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보유액 77% 증가, 달러 비중 줄여
자력갱생형 경제로 체질 개선하며 대비
국제사회의 전례 없는 고강도 경제제재 예고에도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을 사실상 빼앗는 등 거침 없는 ‘마이 웨이’ 행보에 나서고 있다. 믿는 구석은 과거보다 훨씬 강해진 경제 맷집. 서방의 칼날을 예상한 러시아가 해외 금융 의존도를 낮추고 외화를 잔뜩 비축하는 등 자력갱생형 경제로 체질을 바꾸면서 대외 제재를 견딜 체급을 키웠다는 분석이다.
21일(현지시간) 미국 로이터통신과 CNN방송 등은 러시아 신용평가사 ACRA를 인용, 러시아 민간은행들이 지난해 12월 50억 달러(약 5조9,600억 원) 규모 외화를 확보했다고 전했다. 1년 전 같은 달(26억5,000만 달러)의 두 배 가까운 수준이다. 발레리 피벤 ACRA 선임이사는 “은행들은 작년 11월에도 21억 달러 외화를 반입했다”고 설명했다.
금융회사가 기축통화인 미국 달러 매입에 나선 것이 이례적인 일은 아니다. 다만 시점이 공교롭다. 러시아가 10만 병력을 우크라이나 국경에 배치하면서 전운이 짙어진 시점과 일치한다. 이미 ‘판’을 깔아둔 러시아가 향후 예상되는 서방의 압박에 대응하기 위해 선제적으로 두둑한 판돈을 마련해 뒀다는 해석이 가능한 대목이다. 로이터는 “미국 경제 제재를 염두에 둔 조치”라고 분석했다.
실제 이날 미국의 우크라이나 동부 도네츠크인민공화국(DPR) 루간스크인민공화국(LPR) 지역 대상 1단계 제재 조치는 대(對) 러시아 제재의 ‘예고편’ 성격이 강하다. 미국은 러시아의 침공이 현실화하면 더욱 강력한 제재를 단행하겠다고 경고한 상태다. 수출 통제, 국제 금융시장 퇴출로 러시아의 달러 조달 파이프를 끊고 현지에서 달러 씨를 말리겠다는 위협이다. 이 경우 각종 수출입 거래는 물론, 대외금융 업무 등에 차질을 빚어 러시아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입힐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는 끄떡 없다는 분위기다. 배짱의 근거는 가득 채워둔 외화 곳간이다. 지난해 말 기준 러시아 중앙은행 외환보유액은 6,306억 달러로 역대 최고치다. 2014년 크림반도 침공 이후 가해진 서방의 제재로 돈줄(달러)이 마르면서 2015년에는 보유액이 역대 최저 수준(3,560억 달러)까지 떨어졌던 쓰린 기억을 교훈 삼아 보유액을 확대한 결과다. 고립 상태에서도 경제활동과 정부 서비스가 계속 작동할 수 있도록 외화를 끌어 모았다는 뜻이다.
경제 체질도 대폭 개선했다. 탈(脫) 달러화가 대표적이다. 전체 외환 보유액 가운데 달러 비중은 2014년 47%에서 현재 16%로 떨어졌다. 달러의 빈자리는 유로화(30%) 금(23%) 위안화(13%) 등으로 채웠다. 이해 관계가 달라 제재에 머뭇거리는 일부 유럽 국가와 우방 중국 등을 제재 우회로로 이용할 심산으로 풀이된다. 미국의 제재가 가해지더라도 비축해 둔 외화로 루블화 가치를 유지할 수 있다.
게다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지출을 줄여 전체 부채 규모를 외환보유액의 3분의 2 이하로 유지해왔다. 애덤 투즈 미 컬럼비아대 교수는 “재정적 균형은 푸틴의 러시아가 포괄적인 재정ㆍ정치적 위기를 겪지 않을 것임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서방의 기술 제재에 대비하기 위해 중국과 협력을 강화하기도 했다. 러시아가 나름대로 ‘경제적 요새화’에 나서면서 서방의 제재를 무력화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커졌다는 얘기다.
장기전으로 흐를 경우 되레 서방이 경제적 역공을 당할 공산도 작지 않다. 유럽연합(EU)은 천연가스 수입량의 40%, 원유 수입량의 25%를 러시아에 의존하고 있다. 가뜩이나 인플레이션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유럽과 미국이 에너지 가격 상승이라는 악재까지 더해질 수 있다는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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