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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틴, 유럽 최대 원전 점령...'핵 공포' 더 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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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틴, 유럽 최대 원전 점령...'핵 공포' 더 키웠다

입력
2022.03.04 19:42
수정
2022.03.05 02:50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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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군, 원전에 폭격 감행한 뒤 점령
"방사능 유출 시 체르노빌 10배 피해"
우크라이나에 전력 차단 타격 입히고
세계엔 핵 공포 심어 공세 수위 높여

4일 우크라이나 남동부 자포리자 원전이 러시아군의 포격을 받아 폭발이 일어난 모습. 자포리자 원전은 우크라이나에서 가동 중인 원자로 15기 중 6기를 보유한 대규모 단지로, 단일 원전 단지로는 유럽 최대규모로 평가된다. 자포리자=로이터 연합뉴스

4일 우크라이나 남동부 자포리자 원전이 러시아군의 포격을 받아 폭발이 일어난 모습. 자포리자 원전은 우크라이나에서 가동 중인 원자로 15기 중 6기를 보유한 대규모 단지로, 단일 원전 단지로는 유럽 최대규모로 평가된다. 자포리자=로이터 연합뉴스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남동부 자포리자에 위치한 유럽 최대 규모의 원전을 폭격까지 감행한 끝에 장악했다. ‘핵 전쟁’을 운운했던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결국 원전까지 손에 넣으면서 ‘핵 위협’이 현실화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커진다. 원전의 안전도 보장하기 어려워졌다. 혹여 방사능이 누출될 경우 ‘제2의 체르노빌’ 사태로 비화할 수도 있다. 원전 통제권을 빼앗으며 우크라이나에 전력 공급 차단이라는 타격을 입힌 러시아는 ‘핵 공포’라는 가장 압도적인 무기까지 얻으면서 공세 수위를 높일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 원전 점령, 방사능 공포 확산

미국 CNN방송과 로이터통신 등에 따르면 개전 9일째인 4일(현지시간)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 남동부 자포리자 원전 단지를 점령했다. 사흘 전부터 주민 수천 명이 원전 사수를 위해 ‘인간 바리케이드’가 되어 맨몸으로 러시아군을 막아 섰지만 역부족이었다. 포위망을 좁혀 온 러시아군은 이날 자정을 갓 넘긴 이른 새벽에 원전을 직접 타격하는 극단적 공격을 감행했다. 그 과정에서 비가동 상태였던 원자로 격실이 일부 훼손되고, 단지 내 훈련용 건물에 화재가 발생했다. 러시아군이 포격을 멈추지 않아 소방대 진입과 진화까지 수시간이 걸렸다.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화재가 원전 시설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고 직원들이 안전 조치를 취해 방사능 누출은 없었다고 우크라이나 규제당국이 알려왔다”고 밝혔다.

3일 우크라이나 남동부 자포리자 원전 인근 주민들이 원전을 지키기 위해 몸으로 장벽을 쌓아 러시아군을 막고 있다. 드미트로 쿨레바 우크라이나 외무장관 트위터

3일 우크라이나 남동부 자포리자 원전 인근 주민들이 원전을 지키기 위해 몸으로 장벽을 쌓아 러시아군을 막고 있다. 드미트로 쿨레바 우크라이나 외무장관 트위터

수도 키이우(키예프)에서 550㎞, 분쟁지 돈바스에서 200㎞ 떨어져 있는 자포리자 원전은 우크라이나에서 가동 중인 15개 원자로 중 6개를 보유한 대규모 원전 단지다. 유럽에서 가장 크고, 전 세계에선 9번째로 크다. 우크라이나 전체 전력 20~25%가 이곳에서 만들어진다. 자칫 포탄이 원자로로 떨어졌거나 건물 화재가 크게 번졌다면 사상 최악의 ‘환경 재앙’이 발생할 수 있었던 위기였다. 드미트로 쿨레바 우크라이나 외무장관은 “자포리자 원전이 폭발할 경우, 체르노빌 원전 참사보다 규모가 10배는 클 것”이라며 러시아군을 규탄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도 “원전 폭발은 유럽의 종말이자 소멸”이라며 “유럽이 긴급 조치를 취해 러시아군을 막아 달라”고 호소했다.

방사능 위험 없다지만… 원전 안전 우려

자포리자 원전은 강력한 격납 구조로 보호받고 있고, 비상사태를 대비한 예비 냉각 시스템을 갖추고 있어 체르노빌 원전보다 안전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영국에서 30년간 원전을 관리했던 토니 어윈 호주국립대 명예부교수는 “원전이 손상되지 않았다면 폭발이나 핵융해, 방사능 누출 가능성은 낮다”고 영국 가디언에 말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시설 피해가 크지 않을 때 얘기다. 더구나 자포리자 원전은 1984~1995년 건설돼 일부 원자로는 노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문가들이 “아무리 전쟁 상황이라고 해도 원전 자체를 공격하는 건 전례 없는 일”이라며 경악하는 이유다. 전쟁 시 희생자 보호 등을 규정한 제네바 협약에도 위배된다. 영국 비영리단체인 분쟁환경관측소 더그 위어 연구정책국장은 “원전은 국제 인도주의 법에 따라 ‘위험한 힘이 내포된 시설’로 지정돼 절대 공격해선 안 된다”고 비판했다.

개전 9일째인 4일 러시아군에 점령당한 우크라이나 최대 원자력 발전소인 자포리자 원전 위치. 뉴시스

개전 9일째인 4일 러시아군에 점령당한 우크라이나 최대 원자력 발전소인 자포리자 원전 위치. 뉴시스

더 큰 문제는 러시아군이 원전 안전을 유지할지 장담할 수 없다는 점이다. 환경단체 그린피스 활동가 로저 스파우츠는 “원전 관리는 숙련된 인력 수백 명이 필요하다”며 “러시아군이 점령하면 관리 능력이 제한적일 것”이라고 지적했다. 원자력 전문가인 숀 버니 활동가도 “전면전을 대비해 원전 안전 시설을 설계하는 나라는 없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핵 위협·전력망 통제… 일거양득 노렸나

러시아는 침공 초기부터 원전을 노렸다. 벨라루스 국경을 넘자마자 체르노빌 원전을 탈취했고, 키이우 인근 방사성 폐기물 처리장도 공격했다. 자포리자 원전도 집중 공략 대상이었다. 이에 우크라이나는 IAEA에 “전쟁 기간에 원자력 발전소 주변에 최소 30㎞ 안전지대를 마련해달라”고 긴급 요청하기도 했다.

러시아가 원전 점령에 사활을 거는 이유를 두고 핵전쟁 공포를 유발해 우크라이나와 서방의 대응력을 약화시키려는 의도라는 해석이 나온다. 실제 자포리자 원전 피격 소식에 미국, 유럽연합(EU), 캐나다 등은 즉시 비상 대응에 나섰고, 유엔안전보장이사회는 4일 오전 11시30분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 핵전쟁이 될 것”이라는 러시아 측 발언이 허언이나 과장이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을 러시아가 원전 탈취로 증명한 셈이다. 원전이 볼모로 잡힌 탓에 우크라이나군이 군사작전을 수행하기도 어렵게 됐다.

러시아군이 점령한 우크라이나 자포리자 원전의 3년 전 모습. AP 연합뉴스

러시아군이 점령한 우크라이나 자포리자 원전의 3년 전 모습. AP 연합뉴스

우크라이나 전력망 통제권을 얻은 것도 러시아군엔 큰 수확이다. 우크라이나에 전기가 끊기면 통신, 수도, 방송 등 기반 시설도 마비된다. 장기전을 준비해야 하는 우크라이나군과 시민들에게는 치명적이다. 러시아군은 이미 열병합발전소도 다수 폭격했다. 미국 하버드대 핵안보 전문가인 그레이엄 앨리슨 박사는 “러시아군이 주변 지역 전력 공급을 차단하기 위해 공격을 감행한 것으로 보인다”고 짚었다. 헤르만 할루셴코 우크라이나 에너지장관도 “우크라이나 전력망을 불안정하게 만들려는 시도”라며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인과 유럽인은 물론 자국민의 안전에도 무관심하다”고 비판했다.

김표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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