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올바름(PC)이 게임을 망치고 있다”는 주장이 있다. 인종과 성별, 성적지향, 장애 등을 비롯한 모든 차원에서 차별을 철폐하려는 PC운동이 게임계에서도 영향력을 발휘해 표현의 자유를 억압했고 결과적으로 게임이 재미없어졌다는 이야기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게임 속 등장인물이 여성이나 성소수자 흑인, 예쁘거나 멋지지 않은 외형의 인물로 채워져 공감하거나 몰입하기가 어려워졌다’는 취지의 불만을 접하기가 어렵지 않다. 디즈니가 인어공주 실사영화의 주인공으로 흑인을 선정한 이후, 일각에서 ‘우리의 인어공주는 이렇지 않았다’는 비판이 쏟아진 것과 유사한 현상이 게임계에서도 벌어진 셈이다.
세계적 흥행작이었던 ‘더 라스트 오브 어스’의 후속작으로 지난해 출시된 ‘더 라스트 오브 어스 파트2(라오어2)’ 역시 이러한 논란에 직면했다. 새롭게 등장한 여성 주인공의 외모가 이제까지 ‘전형적’이라고 여겨졌던 여성 등장인물과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온라인 공간에서는 새 주인공을 두고 ‘여성은 그렇게 근육질 체형일 수 없다’거나 ‘여성인지 남성인지 모르겠다’는 비판이 나왔다. ‘체형은 넘어가더라도 얼굴은 안 되겠다’는 취지의 의견도 있었다. 이쯤 되면 궁금하다. 게이머들이 이처럼 반발하는데 ‘PC 묻은 게임’이 계속 만들어지는 이유가 뭘까?
"결정적 이유는 새로운 소비자 확보"
사회학 연구자 최태섭 작가는 이달 내놓은 ‘모두를 위한 게임 취급 설명서’에서 그 이유를 “비즈니스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인권단체 등 시민사회의 압력도 존재했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새로운 수요층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는 이야기다. 할리우드 영화계가 세계인을 겨냥하면서부터 ‘백인 남성 주인공이 유색인종 악당을 무찌른다’는 줄거리를 멀리하는 것과 비슷한 이유다. 17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에서 최 작가를 만나서 게임의 변화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최 작가는 게임업계에서 일하는 페미니스트나 ‘PC주의자들’이 사상을 전파하려고 게임에 PC 요소를 삽입한다는 일각의 인식과 달리 최근의 변화는 산업적 이유에서 비롯됐다고 주장했다. 최씨는 “옛날에는 문화콘텐츠들이 서구 백인의 시각으로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았는데 시장을 넓히는 과정에서 항의를 받으면서 ‘우리가 백인의 시각에서 묘사했던 것들 중에 틀린 것들이 너무 많았다’는 인식이 형성됐다”면서 “결국 더 많은 사람들을 소비자로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PC로 인식되는 요소들을) 반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최 작가는 “대형 퍼블리셔(유통사)들이 그러한 흐름을 오히려 적극적으로 가져가는 데는 마케팅적인 이유가 있다”라고 강조했다.
"게이머 집단은 남성이란 신화"
그렇다면 게이머들은 왜 반발할까? 최 작가는 ‘게이머들이 반발한다’는 표현은 현실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남성 게이머 중 일부가 불만을 적극적으로 표출하면서 그들의 주장이 전체를 대표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라는 이야기다. 최 작가는 저서에서 2019년 문화체육관광부의 조사결과를 제시하면서 게이머 ‘코어(핵심) 집단’은 청년-남성-미혼이지만 게임을 취미로 꼽는 인구(전체의 15%)의 30%는 여성이라고 강조한다. 최 작가는 "30%는 최소 추정치이고 게임이용자실태조사에서는 더 크게 나타난다"라고 강조했다.
이어서 최 작가는 “게이머 집단은 기술에 익숙하고 교육을 많이 받은 젊은 남성이라는 인구학적 신화가 있다”면서 “그것을 기반으로 게임계에서 벌어지는 일을 해석하고 논의하게 되면 그 인구학적 특성에 들어맞지 않은 사람들이 게임계에 들어오기가 굉장히 어려워진다”라고 설명했다. 최 작가는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PC함이 싫다’고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목소리가 큰 소수’일 가능성이 있다. 모든 남성 게이머들이 그런 입장에 동조하는 것도 아니다”라면서 “무엇보다 게임업계는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야 하므로 코어 집단의 말만 들을 수는 없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남성이 다수이지만… 게임도 대중화돼 사회적 책임도 커져"
그러나 성별이나 성적지향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집단의 의견과 취향도 반영해서 게임을 제작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또 모든 게임이 문화적 다양성을 추구해야 하는지, 다양성을 어떤 수준까지 구현해야 하는지도 논란거리다. 남성과 여성을 겨냥한 게임을 따로 만들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에 대해서 최 작가는 “인간과 사회를 모사하는 모든 매체에는 사회적 책임이 따른다. 게임에서만 그것들이 통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다”라고 강조했다. 최 작가는 “게임이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적었던 시절, 비교적 소수가 즐기던 시절에는 제약이 적었던 게 사실이지만 이제는 어린애들부터 노인까지 다양한 사람이 접하는 매체가 됐다”라면서 “불특정 다수가 게임을 접했을 때 무엇을 느낄 것이냐에 대해서 고민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최 작가는 “어떤 영화나 게임에서 인종차별적이거나 일제를 미화하는 내용이 나오면 한국인은 엄청나게 항의한다”면서 “그 영화나 게임이 누구를 위해서 만들어졌는지, 일본 내수용인지는 신경 쓰지 않는다. 문화적으로 파급효과가 있고 왜곡된 묘사에는 저항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여성형 게임을 따로 만들거나 장르를 분리하면 된다는 식의 주장으로는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고 강조했다.
이어서 최 작가는 “일부 게이머들은 자기들의 입장을 제외한 나머지를 외부 의견으로 치부하면서 게임을 게임으로 내버려두라고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고 강조했다. 최 작가는 “매체는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한테 영향력을 끼치고 팔아먹기 위해서 만드는 것이고 그러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어떤 보편적 성격을 띠게 된다. 그것을 ‘내 마음대로만 할 거야’라고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면서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장벽 없이 게임을 즐길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억지스럽지 않게 느껴지도록 설계해야"
다만 최근의 변화에 대해서 반감을 표시하는 게이머들 가운데는 ‘억지스러운 변화’를 문제 삼는 경우도 있다. PC에 부합한 게임을 만들다가 줄거리나 작동방식을 무리하게 뜯어고친다는 지적이다. 라오어2의 경우, 주인공의 외형 이외에 게임을 즐기는 방식을 두고도 많은 문제제기가 뒤따랐다. 최 작가는 저서에서 노골적 폭력과 섹스를 다루면서도 게이머에게 ‘방금 네가 한 행동이 정말로 정당한 것이었는지’ 묻는 라오어2의 게임 방식이 플레이어를 불편하게 만든다고 지적했다. 제작진이 굉장히 의도적으로 게이머들이 게임 내에서 동일시할 수 있는 존재와 성적 대상화할 수 있는 존재를 없앴다는 이야기다.
최 작가는 그러한 주장들에 대해서 “여러 게임들에서 억지로 (PC를) 욱여넣었다는 인상이 나타나는 것은 사실”이라면서 “당연히 등장인물과 같은 정체성을 지닌 사람들이 실제로 존재할 수 있는 합당한 방식으로 묘사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 작가는 “가령 성소수자(LGBT) 커뮤니티라고 해서 그들 스스로가 ‘짱 세고’ ‘갑자기 튀어나와서 모든 것을 해결하는’ 등장인물로 묘사되는 걸 반기지는 않는다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여성은 체력이 약하니까 중화기를 들 수 없다’는 식의 주장을 찬성하는 것이 아니다. 게임을 그렇게 설계하려면 그에 걸맞은 장치가 뒤따라야 게이머들이 받아들이기 쉽다는 주장이다.
공격이 아닌 대화가 필요할 때
게임계에 부는 새로운 바람이 불쾌한 게이머들이 존재할 수 있다. 그렇다고 제작진을 대상으로 사상검증이나 사이버 불링(괴롭힘)을 벌이는 것은 해결책이 될 수 없다. 게임을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함께 고민하고 토론해야 더 많은, 더 다양한 사람이 게임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이 최 작가의 주장이다. 최 작가는 “게임이 섹스나 폭력을 무조건 다루면 안 된다는 식의 주장에 게임을 조금이라도 하는 사람들이 동의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시원하게 때려 부수는 게임, 성인용 게임도 가치가 있다”면서도 “하지만 여자 캐릭터는 옷을 안 입고, 음성 채팅에 참여하면 ‘여자다, 여자다’ 하면서 난리를 치고 욕을 하는 환경에서 여성 게이머가 게임을 즐길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했다. 공격이 아닌 대화와 토론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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