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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미케·지하 아이돌... 주류문화에 도전하는 힘

입력
2022.01.22 04:40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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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서브컬처, 다양성을 이해하는 키워드

편집자주

우리에게는 가깝지만 먼 나라 일본. 격주 토요일 연재되는 ‘같은 일본, 다른 일본’은 미디어 인류학자 김경화 박사가 다양한 시각으로 일본의 현주소를 짚어보는 기획물입니다.

세계 최대의 아마추어 동호인의 행사 ‘코미케’에서는 비영리 이벤트도 활발히 벌어진다. 사진은 2018년 코미케 행사 현장에 등장한 헌혈 캠페인 버스를 찍은 것으로 행사 참가자인 Gift씨가 제공했다. 일러스트 김일영

세계 최대의 아마추어 동호인의 행사 ‘코미케’에서는 비영리 이벤트도 활발히 벌어진다. 사진은 2018년 코미케 행사 현장에 등장한 헌혈 캠페인 버스를 찍은 것으로 행사 참가자인 Gift씨가 제공했다. 일러스트 김일영


전통적 사고 방식에 반기를 드는 문화, ‘서브컬처’

우리말로 ‘하위 문화’라고 번역되는 서브컬처(subculture)란 주류 문화와는 선명하게 다른 노선을 걷는 문화나 그 실천 양식을 뜻하는 말이다. ‘서브’(아래, 밑을 뜻하는 영어 접두어)나 ‘하위’라는 말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소수자 혹은 사회적 지위가 약한 계급이나 세대 등 자기정체성이나 가치관이 반영된 문화다. 그 사회의 주류적인 사고 방식과는 이질적이기 때문에 서브컬처는 그 자체로 기성 세대에 대한 저항으로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많다. 그 결과 주류 문화에서는 쉽게 비하나 조롱의 대상이 되지만, 사회 전체적으로는 역동적인 변화를 이끌어 내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과거에는 젊은이들의 반항적인 정체성과 행동 양식을 그 시대의 서브컬처로 인식했다. 1960, 70년대의 미국의 히피 문화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지금은 인터넷을 중심으로 수시로 새로운 문화가 나타나고, 온라인 커뮤니티나 소셜 미디어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빠르게 결집, 해산한다. 새로운 환경 속에서 서브컬처의 양상도 많이 달라지고 있다. 특히 다양한 콘텐츠 장르에 대한 팬덤이나 취미 등 현대인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오락 영역이 서브컬처의 중요한 주제로 대두되었다.

비영리주의 고수하는 ‘코미케’, 세계 최대 규모의 서브컬처 축제

일본 사회의 서브컬처라고 하면, ‘오타쿠’라는 골수 마니아들의 지독한 팬덤을 떠올리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오타쿠들의 놀이터라고 일컫는 도쿄의 아키하바라 등은 서브컬처의 성지라고도 불린다. 그곳에서는 만화나 애니메이션, 게임 등과 관련한 흔치 않은 상품을 구입할 수도 있고, 독특한 팬덤 취향에 편승해 이색적인 서비스를 제공하는 가게도 성업 중이다. 하지만, 관광객들의 눈길은 끌 수 있을지 몰라도 이런 것들이 일본 사회에 뿌리내린 서브컬처의 전모는 아니다. 오히려 상업주의와 확실히 선을 긋는, 아마추어 동호인의 자발성과 참여 정신이야말로 팬덤의 본질이다. 그런 면에서 일본 만화를 좋아하는 팬이라면 한번쯤은 들어보았을 ‘코미케’(コミケ, ‘코믹 마켓’을 줄인 일본어 표현)는 서브컬처의 창조적 역량을 마음껏 드러낸 사례일 것이다.

코미케는 매년 두 번 여름과 겨울에 도쿄의 대규모 박람회장에서 열리는 동인지 (同人誌, 아마추어 애호가가 만드는 책자나 잡지) 행사다. 만화나 애니메이션, 게임 등을 좋아하는 팬이나 취미 작가들이 제작한 창작물들이 전시, 판매, 배포되는 장인데, 3일 동안의 개최 기간에 수십만 명이 행사장을 찾을 정도로 대성황이다. 지난 연말에는 코로나19 사태로 중단되었던 행사가 2년 만에 개최되었다. 매년 미국 샌디에이고에서 열리는 ‘코믹콘’ 등 유사한 성격의 이벤트가 없지는 않다. 하지만, 규모로 보나 비영리를 고수하는 원칙으로 보나 세계에서 코미케와 어깨를 나란히 할 행사는 없을 것이다. 코미케에서는 기업, 스태프, 취미 단체(코미케에서는 ‘서클’이라고 부른다), 일반 방문객이 모두 대등하게 ‘참가자’다. 출판사나 방송국 등도 기업 자격의 참가자일 뿐이다. 연예인을 초청해 행사를 벌이지도 않고, 유명인이 왔다고 특별 대우하는 일도 없다. 이 행사의 주인은 어디까지나 아마추어 애호가들이라는 신념이 있다. 무려 50여만 명이 방문하는 큰 행사를 준비하고 운영하는 스태프가 전원 자원봉사자라는 사실은 기적처럼 느껴진다. 상업적 주체를 배제하지 않지만 상업주의가 아마추어 동호인의 자유로운 표현 문화를 좀먹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굳건히 지키고 있는 것이다.

코미케를 통해서 정식 작가로 데뷔하는 사례도 있지만, 출판사 등의 권유를 받아도 프로 전향을 마다하는 경우도 많다. 작품을 공유할 수 있으면 그걸로 만족이라는 것인데, 어떻게 보자면 아마추어만이 누릴 수 있는 자유로움과 쾌락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다. 한편, 표현의 자유라는 대원칙을 중시하다 보니 기존 작품의 캐릭터나 스토리를 전개시킨 2차 창작물이나 팬 아트 등이 종종 물의를 빚기도 한다. 저작권 침해는 매번 불거지는 문제이고, 배포되는 창작물 속에 상식에 반하는 외설이나 혐오 표현 등이 드러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경우도 있다. 표현의 자유가 늘 정치적, 사회적으로 올바른 결과를 낳지는 않는다. 과제가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코미케가 일본 사회에서 아마추어 애호가들의 자발적인 창작 문화를 고집스럽게 지켜왔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일본 사회에 만연한 소비주의, 상업주의와 거리를 두면서도, 나름의 신념에 근거한 새로운 대중 문화를 차근차근 키워 온 것이다.

주류 대중 문화에 도전장을 낸 ‘지하 아이돌’

다양한 서브컬처가 모두 코미케와 동일하게 아마추어리즘과 비영리주의를 표방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일본의 주류 대중 문화와는 명백히 다른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예를 들어, 소규모 공연장이나 라이브 하우스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이른바 ‘지하 아이돌(地下アイドル, 일본어로는 ‘지카 아이도루’라고 한다)’이라는 묘한 개념이 있다. 일반적으로 아이돌이라고 하면 대중에게 어필할 만한 외모와 매력, 퍼포먼스 등을 갖추도록 대형 기획사에서 체계적인 훈련을 통해 길러낸 상품형 엔터테이너를 말한다. 그에 비해 지하 아이돌은 작은 기획사에 소속된 경우도 있지만, 그보다는 스스로 자신의 캐릭터와 활동을 기획, 실천하는 ‘셀프 프로듀스’ 방식을 취한다. TV 등 매스 미디어에 노출되는 경우도 없다. 그러다 보니 ‘지하’라는 말이 붙은 것이다. 이들은 소셜 미디어 등을 통해 팬과 직접적으로 교류하고, 스스로 갈고닦은 음악이나 퍼포먼스를 작은 극장에서 선보이며 나름의 팬덤을 쌓아 간다. 지하 아이돌로 활동하다가 나중에는 TV 등에 얼굴을 내미는 ‘정식’ 아이돌로 변신해 성공한 사례도 있다. 하지만 요즘에는 자기가 원하는 만큼만 ‘지하’에서 활동하겠다는 포부를 당당하게 밝히는 지하 아이돌도 늘어나는 추세다. 아이돌 비즈니스는 엔터테이너 개인의 매력과 개성을 세일즈 포인트로 삼기 마련이다. 그러다 보니, 젊은이들이 홀로 도전장을 내미는 지하 아이돌이라는 흥행 방식이 위태롭게 보이기도 한다. 상품화된 개인이 필연적으로 감수하는 여러 리스크를 혼자 부담하는 것은 버거운 일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런 우려를 제외하면, 대형 기획사와 매스 미디어의 절대적인 영향력에 내미는 신선한 도전장처럼 느껴진다. 유튜브 크리에이터나 소셜 미디어의 인플루언서처럼 매스 미디어의 힘을 빌지 않고 대중에게 영향을 미치는 트렌드와도 일맥 상통하는 측면이 있다.

서브컬처는 일본 사회의 다양성을 이해하는 키워드

서브컬처는 현대 일본 사회의 다양성을 이해하기 위한 키워드다. 일본 사회에 존재하는 다양한 서브컬처는 주류 문화와는 거리를 유지하면서 나름의 대안 문화를 실천해 왔다. 외부에서 볼 때에 일본 사회가 전체주의적, 집단주의적 성향이 단단하게 뿌리내린 완고한 시스템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집단의 규범과 폐쇄적인 가치관을 내세우는 일본 사회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개미들의 세계처럼 무표정하고 삭막하게 느껴지는 순간도 있다. 하지만, 일본 사회에 직접 발을 담그고 깊이 있게 교류하다 보면, 일반적으로 ‘일본적’이라고 여겨지는 사고 방식과 가치관과는 전혀 다른 노선의, 크고 작은 문화가 여기저기에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밖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일본 사회의 유연한 얼굴, 부드러운 표정이다.


김경화 미디어 인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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