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의 기억법... 그 문장 하나가 훅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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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의 기억법... 그 문장 하나가 훅 들어왔다

입력
2021.11.13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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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 여행지에서 발견한 힘이 되는 문구

여행 역시 인생의 일부다. 지금의 삶을 이어가는 그 자체만으로도 훌륭하다고 응원하는 보너스, 별책부록으로 다가온다. Ⓒ강미승

어떤 장소는 명징한 문장 하나로 기억된다. 그것으로 그 장소, 그 나라를 기억하고 다시 한번 가보리라 다짐한다. 가끔은 뾰족한 화살촉이 되어 가슴을 뚫고, 때론 또 다른 오늘을 살아가는 힘이 된다. 여행자의 자기암시적 기억법이다.

멕시코 플라야델카르멘의 “Live Life”

그저 그런 바다일 수도 있었지만, 스스로 마음을 약속한 중요한 바다가 되었다. 한 문장의 힘이었다. Ⓒ강미승


그날 거짓말처럼 날이 갰다. 솜사탕 같은 구름도, 발 연기하듯 걷던 이들도 어색했지만, 해답을 찾은 것 같았던 날이었다. Ⓒ강미승

유명 관광지보다는 덜 도도한, 그런 곳에서 고삐 풀린 히피의 나날을 누리길 원했다. 그래서 택한 장소가 칸쿤에서 68㎞ 남짓 떨어진 플라야델카르멘. 탕탕의 다리 부상으로 장기 체류한 이곳에서 한 일이라곤 틈날 때마다 바닷가를 산책하는 것이었다.

무료하고 지루하고 이대로 더 나아갈 수 있을까 불안에 접어 들었을 때, 누군가 해변에 써 놓은 글귀 하나, ‘Live Life’. 따분함도 받아들여야 할 삶의 일부이고, 삶은 현재진행형이란 명제가 뚜렷해졌다. 언젠가 큰 썰물에 지워져 버린다 해도 가슴 속에 새겨진 글자까지 지울 순 없겠지. 그날 나와 같은 마음이었을 누군가와 동지 의식도 생겼다.

호주 데일리워터스의 “Smile! You are on camera”

그렇지. 카메라에 잡히니까 찔리지 말고 웃어야지. Why not? Ⓒ강미승


빈티지 컬렉션. 펍을 구경하는 시간이 술 마시는 시간보다 길 수 있다. Ⓒ강미승


분홍빛 꽃이 만발한 11월의 펍. 마을의 첫인상이자 끝 인상이다. Ⓒ강미승

호주의 북부 다윈에서 남쪽으로 가던 길이었다. 대화도 웃음기도 싹 가실만한 허허벌판이 이어졌다. 약 600㎞의 국도를 달리다가 탈진 상태에서 마을로 들어섰는데, 궁금증을 유발하는 건물과 표지판이 보인다.

좌측엔 설치미술을 연상케 하는 난해한 주유소가, 우측엔 대낮부터 소음이 새어 나오는 술집(펍)이 자리 잡고 있었다. 고작 열 명도 살지 않는 마을에 펍이라니? 들어가 보니, 반전 문장의 파라다이스다. ‘술 마시는 동안엔 일하지 말라’ ‘감시카메라 앞에서 웃어라’ 등은 물론 전 세계 유랑자의 푸념 섞인 손글씨가 여행자를 피식피식 웃게 만든다. 사막 한가운데서 시원한 맥주로 목을 축이는 것만큼이나 쾌청한 유머를 장전했다. 이왕이면 즐겁게, 또 다른 길을 나설 이유가 충분했다.

미국 하와이의 “Only”

하와이를 떠올릴 때면, 이 세상에서 ‘나는 유일해’라는 시답잖은 결심을 하곤 한다. Ⓒ강미승


사진으로는 파인애플 농장에서의 감상을 제대로 표현할 길이 없다. 마음이 광활해지는 걸 느낀다. Ⓒ강미승

북적거리는 오아후섬 중심가에서 노스쇼어(North Shore)로 달리다 보니, 뜬 눈을 다시 한번 동그랗게 하는 풍경이 펼쳐졌다. 파인애플 농장이다. 하늘도, 농장도 포복한 상태로 눈높이에서 그림을 그린다. 추스르지 못할 환희 가운데 레이더망에 잡힌 단어가 있으니 ‘ONLY’다. 유일무이한 풍경이라고? 거기에 서 있는 나 역시 그렇다고 말하는 듯했다. 착각이라면 큰 착각이었다. 실상은 버스만 이용 가능한 차선이라는 ‘ONLY BUS’의 일부였다.

여행은 익숙한 일상도 달리 보게 하는 재주를 지닌 게 분명하다. 가끔 여행 훈련법을 쓴다. 몸과 마음이 탈탈 털린 상태가 되면, 한국에서도 여행자처럼 세상을 보는 것이다. 한국어를 낯선 언어로 보고, 길가의 야생화에도 관심을 기울이며 오늘을 유일하게 본다.

인도네시아 발리의 “Stupid is as stupid does”

생각보다는 행동. 오랜 시간 뭔가 머뭇거리게 하는 생각이 있을 때면 이 문장을 떠올린다. Ⓒ강미승


포레스트 검프가 되어 보는 인증샷 타임. Ⓒ강미승

아니 발리까지 와서 왜 굳이 체인점을 가야 하냐며 불평하던 참이었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를 모티브로 한 레스토랑 ‘부바 검프 쉬림프(Bubba Gump Shrimp)’였다. 습관대로 실내를 사방으로 훑어보니, 뭔가 훅 치고 들어왔다.

‘바보는 바보 같은 행동을 한 사람이지.’ 심히 찔렸다. 후회하고 책망하고 그런 자신을 스스로 무한 질책했던 그 바보가 단단히 들킨 느낌. 귀로 들을 때와 시각적으로 잡아둘 때의 차이는 컸다. 깊은 생각에 빠지다 보면 걱정도 함께 쌓이는 걸 알기에, 바보가 되지 않기 위해 또 바보처럼 한 발 나아간다.

강미승 여행칼럼니스트 frideameetssomeon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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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다와 탕탕의 지금은 여행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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