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칠레·온두라스서 좌파 정부 탄생
올해 대선 브라질·콜롬비아도 좌파 돌풍
이념보다 실리 추구 '핑크타이드 2.0' 예고
중남미에 다시 ‘분홍 물결’이 세차게 몰아치고 있다. 지난해 말 칠레와 온두라스에서 사회주의자 대통령이 탄생하면서 파도는 쓰나미로 더 커졌다. 올해 대선을 앞둔 브라질과 콜롬비아에서도 좌파 후보가 선두를 달리는 중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심화된 공중보건 위기와 경제 불황에 우파 집권층을 향한 분노가 폭발한 결과다. 2000년대 초 중남미를 휩쓴 ‘핑크 타이드(좌파 득세)’와 흐름은 비슷하지만, 이념보다 실리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이전 세대와는 차별화된 ‘핑크 타이드 2.0’이 시작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가장 큰 관심사는 브라질 대선이다. 10여 년 만에 대권 재도전을 선언한 ‘좌파 대부’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전 대통령이 10월 대선을 앞두고 연초부터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4일(현지시간)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지난달 13~16일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룰라 전 대통령은 자이르 보우소나루 현 대통령과의 1대 1 대결에서 지지율 59%를 얻었다. 30%를 기록한 보우소나루 대통령보다 2배가량 높다.
5월 대선을 치르는 콜롬비아에서도 좌파 게릴라 조직 출신으로 수도 보고타 시장을 지냈던 구스타보 페트로 상원의원이 꾸준히 앞서고 있다. 콜롬비아는 핑크 타이드 때도 우파가 득세했던 곳이지만 이번엔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이 기세를 선거일까지 이어가서 콜롬비아와 브라질이 연달아 정권 교체에 성공한다면, 사상 처음으로 중남미 주요 6개국(브라질, 멕시코, 아르헨티나, 콜롬비아, 칠레, 페루)에 모두 좌파 정권이 들어서게 된다.
지난해 12월 칠레에서는 학생운동 지도자 출신 35세 가브리엘 보리치가 대통령에 당선됐고, 11월 온두라스에서도 좌파 후보 시오마라 카스트로가 승리해 12년 만에 정권 교체를 이뤘다. 앞서 6월 페루 대선에서는 빈농 가정 출신으로 25년간 초등학교 교사로 일했던 페드로 카스티요가 알베르토 후지모리 전 대통령의 딸인 게이코 후지모리를 꺾는 파란을 일으켰다. 2018년 멕시코, 2019년 파나마와 과테말라, 아르헨티나, 2020년 볼리비아에서 줄줄이 좌파가 정권을 잡으면서 시작된 분홍 물결은 이제 거스를 수 없는 대세다.
균형추가 왼쪽으로 기울어지게 된 결정타는 코로나19다. 감염병 대응 실패로 무수히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고 경제난과 양극화가 심화하면서 분배 정의와 사회 안전망 확충, 보편적 복지 등 진보적 의제에 대한 요구가 커진 것이다. 실제로 남미 코로나19 상황은 심각하다. 브라질은 사망자 수(83만 명) 세계 2위, 페루는 인구 대비 사망자 수(100만 명당 6,000명) 세계 1위다. 이미 위태로웠던 경제는 더욱 황폐화됐다. 남미 노동자 50%가 비정규직이고, 일부 국가에선 실업률이 두 자릿수까지 치솟았다.
그러나 우파 위정자들은 무능했다. 일례로 브라질 보우소나루 대통령은 코로나19 봉쇄 조치를 거부하고, 효과가 입증되지 않은 치료제를 맹신해 비난을 자초했다. 여기에 백신 구매 비리와 국회의원 시절 보좌관 임금 횡령 등 부패 혐의도 불거져 탄핵 압박까지 받고 있다. 좌파 세력의 연이은 승리는 그에 대한 반작용인 셈이다. 에릭 허시버그 아메리칸대 라틴아메리카연구소 소장은 “남미 노동자 계층은 여전히 낡은 버스를 타고 2시간을 가야 낙후한 병원에 갈 수 있다”며 “사회 저변에 우파 엘리트에 대한 불만과 좌절감이 팽배하다”고 지적했다.
남미 신진 좌파가 팬데믹 영향 아래 등장한 만큼, 이전 좌파와는 성격이 다르다는 분석도 나온다. 칠레 보리치 당선자는 “칠레를 신자유주의의 무덤으로 만들겠다”고 선언했지만, 복지 국가 건설, 양성 평등, 성소수자 권리 존중, 기후변화 대응 등도 내세웠다. 온두라스 카스트로 당선자도 부패 척결과 낙태 금지 완화 등을 약속했다. 미국 일간 워싱턴포스트는 “2000년대와 비교해 현재 남미 좌파는 반미주의도 강하지 않을뿐더러 사회주의 이념보다 평등, 포용, 다양성 등 사회적 의제에 초점을 두는 등 새로운 흐름을 보인다”며 “세대 변화를 반영한 포스트모던적 지도자”라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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