔을 것이다. 해가 개성의 송악산 언저리로 넘어갈 때 성터에 서서 금빛 비늘 가득한 황혼의 여울 풍경을 보는 순간, 시간이 멈추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글·사진=배기동 전 국립중앙박물관장·한양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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