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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이전에도 한국산 명품이 있었다

입력
2022.02.16 19:00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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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원사 범종. ⓒ여실화(서애자).

상원사 범종. ⓒ여실화(서애자).


국민 소득 3만 달러를 넘어서면서, 선진국에 대한 논의가 종종 들려온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의 폐허 속에서 단기간에 일궈낸 위대성을 생각한다면, 일견 '국뽕'에 취해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선진국은 국민 소득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문화력과 더불어 최고의 명품이 존재해야만 한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최고 상품이라면 단연 반도체가 아닐까! 물론 스마트폰이나 자동차 또는 백색가전 등도 있지만, 이를 최고라고까지 하기에는 조금 부족한 감이 있다. 또 반도체 역시 완제품이 아닌 부품이라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그런데 고려 시대에는 당대 최고의 명품이 우리에게 3가지나 있었다. 고려 불화와 청자, 그리고 나전칠기다. 이러한 문화와 기술력으로 인해, 고려는 세계 최강의 몽골군을 40여 년이나 막아낼 수 있었다.

그렇다면 신라에는 명품이 없었을까? 불국사나 석굴암을 들 수도 있지만, 건축이야 각 문화권마다 특징이 강하므로 이를 객관화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 점에서 통일 신라의 범종은 단연 최고다. 동아시아 종의 시작은 중국이다. 그러나 중국을 넘어선 최고의 종을 만든 것은 신라였다. 때문에 국제적으로도 ‘코리안 벨(Korean bell)’이라는 독자적인 학명을 부여받고 있다.

서양종은 입구(개부구)가 넓은 나팔 모양으로 종을 치는 추는 금속으로 안에 달려 있다. 그래서 높게 매달아 놓고 아래에서 줄을 당기는 방식으로 친다. 고전 명화인 '노틀담의 꼽추'를 보면, 파리 노트르담 성당의 종은 너무 거대하므로 줄을 당겨서는 종이 쳐지지 않는다. 그래서 주인공 콰지모도가 종에 붙어 몸을 흔드는 방식으로 종을 울리곤 했다.

성당의 종탑은 성당보다 높게 마련이다. 이 때문에 종소리는 멀리 퍼지는데, 종을 치는 추가 금속으로 되어 있다 보니 금속성이 강렬하다.

이에 비해 동아시아의 종은 낮게 걸고 종 바깥에서 나무(당목)로 친다. 그러므로 종소리는 부드럽고 은은하게 퍼진다. 같은 종이라도 동서양의 관점과 미학적인 이해 방식에 많은 차이가 존재하는 것이다.

동아시아 종의 압권은 단연 코리안 벨이다. 중국이나 일본 종에 비해, 상징적인 디자인에서 우수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역발상을 통해 소리의 공명을 극대화했기 때문이다.

1년 360일을 상징하는 유두는 네 방향에 9개씩 총 36개다. 또 중간에는 하늘에서 인간의 세계로 내려오는 인본주의 표상인 비천상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종을 치는 곳인 당좌에는 풍요와 청정함을 상징하는 연꽃이 만개한 모습이다. 디자인도 중요하지만, 종은 신호 용구이므로 본질은 소리에 있다. 중국이나 일본 종 역시 서양종 정도는 아니지만, 입구가 조금 벌어져 있다. 그러나 코리안 벨은 항아리처럼 입구가 안으로 말려 들어간다.

종이 큰 소리를 내는 악기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입구를 오목하게 아민 것은 희대의 역발상이자 놀라운 창의력이 아닐 수 없다. 이로 인해 종 안에서의 공명은 극대화된다. 성덕대왕 신종(에밀레종)의 종소리가 3분이나 가는 것은 이러한 이유다.

문화와 명품은 고등한 정신과 풍부한 경제력의 산물이다. 이런 점에서 통일 신라의 경주가 인구 100만에 세계 10대 도시에 꼽혔다는 것은 주목할만하다.

앞만 보고 질주하는 개발의 시대는 끝났다. 이제는 문화력과 명품을 만드는 창의적인 노력이 확충될 때다. 이렇게 돼야 세계에 우뚝 서는 진정한 선진국이 이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음력 정초에 맞는 종소리는 우리 민족의 미래처럼 언제나 웅장하기만 하다.

자현 스님ㆍ중앙승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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