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철군으로 아프간 내 정보망 붕괴
對테러 작전 난관…대안은 탈레반 공조
英·인도 등 탈레반과 회담…외교적 압박
“우리는 당신들과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지구 끝까지 쫓아가 응징할 것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영국은 테러에 대응하기 위해 합법적 자위권을 행사할 권리가 있다. 모든 수단을 동원해 싸울 것이다.”
도미닉 라브 영국 외무장관
준엄한 ‘선전포고’와 함께 지구촌에 또다시 전운이 감돌고 있다.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 철수 완료 이튿날인 지난달 31일(현지시간) 미국과 영국은 카불 공항 테러 배후인 이슬람국가(IS) 아프간 지부 호라산(IS-K)을 향해 연달아 ‘보복 예고장’을 날렸다. 마치 20년 전 9·11테러 직후로 되돌아간 듯, ‘테러와의 전쟁’이 처음부터 다시 시작되는 분위기다. 새로운 게 아니라 원점으로의 회귀다. 달라진 게 있다면 공격 대상이 알카에다에서 IS-K로 바뀌었다는 것뿐. ‘아프간 전쟁의 역설’이다.
테러 위협은 엄연한 현실이다. IS-K의 자살 폭탄에 무고한 아프간인과 서방 군인 등 170여 명이 숨졌다. 아프간이 국제 테러조직의 은신처가 될 것이란 우려도 적지 않다. 미 일간 월스트리트저널은 “미국의 희망은 아프간을 떨쳐내는 것이었지만 당면한 현실은 다시 아프간에 발목이 잡혔다는 것”이라며 “미군 철수가 빚어낸 아이러니”라고 짚었다.
대(對)테러 작전의 성공 여부는 정보력에 달려 있다. 그러나 탈레반의 기습적인 카불 점령(지난달 15일)부터 아비규환이었던 대피 및 철군 과정, 전쟁의 완전한 종료 선언(지난달 30일)까지 16일 동안 이어진 혼란상에서 보듯, 미국은 ‘정보전’에서 완전히 실패했다. 특히 지난달 29일 IS-K 자살폭탄 테러 시도 용의자 차량을 상대로 단행한 2차 보복 공습 과정에선 전혀 예상 못했던, 2~7세 어린이 6명 등 민간인 10명이 숨지는 비극이 벌어졌다. 모두 정보력 과신이 빚어낸 참사였다.
문제는 미국이 아프간 내 모든 자원을 철수시킨 터라, 앞으로 정보 수집은 더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영국 BBC방송은 이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와 다국적군은 아프간 보안기관이 제공한 정보로 지난 20년간 지하디스트(이슬람 극단주의 무장투쟁) 세력을 제압할 수 있었다”며 “탈레반의 재집권으로 미국 중앙정보국(CIA)과 영국 해외정보국(MI6)은 아프간 내에서 신뢰할 수 있는 정보기관과 특수부대, 인적 네트워크를 상실했다”고 진단했다. 테러와의 전쟁도 순조롭지 않을 공산이 크다는 얘기다.
미국은 철군 이후 ‘초지평선 작전(over the horizon)’을 수행한다는 계획이다. 고도의 감시망을 통해 아프간 외부에서 무인기를 이용해 핀셋 타격하는 전략이다. 카타르 도하에 위치한 알우데이드 미 공군기지는 대테러 작전 사령부가 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빈틈없이 수집된 지상 정보가 없다면, 치밀한 전략과 최첨단 무기도 무용지물이 되거나, 심지어는 민간인마저 해치는 흉기로 전락할 위험성이 매우 높다. BBC는 “아프간 내 정보원들은 이미 해외로 도피하거나 잠적했다”며 “테러조직 내부에 요원을 성공적으로 침투시키고 인적 정보망을 재구축하려면 몇 년이 걸릴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결국 가장 현실적이면서 효과적인 전략은 ‘적과의 동침’, 즉 탈레반과의 공조다. 탈레반은 평화협상 과정에서 아프간이 테러단체의 은신처가 되도록 놔두지 않겠다고 수차례 공언했다. 자신들을 “배교자”라고 비난하는 IS-K도 적대시하고 있다. 국제사회에서 정상국가로 인정받기 위해서라도 테러단체 축출에 나설 수밖에 없다. 다만 카불 공항 테러로 드러났듯 탈레반에게 그럴 만한 의지와 능력이 있는지는 다소 회의적이다.
그럼에도 현재로선 미국과 탈레반이 정보전에서 긴밀히 협력하는 수순을 밟을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철군 절차 논의차 카불에서 회담을 가진 윌리엄 번스 CIA 국장과 물라 압둘 가니 바라다르 탈레반 정치국장 사이엔 이미 소통망도 구축돼 있다. 정치학자 오마르 사드르는 “미국이 공개적으로 탈레반을 합법 정부로 인정하진 않을 것”이라면서도 “그들의 관계는 단순한 업무적 거래 관계 이상인 것으로 보인다”고 영국 일간 파이낸셜타임스에 말했다.
탈레반 압박을 위한 외교전도 이미 시작됐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이날 “아프간 과도기 정부특사로 임명된 사이먼 개스 합동정보위원회 의장이 카타르 도하에서 탈레반 고위급 대표와 회담했다”며 “아프간이 국제 테러기지가 되지 않도록 하는 방안이 주요 의제로 다뤄졌다”고 보도했다. 리처드 무어 MI6 국장도 지난 주말 카마르 자베드 바즈와 파키스탄 육군참모총장과 긴급 회담을 갖고 정보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주변국들 움직임도 바빠졌다. 인도 NDTV는 이날 디팩 미탈 카타르 주재 인도대사가 셰르 모하마드 아바스 스타니크자이 탈레반 정치사무소 대표를 만나 테러 위협에 대한 우려를 제기했다고 전했다. 줄곧 탈레반을 배척해 온 인도가 탈레반을 만난 건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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