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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1962년 순천의 두 비극, 그리고 박정희

입력
2022.02.05 04:30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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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덕
김시덕문헌학자

편집자주

도시는 생명이다. 형성되고 성장하고 쇠락하고 다시 탄생하는 생로병사의 과정을 겪는다. 우리는 그 도시 안에서 매일매일 살아가고 있다. 과연 우리에게 도시란 무엇일까, 도시의 주인은 누구일까. 문헌학자 김시덕 교수가 도시의 의미를 새롭게 던져준다.

<23> 수해가 바꿔 놓은 전남 순천의 얼굴

전라남도 순천에 갈 때에는 KTX를 타고 가는 게 일반적이다. 순천역에 내리면 남쪽과 북쪽으로 대규모 주택 단지를 마주하게 된다. 북쪽으로는 1936년에 전라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근무하게 된 철도 직원들을 위해 마련된 조곡동 철도관사단지가 있고, 남쪽으로는 1975년경 조성된 풍덕동 국민주택단지가 있다.

풍덕동 국민주택단지는 조성된 배경을 잘 알 수 없고, 순천 분들께도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은 것 같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조곡동 철도관사단지는 한때 순천의 부촌으로 일컬어졌을 정도로 순천시에서 잘 알려진 지역이다. 20세기 중기에 한국 곳곳에 조성된 철도관사단지 가운데에서도 전국적으로 가장 유명한 곳이다.

의왕역 부곡철도관사단지(왼쪽), 안동 평화동 철도관사단지

의왕역 부곡철도관사단지(왼쪽), 안동 평화동 철도관사단지

나는 경부선 의왕역의 부곡 철도관사단지, 중앙선 안동역의 평화동 철도관사단지 같은 전국 곳곳의 철도관사단지를 답사팀과 함께 찾아다니고 있다. 이 순천역 북쪽의 조곡동 철도관사단지는, 이제까지 답사한 그 어떤 곳의 철도관사단지보다도 원형을 잘 보전하고 있고, 주민분들의 애향심도 잘 느껴지며, 관광지로서도 가장 잘 정비된 곳이었다. 게스트하우스도 운영하고 있으니, 하루 묵으면서 이 일대를 걸어보실 것을 추천한다.

철도관사단지는 근대 순천의 신도시

'마을에 깃든 역사도시 순천'을 쓴 순천 지역사 연구자 강성호 선생님의 안내를 받아 조곡동 철도관사단지를 답사하면서, 마을 구석구석에서 주민 분들의 애향심과 자부심이 느껴져서 감탄했다. 이러한 애향심과 자부심의 배경에는 철도관사단지가 한때 근대 순천의 신도시이자 부촌이었다는 사실이 존재할 것이다.

조곡동 철도관사단지

조곡동 철도관사단지

순천역과 조곡동 철도관사단지가 순천의 근대 신도시라면, 전근대 순천의 중심지는 순천역 서쪽을 남북으로 흐르는 동천 너머 동쪽이다. 동천의 서쪽에 자리한 순천 구도심은 다시 둘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는데, 북쪽에는 조선시대의 읍성이 있고, 남쪽에는 순천시청이 있다. 그 가운데에는 옥천이라는 하천이 흐른다. 구도심의 북쪽에는 웃장이라는 시장이, 남쪽에는 아랫장이라는 시장이 있어서, 서울의 남대문시장과 동대문시장처럼 순천 구도심의 주된 시장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현재 순천의 신도시는 조곡동과 순천역 지역의 동쪽 방향으로 형성되어 있다. 조곡동을 중간에 두고 구도심과 신도시 시민들은 다소 무관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순천역과 풍덕동의 남쪽으로는 전국적으로 유명한 순천만 국가정원과 간척지가 넓게 펼쳐져 있다.

순천의 지형을 바꾼 1962년 동천 대홍수

조곡동 철도관사단지

조곡동 철도관사단지

대략 이렇게 이해할 수 있는 순천시의 구조를 만들고 있는 핵심적인 요소는, 구도심과 순천역 사이를 지나 순천만으로 흘러드는 동천이다. 순천시의 공간 구조에 관심이 있으신 분은 동국대 건축학과의 한광야 선생님이 쓴 '도시에 서다 - 한국도시의 형성과 진화'에 실린 순천편을 읽어보실 것을 권한다.

동천은 1962년의 순천 홍수 뒤에 한 번 직강화(直江化) 공사가 있었고, 30년 뒤인 1992년에 또다시 동천 하류 정비사업이 추진되었다. 직강화 공사라는 건 구비구비 흐르는 강의 흐름을 곧게 펴는 사업이다. 서울을 동서로 흐르는 한강도 직강화 공사를 하면서 잠실이 섬에서 뭍이 되었다.

1992년의 동천 정비사업은, 공사에 반대해서 순천만 지역의 생태를 보존하자는 운동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는 순천만 국가정원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이로부터 30년 앞서 이루어진 동천 직강화 공사는 1962년 8월 27일의 홍수로 순천 구도심이 큰 피해를 입은 데 따른 것이었다. 27일 저녁 무렵에 쏟아진 폭우로 저수지와 동천 제방이 무너지는 등의 피해가 발생해 224명의 사망자가 생겼다.

수해로 인해 순천 구도심의 절반 이상이 파괴되자, 박정희 장군이 이끄는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수재민을 수용할 주택 단지를 구도심의 북쪽과 남쪽에 마련하게 했다. 수재민 주택 단지 건설은 홍수 직후인 9월 초부터 시작되어 그해 12월에 준공 및 입주식이 열렸다.

정부가 이렇게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었던 데에는, 한 해 전인 1961년 7월 11일에 발생한 수해로 경상북도 영주 구도심이 큰 피해를 입자 이를 복구한 경험이 작용했다. 영주에서 수해가 발생하자, 갓 수립된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영주시 서천을 직강화하고 중앙선 노선을 바꾸고 수재민을 수용할 주택 단지를 하망동에 건설하는 등, 국가적 역량을 동원했다. 군복무중이던 영주 및 예천 출신 군인들을 현지로 보내 구호활동에 임하게 하고, 영주출신 대학생들의 학비를 감면해주는 등 민심 수습에도 힘을 기울였다.

이렇듯 국가적 범위로 영주 수해 복구가 이루어진 사실은 당시 전국적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 순천 수해가 발생한 3일 뒤인 1962년 8월 30일 자 조선일보에는 '"영주" 거울삼아 항구 대책'이라는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A지구

A지구

처음에는 순천 구도심의 외곽에 A지구·B지구·C지구 등 세 곳의 수재민 복구주택단지가 지정되었다. 하지만 B지구 건설은 토지 구입 비용이 맞지 않아 좌절되었고, A지구와 C지구 건설만 실현되었다. A지구는 읍성 북쪽의 웃장 근처, C지구는 옥천 남쪽의 아랫장 근처에 마련되었다.

C지구 카카오맵 로드뷰

C지구 카카오맵 로드뷰

현재 A지구에는 '매곡A지구'라는 이름의 버스정류장이 남아 있고, C지구에는 'C지구 소주방'이라는 이름의 가게가 얼마전까지 영업하고 있었다. 이런 '도시 화석'들이 6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남아 있는 것은, 현대 초기의 순천 시민들이 당시의 수해를 얼마나 뼈저리게 기억하고 있는지, 그리고 수해로부터의 복구 사업이 현재의 순천시를 만드는 데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를 증언한다. 순천 구도심은 1962년의 수재 뒤에 도시 외곽으로 A지구와 C지구가 건설되면서 북과 남, 두 방향으로 확장했다고 할 수 있다. 도시는 이런 방식으로 확장한다.

비극의 흔적들

8·28에 가신 이의 위령탑(왼쪽), 여순 10·19 동순천역

8·28에 가신 이의 위령탑(왼쪽), 여순 10·19 동순천역

당시 둑이 터져 수백 명의 시민을 사망케 한 동천을 따라 북에서 남으로 순천역을 향해 달리는 전라선에는 도중에 동순천역이 있었다. 지금은 영업을 중단한 전라선 동순천역 자리에는 '8·28에 가신 이의 위령탑'이라는 비석이 서 있다. "여기 한 아름 실음을 안고 잠드신 영령 224주의 긴 한이 있다. 비바람 사오납던 1962년 8·28 그날 흙탕물 속에서 꽃들은 지고 열매는 떨어졌다 못다살고 가신 임들이여 먹구름 걷혔으니 그 얼 고이 쉬소서"

그리고 이 비석 옆에는 '여순 10·19 - 동순천역'이라는 안내판이 서 있다. 이곳은 여수에 주둔하던 국군 제14연대가 1948년 10월 19일 저녁에 반란을 일으킨 뒤, 순천의 북쪽에 자리한 구례를 거쳐 지리산으로 들어가 게릴라전을 벌이려다 순천 경찰들에 저지된 뒤 인민군 사령부를 설치한 지점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당시 남로당 당원이던 박정희 소령은 여순사건이 일어난 한 달 뒤인 11월 11일에 체포되었다. 그리고 조사 과정에서 한국군 내의 남로당원들을 밝힌 뒤 풀려났다. 박정희 소령의 체포와 석방, 그리고 그가 밝혔다고 하는 '박정희 리스트'의 성격에 대해서는 여기서 깊이 말씀드릴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저, 1948년에 자신을 죽음 가까이까지 몰아넣었던 순천 지역과 14년 만에 다시 관계를 맺게 되었을 때, 박정희 의장이 어떤 생각을 했을지에 자꾸만 생각이 가는 것이다.

영주 직강화 공사 기념 박정희 장군 식수

영주 직강화 공사 기념 박정희 장군 식수

현재 경상북도 영주에는 1961년의 수해 이후 서천을 직강화한 뒤에 박정희 의장이 심은 기념식수가 남아 있다. 박정희 의장이 수해 대책을 총괄시킨 이성가 장군을 기념하는 비석도 남아 있다. 영주라는 도시 전체가 1961년 수해를 적극적으로 기억하려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같은 듯 다른 순천과 영주

반면 순천에는 1962년의 수해로 사망한 이들을 기리는 비석은 서 있지만, '순천수해 메모리얼전시관'은 최근에야 C지구 한켠에서 공사가 시작되었다. 박정희 의장을 비롯해 수해 복구사업을 추진한 이들을 기억하려는 모습은 더더욱 보이지 않는다. 순천과 영주는 식민지 시기에 철도도시로 성장했고, 철도관사촌을 관광상품으로 개발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적인 역사를 경험했다. 그리고 1년 차이로 수해를 입은 점에서도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두 도시가 피해와 복구를 기억하고 잊는 모습은 대조적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철도도시 순천과 영주의 위상

철도도시 순천과 영주의 위상

다만 한 가지 말할 수 있는 사실은, 이러한 현상이 이른바 '영호남 지역감정'과는 무관해보인다는 것이다. 정치적으로 영호남 간의 지역감정이 나타나는 것은 1960년대 말부터이다. 또 순천을 포함한 섬진강변 동서쪽의 전라도와 경상도 지역은, 그 밖의 전라도나 경상도 지역과는 정치적 성향이 구분된다. 머지않아 개관될 '순천수해 메모리얼전시관'에서 그 이유를 찾아낼 수 있기를 희망한다.

글·사진=김시덕 문헌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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