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도 외딴섬, 조선인 ‘일본군 성노예’ 흔적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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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도 외딴섬, 조선인 ‘일본군 성노예’ 흔적을 찾아서

입력
2022.02.10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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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끝> 비극의 섬 부루를 가다

편집자주

인도네시아 정부 공인 첫 자카르타 특파원과 함께하는 '비네카 퉁갈 이카(Bhinneka Tunggal Ikaㆍ다양성 속 통일)'의 생생한 현장.

네덜란드 사진작가 얀 배닝이 찍은 인도네시아 위안부 피해자들. 김영수 박사 제공

"일본군에 끌려온 한국 여성이 있었다고 합니다."

지난해 3월, 1년 넘게 기다렸으나 설마 했던 소식이 당도했다. 2019년 8월 '화장실로 변한 인도네시아 암바라와 위안소' 실태를 취재하면서 알게 된 적도의 외딴섬 부루(buru)는 수많은 인도네시아 소녀가 일본군에게 속거나 납치돼 성노예(위안부)로 고초를 당하고 일제 패망 후 버려진 곳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필리핀과 호주를 잇는 군사 요충지 부루에 일본군이 대규모 전투비행단을 운용한 만큼 부루의 조선인 위안부 존재 여부 규명이 학계에선 오랜 숙제였다.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고 정서운 할머니의 증언으로 알려진 인도네시아 중부자바 암바라와의 일본군 위안소. 2019년 8월 1일 기자가 방문했을 때 가장 끝 방은 화장실로 변해 있었다. 암바라와=고찬유 특파원

수소문 끝에 2020년 초 기자는 당시 9년째 부루에서 고무 농장을 하던 섬의 유일한 한국인 이현신(55) ㈜PJ 법인장에게 사전 취재를 부탁했다. 그는 "틈나는 대로 부루 일대를 돌며 여러 명으로부터 비슷한 증언을 들었다"고 했다. 지난해 8월 출장 계획을 잡았으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사실상 입도가 막히면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간간이 연락하며 상황을 주시했다. 거의 포기했던 방문 기회는 특파원 귀임 예정 보름 전에야 찾아왔다. 너무 늦게 갔다.

인도네시아 말루쿠주 부루섬의 남레아 공항. 부루=고찬유 특파원

수도 자카르타에서 말루쿠주(州) 부루까지 직선거리는 2,236㎞. 오전 1시 20분 비행기를 타고 말루쿠 주도(州都) 암본에서 한 차례 갈아탄 뒤 오전 8시 15분 부루섬에 도착했다. 2018년 남레아(namlea) 공항이 생기기 전에는 암본에서만 배로 8시간 걸렸다고 한다. 제주도 넓이 6.8배 남짓(1만2,656㎢)의 부루 인구는 21만 명이다.

인도네시아 말루쿠주 부루섬 위치. 그래픽=김문중 기자


"일본군과 닮았으나 일본인은 아니었던 위안부"

인도네시아 말루쿠주 부루섬에 남아 있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의 방공호. 허리 위까지 차오르는 수풀 속에 있다. 주변에 폭탄이 떨어져 생긴 구덩이가 많다. 부루=고찬유 특파원

부루 3대 씨족장의 후손이자 군인이었던 지역 유지 수디르만 베시(71)씨를 만났다. 그는 "일본군이 쳐들어왔을 때 한국인 여성이 함께 끌려왔다는 얘기를 위안부였던 현지 여성 등으로부터 들었다"고 말했다.

인도네시아 말루쿠주 부루섬의 유지 수디르만 베시씨가 자택에서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온 한국 여성에 대해 증언하고 있다. 부루=고찬유 특파원

-구체적으로 어떤 얘기를 들었나.

"자바에서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온 파티마 할머니가 그랬어. 현지인 위안부들 틈에 오랑 코레아(orang Korea·한국인)도 있었다고. (일제 패망 후에 돌아가지 못하고) 여기서 결혼하고 아기도 낳았대. 주변 어른들도 비슷한 얘기를 했고."

-누군지 만나볼 수 있나.

"너무 오래전 얘기잖아. 이미 사망했을 거야. 그 사람을 알고 있다는 파티마 할머니도 몇 년 전 세상을 떴는걸. 그나마 관련 기록도 말루쿠 폭동(1999년) 때 다 타버렸어."

-그 여성이 오랑 코레아라고 확신하는 근거는.

"일본군이랑 피부색, 생김새는 비슷한데 일본인은 아니었대. 그 여성이 자기 국적을 얘기했으니까 파티마 할머니가 그리 말했겠지. 사실 자바에서 끌려온 위안부 출신 현지 여성들도 과거 얘기를 잘 안 하려고 해. 그러니 그 여성도 파티마 할머니처럼 친한 몇몇에게만 털어놓았겠지."

경남 하동 출신으로 꽃다운 나이에 인도네시아 자바섬 암바라와에 끌려가 일본군 성 노예로 고초를 겪은 고 정서운 할머니. 고인의 생전 육성 증언이 인도네시아의 위안소 위치를 후대에 알렸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짧은 일정상 추가 증언 확보는 여의치 않았다. 파티마 할머니 후손의 집을 어렵게 알아내 세 차례 찾아갔으나 비어 있었다. 이 법인장은 "두어 명으로부터 비슷한 얘기를 들은 걸 토대로 관련 증언과 자료를 계속 모아 알려 주겠다"고 약속했다.

약 80년 전 일을 생생하게 듣고 하다못해 '오랑 코레아'라고 밝혔다는 한국 여성의 이름만이라도 챙겼으면 했던 바람은 욕심이었다. 누구라도 더 일찍 왔어야 했다. 암바라와 위안소를 폭로한 고 정서운 할머니의 용기와 육성 증언의 기록이 새삼 귀했다.

인도네시아 말루쿠주 부루섬에 끌려간 일본군 위안부들을 직접 만나 기록을 남긴 인도네시아 현대문학의 거장 프라무디야 아난타 투르의 생전 모습. CNN인도네시아 캡처

부루의 위안부 이야기는 노벨문학상 후보에 올랐던 인도네시아 현대문학의 거장 고 프라무디야(프람) 아난타 투르(1925~2006)가 40여 년 전 책으로 엮었다. 원제 '군부 압제 속의 처녀들'은 한국에서 2019년 '인도네시아의 위안부 이야기'(옮긴이 김영수)로 완역됐다.

프람은 1970년대 부루에서 직접 인도네시아 위안부들을 만나 '충격적이고 슬프고 두렵고 우울한 이야기', '조사된 적 없는 알려진 비밀'을 생생하게 기록했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다음은 위안부 시투 F씨와의 문답.

'인도네시아의 위안부 이야기' 표지 사진. 김영수 박사 제공

-부인은 일본을 따라온 것입니까, 일본이 강제로 데리고 온 것입니까.

"일본은 거짓말을 했지요. 그들이 말하기를 학교에 보내 준다고 했는데, 아…"

-부인은 언제, 어디서 속았다고 알게 되었습니까.

"플로레스, 키사르에서 알게 되었지요. 나는 계속 울어야만 했습니다. 몸은 고통스러웠고, 일본인들은 쉴 새 없이 내 몸을 망가뜨렸지요. 생각해 보세요, 그때 나는 아직 어렸고 일본군은 무섭고 강했습니다."

인도네시아 말루쿠주 부루섬에 남아 있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의 방공호. 그 일대는 현재도 인도네시아 공군 활주로로 사용되고 있어 군의 허가를 받아야 들어갈 수 있다. 부루=고찬유 특파원

다만 기자보다 50여 년 전 먼저 부루에 와 11년을 살았던 프람조차 자료의 빈곤과 실증 조사의 한계를 책 곳곳에 미련처럼 남겼다. 한국 여성의 존재도 책 속에 등장하지 않는다. 우리가 채워야 할 기록이지만 시간이 너무 흘렀음을 통감한다.

"나는 공산당 아니다" 절규에도 10년 유배

인도네시아 말루쿠주 부루섬의 정치범 수용소 터에 세워진 기념탑. 부루=고찬유 특파원

프람의 얘기는 부루의 또 다른 비극의 역사와 이어진다. 프람은 인도네시아 독립기념일인 1969년 8월 17일 자카르타에서 배에 태워져 11일 뒤 부루에 강제 억류됐다. 1965년 인도네시아 공산당(PKI) 반란 진압 명목으로 정권을 찬탈한 수하르토 군부는 양민 100만 명을 학살하고 대대적인 공산당원 색출에 나섰다. 프람과 같은 시기 인도네시아 전역에서 반(反)군부 인사와 PKI 연루자 1만2,000명이 법적 절차 없이 부루에 유배됐다. 거대한 섬 전체가 창살 없는 감옥으로 변한 셈이다.

1970년대 인도네시아 말루쿠주 부루섬에 유배됐던 정치범들이 단체 활동을 했던 장소. 부루=고찬유 특파원

이들은 변변한 연장도 없이 강제 노역과 굶주림에 시달리며 10년간 밀림을 논과 도로로 만들었다. 질병과 기아, 처형과 고문 후유증, 스트레스로 인한 극단적 선택, 탈출 실패 등으로 숨진 이들만 1,000명이 넘는다. 1979년 대부분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97명은 부루에 남았다. 생존자 디로우토모(86)씨의 가게를 찾아갔다.

공산당원이 아닌데도 1971년 고향 중부자바에서 말루쿠주 부루섬에 끌려왔던 디로우토모씨가 아내와 함께 자신의 가게 앞에 섰다. 부루=고찬유 특파원

-언제 끌려왔나.

"1968년 고향인 중부자바 보욜랄리에서 붙잡혀 6개월 투옥됐고 1971년 부루에 끌려왔다. 그해 아내는 둘째를 낳다가 숨졌고 두 살배기 아들은 부모에게 맡겼다. 1978년 자유를 얻었지만 아들에게 해가 될까 봐 돌아가지 못했다. 여기서 재혼해 4명의 자녀를 뒀다. 고향은 딱 한 번 다녀왔다." (귀향한 이들은 변변한 직업 없이 평생 차별과 비난에 시달렸다.)

-공산당원이었나.

"나는 공산당원이 아니다. 아버지는 소를 팔았고 나는 농사를 지었다. 마을 이장 자리를 놓고 경쟁하던 주민이 내가 공산당이라고 신고했다. 얼마 전 숨진 동료도 글을 전혀 모르는 농부였다. 끌려온 대다수는 공산당이 아니었고, 공산주의가 뭔지도 몰랐다."

당시 이들을 수용소와 노역 현장에서 감시했던 군인 수디르만씨도 "대부분 공산당이 아니고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때는 임무에 충실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들이 불쌍하고 그들에게 미안하다"고 고백했다.

1970년대 인도네시아 말루쿠주 부루섬에 강제 수용된 정치범들이 밀림을 개간해 만든 논. 이전에는 부루에 농경지가 없었다. 부루=고찬유 특파원

-뭐가 가장 힘들었나.

"말로 다 못 하지. 노예처럼 살았다. 토요일 오후부터 일요일 오전까지만 쉬고 매일 10시간씩 강제 노동을 했다. 잠시라도 일을 멈추면 두들겨 맞았다. 진짜 많이 죽었다."

-정부로부터 사과나 보상은 받았나.

"아니. 수하르토가 물러나고 4대 대통령인 고 압둘라흐만 와히드(구스두르) 대통령이 TV방송에서 '미안하다'는 말을 한 정도다. 그것만 해도 어디야. 풀려났을 때 받은 논 2.05ha와 소 한 마리가 전부라네."

그는 "예전에 현지 매체 기자가 인터뷰를 제대로 싣지 않아서 불쾌했는데, 사실대로 잘 써달라"며 악수를 건넨 기자의 손을 한동안 움켜쥐고 눈을 바라봤다. 그 선한 눈빛이 아직 선하다.

비극 딛고 '국가 식량기지'로 탈바꿈

조코 위도도 인도네시아 대통령이 2015년 말루쿠주 부루섬을 방문했다. 콤파스닷컴 캡처

당시 유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고 논만 푸르렀다. 공산당과 정치범으로 낙인찍힌 이들이 삶과 바꾼 농경지는 현재 인도네시아 정부가 추진하는 식량 정책의 토대가 됐다. 이들이 풀려날 즈음 이주단지가 조성됐고 자바에서 사람들이 건너왔다. 조코 위도도 대통령은 2015년 부루를 방문해 쌀과 옥수수 100만ha 생산 목표가 핵심인 '부루 식량기지' 계획을 발표했다.

인도네시아 말루쿠주 부루섬의 지쿠므라사 해변. 부루=고찬유 특파원

육두구, 정향 같은 향신료를 탐한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 등 서구가, 세계대전의 원흉 일본이 길게는 350년, 짧게는 3~4년 점령했고, 위안부와 정치범 등 인간 존엄성 말살의 비극이 뒤섞인 부루는 이제 국민들을 배부르게 하는 아름다운 임무를 부여받았다. 역사의 역설이다.

부루(말루쿠)= 고찬유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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