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의 공과]
12·12 군사반란, 5·18 유혈진압 주도
삼청교육대·언론 통폐합 등 철권통치
무고한 시민 학살에 끝까지 반성 없어
물가안정 지속 평가에 '3저 호황' 반론
전두환 전 대통령은 한국 현대사에 영원히 아물지 않을 상처를 남겼다. 1979년 12·12 군사반란을 통한 권력 찬탈에 이어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유혈 진압 등으로 군홧발로 민주주의를 무참히 짓밟은 것은 그의 공과(功過)를 따질 때 첫손에 꼽힌다. 총칼을 앞세워 대통령에 올랐지만 재임 기간 인권과 언론자유 탄압, 정경유착과 비자금 조성 등의 역사적 과오는 이어졌다.
하극상과 피로 점철된 그의 등장
그가 한국 정치사에 등장하는 과정은 유례없는 하극상과 무고한 시민들의 피로 얼룩졌다. 1979년 11월 6일 박정희 대통령이 총탄에 쓰러진 10·26 사태 합동수사본부장이 되면서 권력에 대한 야욕을 드러냈다. 육사 11기 동기생이 중심인 사조직 '하나회' 출신 장교들과 함께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도 받지 않은 채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내란 방조 혐의로 강제연행하고, 전방의 육군 병력을 서울로 집결시켜 군을 장악했다.
12·12 군사반란으로 군부를 재편한 전씨는 국민들의 저항이 시작되자, 이듬해인 1980년 5월 17일 최규하 대통령을 겁박해 비상계엄령을 전국에 확대시켰다. 바로 다음날 광주를 피로 물들인 그는 넉 달 뒤에 간선제를 통해 제11대 대통령에 오른다. 그러면서 야당 정치인뿐 아니라 재야 인사 탄압과 삼청교육대 창설 등으로 독재정치의 기반을 구축한다.
12·12 와 5·18로 무소불위 '철권통치'
전씨에 대한 징벌은 문민정부 때인 김영삼 정부 이후 본격 시작됐다. 그가 주도한 12·12 군사반란과 5·18 광주 유혈진압은 1996년 8월 진행된 1심 재판과 이후 대법원 확정판결을 통해 내란수괴, 내란 목적의 살인 혐의가 그대로 인정됐다.
특히 1980년 5월 18일 새벽 2시 전남대와 조선대 등 광주 지역 대학에 대한 계엄군 투입으로 시작된 5·18 광주 유혈진압은 27일 새벽 4시55분 계엄군이 전남도청을 접수할 때까지 열흘간 계속됐다. 2005년 5·18민주유공자유족회의 통계에 따르면 사망자는 총 606명으로 집계됐지만 아직도 암매장 등 밝혀지지 않은 죽음이 많다. 그가 무고한 시민들을 학살한 것은 국가 폭력이 반헌법적·불법적으로 자행한 한국 현대사의 최대 비극이었다. 역설적으로 전두환 정권의 반민주적 철권통치를 종식하려는 민주화운동의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인권 유린, 언론 및 민주화운동 탄압
군사정권 연장을 목적으로 한 전씨의 철권통치는 철저한 인권 유린과 민주화운동 및 언론 탄압을 통해 이뤄졌다. 사회질서 저해사범 단속 등을 이유로 설치한 삼청교육대는 인권 탄압의 대표적 사례다. 1980년 7월 29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가 '불량배 소탕'이란 명분으로 계엄사령부 지휘 아래 일반 시민을 포함해 6만여 명을 검거, 구금해 불법적인 폭행 등을 자행해 악명을 떨쳤다.
재야 인사와 학생운동 세력에 대한 탄압도 서슴지 않았다. 야당 정치인은 물론 대학생들에게 친북용공 혐의을 씌워 고문을 가했다. 1987년 1월 서빙고 대공분실에 연행된 서울대생 박종철의 고문 치사 사건이 대표적이다. 당시 경찰이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말로 덮으려 하면서 그해 6월 항쟁의 국민적 저항의 불씨가 됐다.
28개 신문, 29개 방송, 7개 통신을 각각 14개, 3개, 1개로 확 줄인 언론통폐합은 물론 '언론기본법'을 제정해 언론이 책임을 다하지 못할 경우 정부가 언론사를 정·폐간할 수 있게 했다. 계엄사령부의 보도검열단 기능을 문화공보부 산하 홍보조정실로 옮겨 상시화하고 '보도지침'을 매일 언론사에 통보해 언론을 탄압했다. 밤 9시 뉴스에 전씨 뉴스가 첫 뉴스로 나오는 것을 비꼰 표현인 '땡전뉴스'는 정권 내내 지속됐다.
사법부 단죄에도 끝까지 '과오 부정'
12·12 군사반란과 5·18 광주 유혈진압에 대한 책임이 사법부 판결로 확정됐음에도 그는 자서전 등에서 당시 행위의 정당성을 주장하면서 공분을 샀다. 마지막 순간까지 대국민 사과는 없었다.
5·18 당시 계엄군이 전남도청 옆 전일빌딩에 가해진 헬기사격은 전씨를 다시 법정에 세웠지만 끝내 참회는 없었다. 오히려 헬기 사격을 목격했다고 증언한 고 조비오 신부를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하면서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다.
경제성장·올림픽 유치 평가에도 양론
수많은 과오 속에서도 물가안정 등을 바탕으로 한 경제성장과 1988년 서울올림픽 유치 등을 통한 국제적 위상 제고 등을 공적으로 꼽기도 한다. 그러나 반론도 만만치 않다. 경제성장은 1980년대 3저(저달러·저유가·저금리)현상을 바탕으로 한 호황이었다는 지적이 많다. 또 수출 대기업으로부터 2,159억 원의 뇌물을 받는 등 천문학적인 금액을 부정축재해 정경유착이 만연한 계기를 만들었다. 1995년 검찰은 전씨가 7,000억 원의 비자금을 조성했다고 밝혔다. 이후 사법부로부터 추징금 2,205억 원을 선고받았지만, 현재까지 전씨가 미납한 추징금은 956억 원에 이른다.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 유치를 통해 한국의 발전을 세계 무대에 알렸다. 올림픽 개최를 위한 사회간접자본 투자로 내수활성화가 이뤄졌고, 올림픽대로와 한강 정비, 강남 개발이 본격화했다는 게 전씨 측 평가다. 당시 도입된 프로야구를 비롯한 스포츠와 영화 분야도 급성장했다. 이를 두고 '3S(스포츠·섹스·스크린)정권'이란 꼬리표가 붙기도 했다. 당시 국민들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꺾기 위해 스포츠와 영화를 활용한 우민화 정책을 폈다는 비판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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