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당파·중도층·2030 세대에서 영향력 큰 TV토론
유권자 검증 제1덕목은 자질... 능력, 공약 후순위
네거티브는 필패... 품격 있는 인물 됨됨이 갖춰야
"누가 유능한 리더인지, 누가 준비된 대통령인지 여실히 보여준 토론이었다. 막힘 없이 본인의 철학과 비전을 설명해 내는 후보와 자료 없으면 자신의 주장을 하지 못하는 후보 간의 토론이었다."(송영길 더불어민주당 대표)
"기세 싸움에 있어서 확실히 검찰총장의 힘이 무엇인지를 보여줬다. 윤석열 후보가 단연코 1등이다."(이준석 국민의힘 대표)
"공적 연금, 고용 세습 등 사회 개혁 과제에 대한 확고한 입장을 잘 설명했다. '개혁본색'의 면모를 잘 보여줬다."(이태규 국민의당 총괄선대본부장)
"늘 1등 하던 사람이 또 1등을 하고 왔다. 특히 미투 2차 가해에 대한 사과를 요구하고 받아낸 대목은, 진보정당이 어떤 목소리를 내야 되는지 잘 보여줬다."(조성주 정의당 종합상황실장)
20대 대선을 한 달 남짓 앞두고, TV토론 레이스에 막이 올랐습니다. 3일 처음 열린 대선후보자 합동 TV토론회가 끝난 이후 더불어민주당, 국민의힘, 정의당, 국민의당은 저마다 자신이 속한 정당의 대선 후보가 제일 잘했다고 자평하며, 분위기를 몰아가고 있는데요. 이들의 아전인수 해석과 별개로 결정적 '한 방'도, 치명적인 '말실수'도 없었다는 게 대체적인 세간의 평가죠. 첫 토론이다 보니, '탐색전', '전초전' 성격이 강했다는 총평이 나옵니다.
다만 실시간으로 관전평을 쏟아내던 정치색 강한 온라인 커뮤니티들은 토론이 끝난 뒤 더 뜨겁게 달아 오르고 있죠. 토론 그 자체보다, 토론 이후 SNS(사회관계망서비스)에서 회자되는 '밈'(인터넷상에서 유행하는 말이나 행동, 재미있는 사진 등)이 여론의 향배를 가른다고 보고, 후보들의 각종 발언과 말실수를 꼬집은 '밈 대전'을 펼치는 모습입니다.
앞으로 예정된 TV토론은 최소 3회(중앙선거방송토론위원회가 주관하는 21일, 25일, 다음 달 2일 법정 토론회). TV토론은 표심을 바꾸고 대선 승부를 가르는 주요 변수가 될 수 있을까요. TV토론과 대선 승리의 상관관계를 따져봤습니다.
"과대평가 말아야"... 힐러리 토론에서 이겼지만, 대통령은 트럼프
TV토론의 영향력을 두고 전문가들의 의견은 갈라집니다. 크게 의미를 둘 필요가 없다는 쪽에선 TV토론과 대선 승리의 뚜렷한 연관성을 찾기 어렵다는 주장을 펴죠. 지지층 결속만 다지는 '강화 효과'는 기대할 수 있을지 몰라도, 지지하던 후보를 바꾸는 '전환 효과'는 물론 새롭게 누군가를 지지하는 '유입 효과'도 없을 거라는 전제가 깔려 있죠. 효과가 있더라도, 미미하니까 '과대평가'를 경계하자는 건데요.
TV토론 승리가 반드시 대선 승리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도 있습니다. TV토론에선 압도적으로 잘했지만, 실제 대선에서는 정반대로 낙선한 2016년 '힐러리 클린턴 vs 도널드 트럼프'의 TV토론이 대표적이죠. 미국의 역대 대선 TV토론 사상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했던 이 토론의 승자는 누가 봐도 힐러리였지만, (토론 직후 CNN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힐러리가 잘했다는 응답은 62%, 트럼프가 잘했다는 응답은 27%에 불과했습니다.) 대통령이 된 건 결국 트럼프였죠.
한국 대선의 경우에도 "17대 대선과 18대 대선의 경우 토론 전후 지지율 변화 추이를 보면 오차범위 내 정도밖에 차이가 안 났다. TV토론이 대선에 영향을 주는 정도는 미미하다"(신율 명지대 교수)는 의견이 적지 않습니다.
2017년 19대 대선만 해도, 누가 TV토론을 잘했는지 물었을 때 1위는 심상정(44.2%), 2위는 유승민(26.8%) 그다음이 문재인(14.4%), 홍준표(6.9%), 안철수(1.9%) 순이었는데요. 대통령에 당선된 건, 토론을 잘했다는 심상정도 유승민도 아닌 문재인 후보였죠. 토론에선 중·하위권이었던 홍준표 후보도 2위로 선방했죠. 아무리 토론 실력을 인정받아도, 거대 양당 고정 지지층을 뛰어넘을 수는 없었던 거죠. 해당 조사는 한국정치학회가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의뢰로 2017년 대선 이후 실시한 '제19대 대통령 선거 후보자토론회 효과 분석 연구' 자료를 인용한 내용입니다.
"TV토론 보고 지지후보 결정"... 박빙 판세에 떠오르는 승부처
그러나 이번 대선처럼 절대 강자가 없는 박빙의 안갯속 판세라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한 무당파 유권자가 많고, 젊은 층의 탈이념화 성향이 강해지면서 지지층 결집 강도가 예전같지 못하다면, TV토론이 대선 승부처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적 견해인데요.
실제 앞서 언급한 '제19대 대통령 선거 후보자 토론회 효과 분석 연구'를 살펴보면 TV토론이 후보 지지에 미친 영향이 상당했다는 게 입증됩니다. 후보자 토론회가 후보 지지에 미친 영향을 묻는 질문에 '더욱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가 응답자의 38.1%, '토론회가 지지 후보에 별로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31.6%, '토론회를 보고 지지 후보가 바뀌었다' 19.7%, '지지 후보가 없었는데 토론회 후 생겼다'는 9.3%로 나왔는데요.
"토론회를 보고 지지 후보가 바뀌었거나, 생겼다는 응답이 29%에 달하는 건, 후보들 간 격차가 크지 않은 상황이나 유동층이 많은 경우 선거 결과에 영향을 주기에 충분한 규모"(윤희웅 오피니언라이브 여론분석센터장)라는 설명입니다.
이번 대선을 앞두고도 TV토론을 보고 지지 후보를 결정하겠다는 응답이 부동층의 경우 절반 이상(56.8%)이라는 조사 결과(KBS-한국리서치)도 나왔죠. 특히 이번 대선의 캐스팅보터로 꼽히는 2030세대의 경우 TV토론에 따라 지지 후보를 바꿀 수 있다고 답한 비율이 각각 44.6%, 51.1%로 전체 평균(31.6%)보다 가장 높습니다.
결국 TV토론이 대선 결과에 절대적 변수는 아니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거죠. (관련기사 "잘하면 본전, 못하면 나락" 대선 가르는 한방... TV토론 흥망사) 그렇다면 유권자들은, TV토론에서 후보자들의 어떤 모습에 반응하는 걸까요. 우선 TV토론에 웃고 울었던 대표 사례들을 살펴보죠.
장점은 살리고, 단점은 가리고... TV토론 활용 정수 보여준 DJ
"대중 집회가 대폭 후퇴하고, 이제는 TV토론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TV토론 덕분에 고정지지표뿐 아니라 새로운 지지층이 나타나고 있다."
1997년 제15대 대선에 출마한 당시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는 TV토론에 자신감을 드러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1970년대부터 대선 TV토론회 도입을 주장해왔던 DJ는 누구보다 TV토론에 진심이었습니다. 간첩 조작 사건 등 권력에 의해 '빨갱이'로 낙인찍혀온 DJ에게는 이미지를 쇄신할 절호의 기회라고 봤기 때문이죠.
그해 대선, DJ는 TV토론에 그야말로 '올인'(다 걸기)했습니다. 후보자 합동토론회가 확정되기 전부터 DJ는 지방 유세를 돌 때마다 그 지역 방송 TV토론회에 나가 'DJ 알리기'에 매진했습니다. 그 횟수만 총 50여 차례에 달하는 것으로 전해졌는데요. DJ는 TV출연 전에는 항상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해, 미리 지방에 내려가 모든 일정을 생략하고 충분한 휴식을 취했을 정도로 공을 들였다고 합니다.
토론 전날 충분한 휴식, '파란 셔츠에 행커치프' 이미지 메이킹
DJ의 이 같은 노력은 한국 정치 사상 처음으로 열린 대선 후보자 첫 합동 TV토론에서도 빛을 발합니다. 논리적 언변과 식견을 쏟아낸 DJ의 토론전 데뷔는 성공적이었죠. 당시 토론에선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이후 '경제 파탄 책임론'이 주요 이슈로 떠올랐는데, DJ는 구체적 경제 수치 등을 제시하며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를 코너로 몰아세우며 유권자들의 눈길을 사로잡기에 충분했습니다.
이미지 메이킹에도 능했습니다. 이회창, 이인제 후보보다 상대적으로 고령이라 건강에 대한 우려가 나오자, DJ는 보란 듯이 파란색 셔츠(나머지 두 사람은 기본 흰색 셔츠)와 화려한 문양의 넥타이를 매고 나왔죠.
당시 DJ의 TV토론을 지켜본 한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본보에 이런 평가를 남겼는데요. "DJ는 윗호주머니엔 TV탤런트가 하듯이 손수건(노란색 행커치프를 말함)까지 꽂고 나와 끊임없이 미소 짓는 얼굴로 '이야기'를 풀어 나갔다. 그는 기조연설 첫머리부터 TV토론을 통해 전국 구석구석의 유권자와 접촉할 수 있게 된 기쁨을 강조하며 '가능하면 저를 잘 봐 주셨으면 한다'고 말하는 여유까지 보였다. 그가 TV의 조화를 잘 파악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국정 전반을 장악하는 뛰어난 식견, 경제 대통령으로서의 자질 등 장점은 최대한 살리고, 고령에 따른 건강 문제, 빨갱이 이미지 등 단점은 극복했던 DJ는 TV토론 활용법의 정석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실제 토론회 이후 DJ의 지지율은 상승세를 탔고, 이회창 후보는 하락세를 보였죠. 결국 대권을 거머쥔 건, DJ였습니다.
"제가 MB아바타냐, 갑철수냐"... '셀프 디스'만 남긴 뼈아픈 실책
"제가 MB(이명박) 아바타입니까", "제가 갑(甲) 철수입니까, 안철수입니까."
한국 대선 TV토론 중 가장 뼈아픈 실책으로 꼽히는 장면 중 하나죠. 2017년 제19대 대선 후보자 1차 TV토론회에서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현 대표)가 문재인 당시 더불어민주당 후보를 몰아세우며 반복해 외친 이 질문은, 민주당의 네거티브 공세를 비판하려는 의도로 안 후보가 준비한 회심의 카드였지만 도발은 끝내 '셀프 디스'로 귀결되고 말았습니다.
온라인에서는 문 후보 명의의 '위 사람은 갑철수나 MB 아바타가 아님을 인증함'이라는 내용의 가짜 인증서가 유포되고, '갑철수'가 포털사이트의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오르는 등 안 후보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가 빠르게 퍼지기도 했는데요.
이 토론회를 기점으로 안 후보 지지율은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총 다섯 번의 토론회를 거쳤지만 안 후보는 깎아 먹은 지지율을 만회하지 못하고 결국 3위(21.4%)로 대선을 마치고 맙니다. 국민의당 대선 평가 보고서에서도 "안 후보가 TV토론에서 대통령감이라는 각인을 하는 데 실패했다"며 TV토론을 패인으로 꼽았을 정도였죠.
"반드시 떨어뜨릴 겁니다"... 막무가내 네거티브는 '필패' 자충수
과도한 네거티브가 독이 됐던 사례는 또 있었죠.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와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가 맞붙었던 2012년 18대 대선에선 이정희 통합진보당 후보가 "이것만 기억하시면 됩니다. 박근혜 후보 떨어뜨리기 위한 겁니다. 저는 박근혜 후보를 반드시 떨어뜨릴 겁니다"라는 말을 퍼부었던 장면입니다.
이 후보의 공격적 표정과 말투에 박 후보는 당황해하며 "이정희 후보가 오늘 아주 작정을 하고 네거티브를 어떻게든지 해서 이 박근혜라는 사람을 내려앉혀야겠다고 작정을 하고 나온 것 같습니다"라고 되받아쳤죠. 이 후보는 스스로 통쾌해했을지 몰라도, 결국 대선 승리는 박 후보에게 돌아갔죠. 이 후보의 '독한' 공격이 오히려 보수 표심을 결집시켰다는 점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 당선의 일등공신은 이정희였다는 우스갯소리마저 나오기도 했었습니다.
오랜 내공과 철저한 준비에서 뿜어 나온 품격 있는 모습으로 유권자를 사로잡았던 DJ의 성공 사례, 판세를 뒤집어 보겠다는 조급함에 남을 향한 공격에만 매달리다 네거티브 수렁에 빠진 실패 사례는 어떤 교훈을 알려줄까요.
유권자들이 TV토론을 통해 검증하려는 제1 대목은 '인물 됨됨이' 즉, 이 사람이 대통령감인가 아닌가를 살핀다는 겁니다. 앞서 제시된 연구 보고서에서도 이 같은 흐름은 확인됩니다. 대선 후보자 토론회를 통해서 어느 영역이 가장 잘 검증됐다고 생각하는지 묻자 61.8%가 후보자의 자질이라고 응답한 건데요, 후보자의 능력은 17.8%, 후보자의 정책은 10.9%에 그쳤습니다.
말만 번지르게 잘한다고, 상대를 공격하는 데 열을 올린다고 해서 유권자들의 마음을 파고들 수 없다는 거죠. 앞으로 최소 세 번 남은 대선 TV토론회에서 네 명의 후보자들이 얼마만큼의 예의와 품격을 갖춘 모습으로 대통령의 자질을 보여줄지 관전 포인트로 삼아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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